2020. 8. 16. 22:30ㆍ문화
인공지능과 로봇에 대한 이야기는 공학자와 과학자만 말 할 수 있는 연구 대상에서 이제는 일반사람들의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거의 연일 인공지능에 대한 기사를 접할 수 있다. 작곡이나, 그림을 그리거나, 의료 시술, 종교 활동을 하는 인공지능 로봇에 대한 기사는 식상할 정도다. 로봇이 국내에 언제 처음 소개되었는지부터 해서 예술작품에 등장하는 로봇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상상력의 중요성과 인공지능 로봇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해보겠다.
로봇에 대한 이야기가 국내에 언제 처음 소개되었을까?
"카렐 차페크의 문명의 몰락과 인류의 재생를 주제로 한 희곡작품인 인조노동자"(1925. 2. 9. 『동아일보』)를 소개한 기사가 있다. 이걸 보면 국내에 적어도 1925년 이전에 로봇이 국내에 알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문을 더 읽어 보면,
"우리들만큼 슬픔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현대는 문명하였기 때문이다. 고대의 사람은 행복이었다. 현대인은 유쾌해야할 노동을 하지 못하고 오직 노동을 이해타산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금일의 기계문명의 몰락을 부르짖으며 하나의 광명이 있다."
이렇게 작품에 대한 서두가 거창한데, 과학문명이 발달해서 인간은 불행하다는 말로 들린다. 이 문제작의 제목은 국내에는 인조노동자로 개벽이란 잡지에 소개, 번역되었고, 정식명은 Rossums Universal Robots라는 작품이다. 로섬 우주 로봇 회사로 번역을 해 소개하고 있다. 작품을 한 줄로 줄이면 로봇들이 인류를 물리치고 자신들만의 국가를 만드는 연극 작품이다.
"연극에서 인조노동자는 가격이 헐하고 능률이 많음으로 세계 각국에서 염가로 수입해서 노동자의 대용으로 사용, 군비확장에 경쟁적으로 강대국에서 로봇을 군인으로 사용, 노동자들이 타격을 받아서 노동자들이 극도로 가난해진다. 이 때문에 인조인간들이 사람들한테 극도로 학대를 받아서, 이후에 로봇들이 폭동을 일으킨다. 그리고 로봇들이 국가를 세운다."
총 4막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희곡을 쓴 사람은 ?
카렐 차페크는 1890년에 태어났는데, 체코가 낳은 위대한 작가로 또 로봇의 아버지로 국내에 알려져 있다. 그 이유가 카렐 차페크를 통해서 로봇이란 단어가 세계적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로봇이란 개념은 형이 만들었는데, 작품으로 산업화 시대를 예언하고 있다. 1921년에 처음 초연이 되었는데,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모형인 실제 로봇이 등장하지는 않고 로봇으로 분장한 실재 배우들이 연기를 했다. 당시의 산업화와 기계문명을 비판하고 있다. 지금이야 로봇이 흔하지만, 로봇이란 개념을 만들고 작품화했다는 점에서 상상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놀라운 점은 작품에서 로봇들이 기억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는 점, 또 계속 인간을 닮아가면서 감성적 로봇으로 변한다는 점, 기계공학에서 유전공학으로 후에 로봇이 창조된다는 점 등을 예언하고 있는데, 예술적 상상력이 과학과 공학을 앞서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적 상상력이 과학과 공학을 앞 설 수 있을까?
실재로 1928년 10월 28일자 국내 신문을 보면, 카렐 차페크의 희곡 작품이 있고난 후에 구미 과학자는 인조인간 실현의 연구가 성행. 영국 런던에서는 전기장치로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고, 외부에서 무선으로 방송을 받아 소리를 지르는 로봇을 개발했다고 화보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 1929년 9월 26일자 신문을 보면 미국에서 텔레뻑쓰라는 인조인간 발명, 전화로 부르면 대답도 하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설교를 들르러 가기도 하고 교통정리도 하고 면도도 할 수 있고 대략 백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1932년 3월 31일자 신문을 보면, 다름박질 연습을 로봇 상대로, 런던에 설비가 되었는데 다름박질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속력을 낸다. 전속력은 시속 60마일이다. 시속 96km 정도 됩니다. 육상훈련을 도움을 주는 로봇이었다.
로봇에 대한 상상력이 연극작품과 달리 사람에게 많은 편리를 주고 있다.
염려와 다르게, 우리가 알게 모르게 많은 자동화기기에 도움을 받아 생활을 하고 있다. 자율주행 자동차에 대한 기사는 식상한 기사가 되었다. 이것도 오래전부터 있던 기사였다. 1933년 5월 23일자 신문을 펼치면, 로봇으로 비행기 조종 세계 일주 계획, 뉴욕에서 비행기로 세계 일주에 성공한 포스트씨가 계획, 이미 로봇으로 기체조종은 이미 시험을 마쳤다는 기사가 있다. 1933년 6월 4일자 기사를 보면, 로봇과 조종사가 함께 탑승해서 로봇 조종으로 미 대륙을 횡단하는데 성공했고, 13시간 25분으로 신기록 작성했다는 기사가 있다. 로봇이란 개념이 자동화기기를 뜻하고 있다. 이후에 자동 착륙장치를 개발했다는 기사가 이어진다. 자동항법장치 같은 개념인 것 같다.
예전에도 인공지능이 예술작품을 만든 기사를 있을까 ?
이것 역시 최근에 있는 기사 거리가 아니다. 1930년 12월 19일자를 보면 영화각본작가 위클리프 힐이라는 사람이 소설제작 로봇을 발명,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여러 원소를 자유자재로 분석 다시 조합 무한수량의 신 영화 각본을 제작할 수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최근에는 기사를 작성하거나, 작곡, 그림을 그리는 인공지능이 등장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단순 노동에서 창작의 영역까지 점점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최근 독일에 등장한 로봇 목사를 비롯해 중국의 로봇 스님, 미국의 유대교 로봇 랍비 등도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서, 어쩌면 가장 보수적인 종교계까지 첨단기술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는 상징적 의미를 던 "(『경향신문』 2019.3.23.) 지는 기사가 있다.
인공지능이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하고 있는데, 이에 따른 사회문제는?
인공지능 때문에 많은 직업이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지만, 기술발달에 따라 새로운 직업이 만들어질 것이란 긍정도 있고. 인공지능이 의식을 갖게 되면 사람과 같은 권리를 주어야 하는지 묻는 질문도 있다. 이건 줘라 마라 법적으로 강제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다. 사람은 의식이 없는 사물에도 경외하기도 학대하기도 한다. 종교적 상징물이 예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소수의 문화로 서로 다른 문화를 존중하는 형태로 나갈 것 같다. 도구란 것이 누가 쓰느냐에 따라 생산적인 것이 되기도, 파괴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요리사의 칼과 강도의 칼이 그렇다. 누가 그것을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미래사회에 인공지능을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느냐를 먼저 물어야 할 것 같다. 돈 많은 사람들의 소유물이 되어서, 강자의 수단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인공지능이 사회적 약자를 스스로 도울 수 있게 된다면 평등한 세상이 될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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