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 22. 22:02ㆍ문화
독립투사와 친일파
1월 12일에 두 사건이 있었다. 먼저 1923년 1월 12일은 의열단 단원 김상옥 의사가 독립투사를 탄압하며 유명세를 떨치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날이다.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자결해 34세 짧은 생애의 최후를 마쳤다. 김상옥 의사의 이름을 잘 모르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미 영화나 드라마, 소설로 만들어져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알 수 있다. 이성아 작가가 쓴 『경성을 쏘다』, 김동진 작가의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이란 책 등에서 잘 소개가 되어있다. 특히 이 책을 영화화한 작품이 있다. 김지운 감독의 『밀정』! 영화에서 김우진 역을 영화배우 공유 씨가 맡았다. 김상옥 의사의 전기를 읽다보면 영화에서 김우진이 절로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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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반해서 친일파 박중양은 해방 후에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법정에 서게 된다. 1949년 1월 12일이었다. 박중양 등 반민특위에 체포된 친일파에 대한 공판이 서울 특별법원에서 열렸다. 이 중 박중양은 조선총독부의 통치를 옹호하고 조선총독부는 지역, 신분차별 없이 인재를 등용했으며, 이완용은 시대의 억울한 희생자라고 주장을 해서, 방청석에서 소란이 벌어졌고, 전국적인 논란이 된다. 이정도면 친일파가 아니라, 아예 일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방 후에도 친일 행위를 반성하지 않고 떳떳하게 자랑한 사람이다. 독립투사를 조롱하고 비행을 일삼다가 1959년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한 인물이다. 일대기를 읽을수록 참으로 분노 게이지를 상승하게 만든다.
의열단은 어떤 단체인가?
위키백과에서 의열단을 검색해 보면, “의열단(義烈團)은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아나키스트 성격의 무장독립운동단체로 1919년 11월 9일 설립됐다. 중국 상하이에서 무력항쟁으로 일본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했다. 이들이 상하이에서 활동한 이유는 프랑스와 일본의 대립으로 인해, 프랑스 조계지역(외국인 치외법권지역)의 프랑스 경찰이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의열단은 비폭력투쟁인 3.1운동이 일본의 폭력으로 실패한 것을 보았고, 광복을 위해 무력만을 수단으로, 암살만을 정의로 삼아 5개소의 적 기관 파괴와 7악의 제거를 위해 파괴활동을 벌였다. 여기서 5개소의 적 기관은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경찰서·기타 중요 기관이며, 7악은 총독부 고문·군 수뇌·타이완 총독·친일파 거물·밀정·반민족적 토호·열신(劣紳)이다. 의열단에서는 폭력투쟁으로 일본의 지배, 착취, 친일파들의 일본과의 결탁에 맞"섰다.
김상옥 의사의 생애
김상옥 의사는 1890년 1월 5일 태어나서 1923년 1월 22일에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1월 12일에 폭탄을 투척하고, 열흘 후에 순국했다. 1919년 3·1 운동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고, 반일 비밀 조직인 혁신단을 결성한 뒤 지하 신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해 배포했다. 3·1 운동 당시 만세를 외치던 여고생을 살상하려고 한 일본군경을 저지하고 폭행했다. 군경의 검을 탈취하여 자신이 보관했다. 이후 요인 암살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구체적인 암살 계획까지 세운 것이 드러나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 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조소앙 등과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1922년 10월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폭탄, 항일 문서를 가지고 서울에 잠입한다. 1923년 1월 12일 독립운동 탄압의 본산으로 악명이 높았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해서, 일본인 경찰과 어용신문 매일신보사의 사원 1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투척 사건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피신하던 중, 사이토 총독이 회의에 참석하러 도쿄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할 목적으로 서울역 주위를 수일간 배회하다가 종로경찰서 무장 경찰 20여 명에게 포위된다. 김상옥의사는 그들과 총격전을 벌여 유도사범이자 형사부장인 다무라를 사살하고 경부 20여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고봉근의 집에서 경부 20여명에게 포위당한 후, 반격해 중상을 입혔다. 김상옥은 1923년 1월 2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1천여 명의 일본 군경에게 포위당해 민가의 지붕을 뛰어다니며 일본 군경 400여 명과 3시간동안 총격전을 벌이다 총알이 다 떨어지자 남은 한발로 자결하여 의젓하게 최후를 마쳤다. 시신에는 11발의 총알이 박혀 있었다.
