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감의 이율배반

2021. 11. 2. 13:56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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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감과 호랑이

  곶감과 호랑이, 자동차 관광으로 일제강점기 전주를 상상(재구성) 해 보았다. 1929년 8월 한낮에 전주군 이동면 노송리에 큰 호랑이가 빈번히 출현하였다. 곶감 때문일까? 호랑이는 동리 사람들에게 쫓겨 기린봉으로 도주한다. 1921년에 포획된 대호(大虎)의 무게가 200관이 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곶감과 자동차 관광

  1923년 6월에 필명 월봉생(한기악, 1898~1941)의 대아저수지 기행문이 있다.

“오전 9시 30분 이리역(현 익산역)에서 13대의 자동차에 분승하여, 전주군 동상면 소재 대아저수지를 답사하기 위해 출발했다.(중략) 어젯밤 세찬 비에 요철이 심한 삼등 도로를 달려 자동차 고장이 빈번했지만, 초화(草花)와 바람이 상쾌했고, 미륵사지와 왕궁리오층석탑을 지나(중략), 삼례는 상점이 즐비하고 사설 철도의 주요 역이다. 정미업이 왕성하다.(중략) 생강의 주산지인 봉동을 지나, 건시 명산지인 고산에 도착, 대아저수지에는 정오에 도착한다.”

 

왕궁리오층석탑(2014)

※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책을 참고해 주세요.

 

전주미학

전주미학

www.aladin.co.kr

  대아저수지는 1922년에 완공되었다. 당시에는 신문사를 주관으로 국내 주요 명승지를 기차와 자동차를 이용해 여행하는 탐승(探勝)단이 유행했다. 1930년대에는 금강산, 지리산, 내장산 탐승단을 모집하는 신문광고를 쉽게 볼 수 있는데, 내장사 앞까지 요리점이 성행해 밤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찾아볼 수 있었다. 1935년 충남 노성(현 논산)에서 출발하는 내장산 탑승단은 정원 20명에 왕복요금은 4원이었다. 이때 고도 전주와 경주 역시 일본인 내지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홍보를 시도한다.

  전주는 조선왕조의 발상지로 신문지상에 소개하면서 관광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31년에는 전주의 주요 시설과 유적지의 사진을 담은 관광지도인 「전주 안내도」를 발간한다. 지도의 뒷면에는 전주의 요리점과 상점, 극장, 병원, 여관 등의 전화번호를 안내하고 있다. 경주 역시 비슷하다. 골동품을 좋아하는 총독이 비공식 방문하기도 하며 기생의 사진을 담은 엽서가 발간되어 일본에 소개되기도 한다. 스탬프 투어도 유행했는데 신사마다 기묘한 도장을 만들어서 여행수첩에 여권처럼 날인해 주었다.

 

곶감은 사치품

  1920년 곶감 한 접 가격이 4원 50전이었다. 1921년 중국산 곶감이 2원에서 3원 50전 가격으로 수입된다. 당시 쌀 한 말이 4원 80전, 콩 한 말은 4원이었고 경성금은조합의 금 한 돈 가격은 5원 50전이었다. 1922년 설날에는 국내산 곶감 가격이 세 배로 폭등한다. 1924년에서 미국산 건과인 건포도가 수입되는데 중국산 건시와 함께 최대 60% 정도의 사치품 수입세가 부가된다. 중국, 영국, 대만에서 수입하는 홍차는 3배의 증세가 붙었다.

  이렇게 귀한 곶감은 선거 유세장에도 등장하였다. 1927년 함경남도 홍원군 도평의원 선거에서 부호인 후보자가 유권자에게 곶감을 배급하였는데 당시 신문기사는 이렇게 보도한다. “건시로 유권자가 매수될 일 없으니, 자기나 먹고 보신하라” 1930년대에는 여우를 잡기 위해 건시에 폭약을 설치하였는데, 배고픈 아이들이 먹고 폭사했다는 가슴 아픈 기사가 겨울철마다 등장했다.

  1935년 중국총영사관에서는 건시의 수입세율을 완화하기 위해서 조선총독부와 교섭을 시작하였다. 당시 곶감의 수입이 매년 증가하고 있었기에, 중국산 건시 가격은 중국 물가에 인천항까지 운임을 합한 것에 30~60%의 수입관세를 붙였다. 이것은 각각의 계산서가 있을 경우이고 없을 때에는 세관에서 가격을 정하는데 엄청난 관세가 붙었다.

 

곶감은 관광상품

  1932년 고산에서는 연간 오만 원의 감을 생산한다.(1933년 금 한 돈 가격은 9원에서 7원으로 폭락) 이때 고산시(고산감)는 전주 객사 옆에 있었던 전라북도상품진열소에 전시, 판매가 되었다. 전국에서 주문이 쇄도하여 경성 오복점(미쓰코시 백화점으로 현재는 이 자리에 다른 이름의 백화점이 서있다)과 철도청에도 여행객을 위해 납품이 된다. 1934년 전주군에서는 전북특산품으로 고산시를 장려하여 금후 5개년 계획으로 50만 본을 식수, 10년 후 250만 원의 수입을 예상하고 있다. 1935년 전국 각지의 명산물 소개가 이색적이다. 감은 전주 고산에서 한 해 35만 관, 1톤 트럭으로 1,300대 분량을 생산하는 명산지로 소개되었다. 밤은 평양과 양주, 사과는 황해도 황주와 진남포, 호도는 충남 천안, 수박은 전북 이리(현 익산)라고 소개하고 있다. 1937년 10월 고산에서는 고산시 464만 개, 개량 건시 157만 개, 곶감 260만 개, 총합 880만 개를 생산한다.

 

이율배반

  일제가 국내 농업과 관광업을 장려하고 산업화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식민지를 상품화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렇게 말로 단정적으로 말하기에는 이율배반이 존재한다. 1930년대 6년제였던 중학교 학생은 1학년부터 저금을 해서 6학년 때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을 증언했던 전주 토박이 어르신은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학생 개인별로 일본에서는 독상을 차려서 밥을 주었고 전주에서는 몇 대 없던 차가 일본의 역과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백화점에는 택시가 지금처럼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우리가 문화적으로는 앞선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본의 도시 문명에 대한 충격은 문명의 동경이라는 이율배반적 정서를 낳았다. [월간 김창주,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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