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20. 11:11ㆍ전주
입체경과 입체사진
1955년 6월 27일 전주도립극장에 입체영화를 상영할 수 있도록 시설하겠다는 기록이 있다. 1955년이면 벌써 60년도 더 된 일이다. 입체영화는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을까? 입체영화는 1935년 프랑스의 루이 류미엘옹이 입체영화에 성공했다는 해외기사로 국내에 소개된다. 입체영화의 과학적 원리가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이 보다 앞선 최초의 입체영화는 1922년 개봉한 「파워 오브 러브」라는 영화인데 사랑의 힘으로 번역할 수 있다. 19세기에 이미 서구에서는 입체사진이 발명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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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희와 토키
20세기 초에 이미 입체영상으로 상업영화가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38년 2월 8일 자 신문을 보면 월트 디즈니가 입체영화를 제작했는데 입체영화 시대의 훌륭한 성공을 입증했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삼개 년의 세월과 백육십만 불의 고비를 던져 완성한 RKO 제공 극채색 장편 백설희는 드디어 뉴욕에서 개봉되어 호평을 받고 있는데 동영화에 의하야 영화계에서는 토키 천연색에 이어 입체영화로 제삼 혁명이 도래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백설희는 『그림 동화집』에 실려 있는 「백설공주」를 말한다. RKO는 미국의 영화 제작 및 배급사였다. 『시민 케인』과 『킹콩』을 배급한 회사로 유명하다. 당시에는 영화를 변사가 설명하는 무성영화였는데 토키는 필름에 소리가 녹음되어 있는 발성영화를 뜻한다. 이런 기사들이 모두 해외 토픽처럼 신문에 소개만 되고, 아직 입체영화는 국내에 들어오지 않았다.
1947년 1월 25일 자 신문을 보면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사무엘 골드윈 씨는 금후 5개년 내에 미국 영화의 대다수는 천연색 및 입체영화로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사무엘 골드윈(Samuel Goldwyn, 1882-1974)이란 사람은 한 번쯤 들어봤을 뮤지컬 영화 『아가씨와 건달들』의 영화제작자로, 본래는 폴란드 사람인데,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할리우드에서 많은 영화를 제작한다. 그의 말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아직 흑백영화가 만들어지고, 입체영화가 대중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국전쟁과 입체영화
그러면 국내에 입체영화가 실제로 들어온 것은 언제쯤일까? 그보다 먼저 짚고 가야 할 것이 입체영화가 들어오기도 전에 국내에서 촬영이 먼저 되었다는 점이다. 외국에서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입체영화를 촬영했다. 1953년 7월 4일 자 신문으로 가면, “미 파라마운트 영화회사에서는 한국문화를 널리 세계 우방에 소개하고자 방금 전선을 위시하여 서울 교외에서 『전우』라는 영화를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입체영화로 한국 소개에 기대가 큰 바 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국내 개봉은 되지는 않은 것 같다.
1954년 3월 7일로 가면 “입체영화 『휴전』, 최근 영국에서는 입체영화 두 개가 공개, 그중 하나가 한국 휴전을 취재한 것, 제작이나 촬영까지 전부 한국 전장에서 한 것. 배역도 순전히 현역을 사용. 할리우드적 영화로 기록영화가 되기에는 실패”라는 평이 남아 있다. 할리우드적이라면 상업영화라는 평이다. 영화는 종전 전에 치열한 접전과 휴전 회담 등을 담고 있는데, 이 영상과 산모가 아이를 낳는 장면을 오버랩시켰다. 휴전이 성사되는 장면에서 산모가 평화라는 아이를 낳았다고 말한다. 참혹한 전쟁을 경험한 당시 국내 정서상 이런 표현 방식에 대해 비난하고 있다.
여성과 입체영화
1955년 서울 수도극장에서 입체영화 『타이콘데로가의 요새』를 개봉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입체영화 기사가 과학적 원리를 담은 도면과 함께 등장하기 시작한다. 영화 광고에는 입체영화를 보기 위해 특수 안경을 쓴 관객들의 사진을 실어 놓기도 했다. 영화 광고를 보면 “특히 입체영화의 관람은 화면에서 돌발적으로 튀어나오는 물체와 인물의 놀라운 입체성에 대하여 사전에 충분한 조심성과 주의 하에 입장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외국에서 상영 시에는 어느 영화보다도 가족동반의 예가 많다”는데 상술이 느껴진다. 더 읽어보면 “특히 여성 관객들은 가족이나 또는 애인, 동료들과 같이 감상하는 것이 돌출하는 경이에 대한 여성들의 조심성”이라고 운운하는데, 요즘은 같은 시절에는 있을 수 없는 표현이다.
입체영화의 실현
이 경우는 외화를 수입한 것이고 국내에서는 언제 처음 입체영화를 만들어졌을까? 1968년 7월 27일로 가면 “『한』이란 영화로 대종상 촬영상을 탄바 있는 장석준 씨는 680가지 촬영기 부속을 손으로 깎고 다듬어 입체 촬영기를 만들어냈다. 4년에 걸쳐 이 촬영기를 완성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입체영화 『임꺽정』을 시도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자 다시 결함을 보완해서 거의 완전한 입체영화 『몽녀』를 촬영 완료했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몽녀는 꿈속에 여인이란 뜻으로 임권택 감독이 연출을 했고, 간첩이 등장하는 추리극이다. 당시 10만 관객을 동원해서 흥행에 성공한 영화로 알려져 있다.
이후 또 한 번 입체영화 관련 기사가 많은 해가 1993년이다. 바로 “대전 엑스포”다. “각종 과학관이 늘어나면서 입체영화관이 대중화, 1996년에는 특수안경 없이도 3차원 영상 즐기는 입체 TV 실용화 눈앞, 카이스트에서 연구, 2000년까지 보급 전망” 기사가 이어지고 있다.
1955년 전주도립극장에 입체영화를 볼 수 있게 시설한다는 계획이 실행되었다는 기사를 찾을 수 없었다. 1955년의 입체영화에 대한 꿈이 2017년 덕진공원에서 62년 만에 실현되었다. 덕진공원에 입체영상을 볼 수 있는 대형 워터스크린을 만들어 퓨전 뮤지컬이 공연되었다. 『실록을 탐하다』라는 작품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전주 사람들의 이야기다. 최인훈의 연극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꿈속에 정말이 있고, 정말 속에 꿈이 있다” [월간 김창주,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