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왕골(莞草)의 추억

2021. 9. 29. 10:54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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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전북은 완초(莞草, 왕골) 공예로 유명했다. 왕골은 높이 60∼200㎝까지 자라는 공예 작물이다. 현재는 “왕골 하면 강화도의 화문석”이다. 1935년 각도의 수출을 위한 조선 공산품의 주력 상품을 보면, 전북은 완초 제품, 단선, 조선지, 온돌지, 경기는 마포, 충남은 마직물 등이었다. 이듬해 전북도 산업과는 수출과 농촌 부업 개발을 목적으로 완초 세공품을 장려하기 위해 완주와 옥구 양군에 5개년 계획을 세우고 강습회를 시작한다. 그 결과 1937년 완산금융조합과 임피금융조합은 관내에서 생산한 왕골 슬리퍼 1,600족을 미국으로 첫 수출한다.

  1938년 3월 대판(오사카)조선물산협회가 전북도 산업장려관에 십만 족의 슬리퍼를 주문한다. 같은 해 4월 전국의 공산품 전시회에서 전주의 완초화(구두)가 선보인다. “아주 첨단적 유행의 양화의 모양으로 되었는데 (뒷굽은 목재이고) 구두창(바닥)은 가죽으로 양화와 같고 거죽은 고은 완초로 만들어서 섬세한 장식까지 한 것이 여름철 귀부녀의 유행화로 효과 백 퍼센트의 물건”이라는 호평과 “이 진귀한 신품은 미국 수출품으로 조선 시장에는 공급을 못하게 된다.”는 아쉬움을 전하고 있다.

  이후 전주의 완초 제품이 다시 부각되는 것은 1962년이다. 전주 고려공예조합 5백여 명의 조합원이 슬리퍼, 핸드백, 모자 등을 제작하고 있었다. 당시 세평을 보면 “외국 사람의 취미와 유행에 알맞도록 항상 창의를 발휘하고 기술 향상에 힘쓰는” 완초 제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1966년 전국의 완초 재배 면적은 약 1,300 정보(12.89㎦), 연간 수확량이 약 52 만관(1,950톤)이었다. 주산지는 전주, 대구, 합천 등으로 국내 생산량의 90%를 차지했다. 연간 50여 만 점의 제품이 생산되었고, 주로 미국(50%), 영국, 일본,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등으로 수출되었다.

※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책을 참고해 주세요.

 

전주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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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aladin.co.kr

함(函),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유물

  현재 전주의 완초 공예품은 어디로 사라지고, 합죽선은 전주 특산의 명품으로 맥을 잇고 있을까? 1966년 전국 각도의 대표적인 공예품에 대한 실태 조사가 있었다. 대량생산으로 사이비 모더니즘이 공예품을 침식하고 있고, 가정 내 부업 수준의 공예품으로 장인의 전통 기법과 창의적 연구는 맥을 잇지 못하고 있다고 비평하고 있다. 오로지 존경할 만한 장인은 전주에서 만났는데, 합죽선을 만드는 노장인(老匠人)이었다고 덧붙이고 있다. 당시 완초 제품은 겨울철 농가의 부업으로 인기가 있었지만, 장인 정신이 결여된 저 품질의 제품이 대량 생산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1972년 국제관광공사가 수출 전략 상품 개발과 관광민예품 육성을 위해 관광민예품 경진대회를 주관한다. 1973년 지방 특화산업 융자대상이 48종으로 늘어난다. 전주는 완초공예, 한지, 부채, 석기공예, 솜이불, 양송이 가공업 등이 지정된다. 1970년대는 전주 완초 제품이 정점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1980년 중소기업진흥공단이 전국에 민예산업단지 18개소를 조성하고 30개 지원 대상 품목을 지정한다. 전주는 한지와 부채가 인천, 여주는 민속 도자기, 경기 강화는 완초 제품 등이 지정된다. 국가의 선택과 집중 이후 전주의 완초 공예품은 조용히 사라졌다.

  1980년대부터 관광지의 값싼 모조품에게 장인 정신이 깃든 공예품이 밀리기 시작한다. 현재는 세계 어느 관광지를 가든 중국산 기념품이 팔리고 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농가의 부업이던 공예품에 여가 선용이라 수식어가 붙기 시작하며 취미 생활이자, 예술 작품이란 인식이 확산된다. 1999년에는 전주종이축제와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가 시작된다. 시간을 거슬러 보면 농가의 부업, 대량생산으로 수출시도, 장인 정신과 전통의 계승, 실용품, 기념품, 명품의 개발, 공예를 주제로 한 축제, 공예 교육 등 공예품에 대한 여러 시선이 존재한다.

  일제강점기 농가 부업의 장려를 수탈의 역사로 읽을 수도 있고, 일제강점기를 견뎌내려 한 민중의 가난의 극복으로도 읽을 수 있다. 전주의 장인은 자기 긍정과 자기 부정이 공존하는 이율배반적 시간을 손으로 공예로 극복했다. 오롯이 자신의 시선으로 만들어낸 장인의 작품을 이제 언제든 전주공예품전시관에서 만날 수 있다.

※본 글은 한국전통문화전당 전주공예품전시관에서 발행하는 공예 트렌드 매거진 『손으로 공예로』Vol.5, 2021에 게재한 김창주의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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