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27. 11:17ㆍ전주
배고픈 지갑
“자네는 배고픔이 뭔 줄 아나?”라고 물으며 일제강점기를 회상하던 전주 토박이 어르신의 물음에 도저히 그 답을 상상할 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김제에 가면 아리랑문학관이 있다. 전시실 2층에 소설가 조정래의 지갑이 하나 놓여 있는데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젊었을 때 한 번도 배부르게 해주지 못한 지갑”
그저 그런 주글주글한 지갑인데 내 눈을 꽤 당겼다. 난 배고픔은 모르지만 배고픈 지갑에는 쉽게 공감하는 세대다.
급식의 시작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의미의 급식은 1953년 외국 원조에 의한 구호급식의 형태로 시작한 학교급식을 그 시작으로 보고 있다. 1958년에는 국립 중앙의료원에 최초로 영양과가 설치되면서 환자를 위한 병원급식이 실시되었다. 사업체 근로자들을 위한 급식은 1960년 초에 경성방직에서 3,000명의 종업원 급식을 직영방식으로 시작하면서부터다.
일제강점기에도 학교에 급식은 있었던 것 같다. 1940년 1월 17일 자 신문기사를 보면 “한재 지역의 학동에게 급식과 학용품 보급하는 등 전라북도 200개 학교 교장회의 개최하였다. 전북도 학무과에 지시”라는 기사가 있다. 이렇게 기상악화 등으로 인한 구호 차원의 급식과 허약아 방지를 위한 급식제도 신설이란 기사가 있는데 언뜻 보면 가난한 학생을 돕기 위한 무상급식인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희망자에 한한 유상급식이었다.
일제강점기 기숙사와 간식
1932년 전주풍남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 여학생의 이야기다. 당시에 기숙사가 두 개가 있었고 방학이 되면 친구들과 송별회를 했다. 이때만은 일본 노래가 아닌 한글 가곡을 불렀다.
우리의 웃음은 따뜻한 봄바람
춘풍을 만난 무궁화동산
우리의 웃음이 떨어질 때까지
또다시 소생하는 이천만
잘살아라! 이천만의 고려족
독립운동가 남궁억의 시조인데 버전마다 가사가 조금씩 다르다. 특히 상반된 부분이 “우리의 웃음이 떨어질 때까지 또다시 소생하는 이천만”인데 다른 버전에서는 “우리의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또다시 소생하는 이천만”으로 불리어지기도 한다. 특히 만주, 연변의 독립군 노래에서는 웃음이 눈물로 바뀌어 있다.
간식으로 무엇을 먹었을까?
“기숙사에서는 1주일에 두 번 수요일과 토요일 간식을 주었는데 간식으로는 ‘나마가시(생과자)’ 한 개씩을 주었어. 그러니까 수요일과 토요일이면 학생들 책상 위에는 생과자 한 개씩이 놓이는 거야. 그래서 학생들은 그 생과자를 먹기 위해서 수요일과 토요일을 무척 기다렸지요. 또 우리 학교 옆에 철로 변에서는 늘 “겐마이 빵(현미빵), 겐마이 빵.”하며 외쳐대는 빵 장사가 있었다. 우리 학생들은 그 겐마이 빵을 한 개에 그때 돈 5전씩을 주고 사 먹었어. 또 사감 몰래 기숙사 뒷문으로 빠져나가 홍시를 사다 먹었지. 홍시를 먹는데도 내놓고 먹지 못하고 한 사람씩 교대로 이불장 안으로 들어가 홍시를 먹고 나왔어.”
도시락의 추억
당시 초등(국민) 학생들이 먹던 도시락의 추억은 소박하지만 위화감도 느껴진다. 소박한 추억에 대해서는 “흰쌀밥에 멸치볶음이면 최고급이”라는 기억이 있고, 위화감에 대한 추억은 일본인 학생의 도시락에 대한 기억이다. 일본말로 ‘히로마루 벤또’인데 흰쌀밥 가운데에 빨간 매실 장아찌를 박아 넣어 일장기 모양으로 만든 도시락이다. 증언한 어르신은 전주에서 일본 유학길에 태극기 사건에 휘말리는 등 민족적 자존감은 강했지만, 초등학교 시절에 있었던 이 도시락에 대한 동경과 일상에서 벌어지는 배고픔에서 비롯되는 이율배반이 공존하는 시대를 증언했다.
이것은 초등학생만 느끼던 것이 아니었다. 당시 급진파 대학생을 전향하는 방법으로 투옥과 고문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일본말로 하면 ‘오야꼬 돔부리’인데 우리말로 하면 ‘닭고기 덮밥’을 사주는 회유책이 있었다. 밥 위에 달걀과 닭고기를 올려놓아 부모와 자식 관계를 상징한다. 춘원 이광수도 1921년에 신의주에서 경찰 검문에 걸렸을 때에 이 덮밥을 “나는 맛있게 먹었다. 징역을 각오했는데, 경성의 경찰서까지 제 발로 가라고 한다”라고 회상했다. 이때 춘원이 회유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밥과 시
일제로부터 독립이 된 해방공간에서 전주의 학생들 역시 좌우로 나뉘어 치열한 학생운동을 펼쳤다. 그때 구호를 여쭤보면 “쌀을 달라, 자유를 달라”, “이데올로기는 절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프랑스의 마지막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나치 독일의 강제 수용소에 갇혀 있을 때도 시구에 담긴 운율의 힘을 빌려 마음을 달래곤 했다. 마음과 정신 양쪽을 다 계발하려면 평소에 시를 암송하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남궁억의 시조도 아마 같은 역할을 한 것 같다. 중학생 신분으로 일제에 항거한 동시 작가 목일신도, 전주 객사 앞에 있던 전주 헌병대에 투옥돼 동시를 작시하며 우리나라의 독립을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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