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부채와 천재 화가 이인성

2021. 11. 3. 23:59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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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부사』가 기록한 단선‧선자, 우산

  『전주부사』에 의하면 단선‧선자, 우산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 세 가지 모두 제작은 오로지 수공업에 의존하고 있다. 선자는 7단계의 분업으로 만들어지는데, 선자의 손잡이나 뼈대 등에 낙죽(烙竹)이라 불리는, 낙화(烙畵)를 그리는 것이 있다. 이것은 인두로 섬세한 모양 등을 대나무 표면에 그리는 것인데 특수한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전문가는 매우 적다. 예전에는 박병수(朴炳洙)가 이에 뛰어났으며 지금은 백남철(白南哲, 완산정)의 이름이 높다고 한다”

날개도친 부채 미국으로 수출, 1938년 3월 26일자 동아일보

 

  이 장인들을 누가 기억하고 있을까?

“우산에 붙이는 문양은 향토색이 짙은 진기한 것이기 때문에 풍류를 아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조선 우산도 전주 특산인데 유래는 명료하지 않다. 일설에 의하면 1895년의 전쟁 무렵, 동학교도 중 남고산으로 달아나 숨어 살던 자들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양산(洋傘)의 제작법을 모방하여 그것을 창제한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죽골(竹骨)에 종이를 바른 작은 우산은 약 300년 이전부터 경기전 내의 용인(傭人) 등이 부업으로 제작하여 판매했다고 한다”  

  어떤 문양이고 그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책을 참고해 주세요.

 

전주미학

전주미학

www.aladin.co.kr

전주한옥마을 경기전 앞 은행나무(2020.11.3.)

해외로 수출한 부채와 우산

  일제강점기 신문기사에 따르면 1929년 5월 전북도에서는 전주선자업 공장을 들러보고 1930년부터 도에서 보조금 지원을 약속한다. 1934년 1월 전주에는 639인의 직공이 있었다. 1936년 1월에는 전주의 지물과 유물(油物)을 소개하는데 한해 우산이 삼십만 개, 부채 백만 개를 생산하여 전주 유물은 전 조선안의 각지 시장을 독점하고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까지 판매하고 있는데, 크리스마스 선물로 많은 귀염을 받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36년 7월에는 전북도에서 품질을 향상키 위해 생산물 전체의 품질 검사를 실시하고, 전주제산(製傘)조합이 생산물 전체를 수거하고 판매하게 한다.

  1938년 3월에는 미국에 수출하던 것을 좀 더 대량 생산하고 질적 향상을 위해 15명을 선발, 3개월간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1938년 7월에는 ‘전주 단선 대기염, 이백오십만본 품절’이란 기사가 보인다. 1939년 3월에는 전주 우산과 단선의 개량을 전주산업조합의 3개년 계획으로 실행한다. 취지는 다음과 같다. “시대가 요구하는 상품다운 상품으로 개선, 선자는 고전미가 있기는 하나, 몸체가 너무 큰 것이 결점이고, 단선은 실용성과 전주를 방문한 사람에게 기념품으로 인기가 높은데, 단선에 그린 풍속화가 너무 속되다” 하여 “근대화가 이인성 씨를 초빙하여 근대적 화면으로 개량”한다.

 

근대화가 이인성

  신문기사를 보다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인성(1912~1950)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천재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가 부채에 그렸다는 그림은 어떤 그림일까? 여기저기 문헌을 찾고 토박이 어르신을 찾아 물어보았지만,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이번에는 이인성 기념사업회 회장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전화를 했다. 그 역시 놀라워했다. 사연은 이렇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이인성 화백의 연구 사료를 수집하는 공고(2011.12~2012.2.)를 띄웠다. 그런데 수집이 끝나고 보니 “서양화가가 왜 부채그림을 그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전했다.

  수집된 부채 그림은 단선 그림이 아니라, 합죽선 그림이었다.(현재 이 합죽선 그림은 “이인성 탄생 100주년 기념전의 도록”에 수록되어 있다.) 거의 다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실망감이 밀려왔다.

 

어떤 그림인가?

  1939년 전주산업조합에서는 대구의 이인성 화백에게 단선에 사용할 그림을 의뢰한다. 이때 이인성은 다섯 장의 의장을 도안한다. 이후 1940년 조선총독부가 제 삼국 수출품을 선택하기 위해 개최한 조선수출공예품전람회에서 입상한다. 그리고 이런 평이 곁들여져 있다.

“실용품에서 훌륭한 예술품이 되어 외국시장에 내놓아도 부끄러움이 없다”

  신수경의 연구에 따르면 유족이 소장한 ‘銃後를 지키는 生業戰線’이란 제목의 신문기사에는 “단선의 모양에 전북명소와 풍속, 역사 등을 도안했기 때문에 금후 더욱 그 미술적 가치를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라고 쓰여 있다

 

단서와 과제

  앞서한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부채만큼이나 유명했던 전주의 우산은 동학교도와 관련이 있었고, 경기전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대략 370년 전부터 우산을 만들어 판매하였다.

  1934년 정태량과 전주 유지들이 발기하여 전주제산조합을 조직하고, 부채와 우산의 근대화를 고민하고 개량화를 시작한다. 이후 단선은 한해 이백오십만 개를 생산, 중국과 미국 등지에 수출하였다. 1939년에는 인상주의 화풍의 이인성이 전주 단선의 화면을 그린다. 전주 부채와 관련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단서이다. 이 이야기들은 곳곳의 자료에 산재해 있으며, 단편적이다. 전주부채에 대한 역사, 심미적 비평을 다룬 책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아마도 부채에 대한 유일한 국내 서적(도록 제외)은 최상수(『한국 부채의 연구』 , 성문각, 1988)의 연구가 유일한 듯한데, 역사성이 단절적이다. 이 책의 84쪽에는 다행히 출판 당시의 전주 부채의 생산 현황을 기록하고 있다. “접부채는 연평균 이만 자루”를 생산, 96쪽에서는 관광공예품으로서의 부채 개량 방안을 일본의 예를 들어 간략히 제안한다.

  이미 1930년대 전주가 민간인 주도로 조합을 조직하고 근대적 공예품으로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여, 한 해 이백오십만 개 이상을 해외로 수출하였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전주부채에 대한 이야기와 역사는 이렇게 단절되어 있고 곳곳에 흩어져 있다. 다시 말하면 아름다운 문화재로서의 부채는 남아 있으나, 문화로서의 부채를 만나기는 어렵다. 유명하다는 전주부채는 있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와 역사적 기록은 단편적이다. 전주의 근대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이는 전주부채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숨겨져 있을까? [월간 김창주, 2012]

※ 본 글은 2012년 전주문화재단이 발간한 『신바람 나는 부채 이야기』 에 수록된 김창주의 원고를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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