친일파 박중양의 생애
박중양은 1872년에 태어나서 1959년에 사망한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의 관료였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지낸 고문이자 백작이었다. 1945년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전 직전까지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을 역임했다. 해방 후 말년에는 대구 오봉산 근처에 은거하며 이완용에 대한 변호,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존경심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이승만과 이시영, 함태영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의 무능함을 수시로 조롱, 비방하기도 했다. 술을 좋아해서, 한 번에 일본 맥주 60병을 마셨고 소주는 40병까지 마신 일도 있다. '박태백', '보리술 지사'라는 별명이 있다. 유창한 일본어에 언변이 좋았고, 중국어, 러시아어를 구사했다. 술을 잘 마셔서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고급관료에서 귀족이 된 사람이다.
악덕한 기행을 많이 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들개 사냥 대 작전이다. 박중양이 1908년에 벌인 개 소탕 작전이다. 이때 194마리의 개가 비명횡사했다. 1934년의 잡지 『별건곤』에 의하면 박중양이 야밤에 기생집에서 나오다가 들개들에게 물려 봉변을 당한다. 그 분풀이로 들개들을 소탕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대구시내에 "열흘 사이에 개의 종자가 없어지고 말았다."고 쓰여있다. 이후에 '개백정 관찰사', '야견 투살대감'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1924년 11월초에 속리산 성추문 사건이후에 도지사직에서 사퇴했다. 내용을 더 쓰기가 끔찍할 정도인데, 1928년에 황해도지사로 복직을 하게 된다. 이후에도 여러 요직을 거치고 해방을 맞는다.
1949년 1월 8일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대구 침산동 자택에서 반민특위 수사관에 의해 체포된다. 재판 중에 반민족성을 지적하는 반민특위 판사들에게 호통을 쳤다. 조선총독부의 통치를 옹호했다. 조선총독부는 지역, 신분차별 없이 인재를 등용했으며, 이완용은 시대의 억울한 희생자라고 주장을 해서, 방청석에서 소란이 벌어졌고, 전국적인 논란이 되다. 형무소에 수감 도중에 비단 이불 또는 참새 털로 된 이불을 덮고 자서 다른 수감자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1월 29일 대구에서 상경한 일본인 첩이 매일같이 수사관들에게 와서 이불을 차입시켜달라고 아우성쳤다. 일본인 첩이 여러 번 눈물로 호소한 끝에 비단 이불은 특별히 반입이 허용되었다.
1949년 반민특위가 해산되었을 때, 별다른 처벌받지 않고 최종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에도 독립투사 등을 조롱하고 친일을 옹호하고 자랑하다 사망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공동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4년 대구 침산동에 있던 박중양 기념비가 철거되었다.
김상옥 의사의 부활
이에 반해 김상옥 의사는 400여 명의 일본 군경의 포위 속에서도 단신으로 여러 시간 동안 버티며 총격전을 벌인다. 이 사건을 당시 중학생이던 서양화가 구본웅이 직접 목격했는데, 해방 후 시화집 『허둔기』에 스케치와 추모시를 남겼다. 1988년 서울 종로에 김상옥 의거 터 표석이 설치되었다. 1998년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동상이 설치되었다. 2016년 김지운 감독의 영화 『밀정』의 주인공으로 부활 했다.
참고문헌
※ 이 글은 위키백과에서 검색어 "김상옥", "의열단", "박중양" 등으로 검색한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분은 위키백과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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