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수와 여성해방

2021. 11. 4. 10:17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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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빙과 천연빙

  20세기 초 일제가 조선을 병탄 할 목적으로 통감부(1906~1910)를 설치한다. 이때 부산수산조합이 최초의 제빙공장을 시설한다. 1923년에는 군산갈석제빙회사가 시설되었고 1927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사업 발전을 목적으로 보조금을 교부한 이후부터 제빙 회사 설립에 가속도가 붙었다. 1932년에는 전국 조선에 25개소의 제빙 냉동고가 설치되었지만 제빙업은 전부 일본인의 소유인 회사 조직이었다. 조선 사람이 경영하는 제빙 회사는 없었다.

  이런 인조 얼음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겨울 하천에서 채취한 천연 얼음을 보관해 여름에 사용하곤 했다. 전주에도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굴을 파놓았던 빙고(얼음창고)장이 있었다. 위치는 구 예수병원 아래로(다가공원의 아래쪽), 현재 서완산동 부근이며 과거에는 이 마을을 빙고리라고 불렀다. 1925년 1월 신문기사를 보면 “전주에 유일한 다가교 아래 스케이트장은 근일에 미국 선전사측에서 두터운 얼음을 모두 파가 버려 운동가의 불평 거리라고, 이기 행동은 야소교의 새 진리인가?”라는 야유 섞인 기록과 얼음을 채취한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이렇게 채취한 얼음은 식용뿐만 아니라 의료용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얼음을 둘러싼 기록을 보면 근대 한국의 위생, 성, 자본의 문제를 살펴볼 수 있다.

전주 다가산 아래에 있는 빙고. 가운데 빙고의 문이 보인다. 현재는 사유지로 출입할 수 없다.(2021.11.4.)

※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책을 참고해 주세요.

 

전주미학

전주미학

www.aladin.co.kr

빙수와 라무네

  1921년 7월 여름, 국내 각 지방에 전염병이 유행하자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는 경성, 용산, 영등포, 인천 등지에 천연빙을 보관한 창고를 가진 사람을 일일이 단속한다. 이때 조선천연빙주식회사 등 저장된 얼음에 유해물이 혼합되어 있어 판매를 금지하고 삼백오십만 관(약 13,125톤)의 얼음을 판매 금지시킨다.

  당시 경성 내 청량음료를 판매하는 빙수 장사는 일본인이 187처, 조선인이 230처로 합계 417처, 세금으로 한 달에 630원, 이중 10원의 세금을 내는 자는 일본인 2명, 5원(1920년 금 한 돈 가격은 5원 50전)의 세금을 내는 일본인 42명, 조선인 2명, 나머지는 모두 1원의 세금을 내고 있었다. 조선인 상점의 수가 훨씬 많아 보이지만 대부분 영세한 업주로 1원의 세금을 내는 상인들은 점포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빙수를 팔던 사람들이었다.

  같은 해 8월 경성 시내에 있는 빙수점에서 좋지 못한 얼음과 부패한 사이다, 라무네(레모네이드의 일본식 발음) 등을 판매하는 상인들이 많이 있음으로 경찰 위생과에서 단속하여 부패한 사이다 1,280병, 맥주 150병을 폐기 처분한다. 당시 얼음 영업은 음식용으로 사용하는 얼음과 잡용으로 사용하는 얼음 두 종류가 있어서, 여름에 식용 얼음이 부족하거나 값이 오르면 얼음 장사들이 잡용을 식용으로 판매하는 일이 있었다. 같은 해 12월 조선총독부에서는 단속 규정을 개정해 잡용을 폐지하고 음식용 얼음만 판매케 한다. 얼음을 채취하려면 신청만 하면 되었지만 이후 얼음을 뜨려는 곳의 하천 사용허가를 얻은 후 다시 채취 신청을 해야 했다.

 

빙수가가의 신영업방침은 여성해방?

  가가(假家)는 조선시대 방보다는 큰 규모의 가게를 말한다. 같은 해 8월 무더위로 인해 평양 신시가에는 빙수 영업자가 증가하면서 당시 표현을 빌리자면 가게 간의 ‘경쟁이 극렬’해 진다. 빙설이라고 홍색 백색의 큰 기를 문 앞에 내걸고 천자만홍(千紫萬紅: 울긋불긋한 여러 가지 꽃의 빛깔)으로 외면을 교묘히 장식, 후실 내는 만국기를 달아 놓고 홍보에 열을 올린다. 그런데 문제는 13~14세의 소녀를 일본인 하녀 모양으로 얼굴에는 분칠을 하고 일본 게다(げた: 일본 나막신)에 이상스러운 치마를 입히고 손님을 접대하게 한다. 어떤 곳에서는 일본 유가다(ゆかた: 여름철에 입는 무명 홑옷)를 입히고 되지도 않는 일본말을 서투르게 하며 주문을 받았다. 신상권을 중심으로 일본 문화가 들어온 풍경이다.

  당시 신문지상의 논평에는 “신구시가 사이에 이와 같은 곳이 없는 곳이 없다. 이렇게 성행하게 된 것은 빙수집에 소녀를 둔 후로 빙수 영업이 흥왕 하여 이전보다 4~5배의 빙수를 팔게 된 연고라 한다. 상점이 흥하는 것은 칭찬할 일이지만 신문사로 투고 한 장이 왔는데 근래 신구시가에 신유곽이 생겼는데 빙수점 여자들은 여기에 대해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덧붙여 “남녀평등, 여성해방을 말하는 이때에 여자가 돈을 버는 것이 무슨 흠이나 잘못이 아니지만, 조선은 아직 일본과 같이 여자 사용을 하여 본 일이 없는데, 갑자기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니, 호기심 많은 남자들이 장난을 시작하여, 풍기문란의 오풍이 일어남을 간과할 수 없다. 주인 된 자는 극히 주의하고, 당국자는 엄중한 단속을 가함이 맞다. 이와 같은 일은 조선 습관에 가합치 못한 것”이라고 세태를 비판하고 있다.

 

악착한 돈

  1922년 7월 경성의 빙수 장사의 수는 579명으로 전 해보다 200명 정도 늘었다. 여름 한철 보름 동안만 일기가 좋으면 설비한 비용을 제하고 두서너 식구가 일 년 동안 먹고살 것을 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이 빙수 장사가 성업했는데 이중 조선 사람이 349명으로 빙수 장사 세금을 “작년에 1,259원에서 금년에는 2,000원을 예상”했다. 실제로 이 예상은 적중하지만 보름 일하고 일 년을 먹고살 수 있다는 표현은 과장된 것이다. 다음 해 6월 신문기사에서 “아이스크림 장사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가련한 장사들이 많은데, 이들에게 2원의 세금을 받고 있다. 이것은 좀 악착한 일이다. 이 악착한 돈을 작년에 경성부에서는 2,000원이나 받아먹었다. 금년에도 경성부에서는 코 묻은 돈을 더 벌겠지”라며 당국을 비난을 받았다.

 

쓰레기통 대장과 밑천 없는 빙수 장사

  1925년 8월에 예상되었던 빙수점의 풍기문란이 신문지상에 등장한다. “금년에는 웬일인지 빙수집에 들어서기만 해도 인육시장에 나간 듯이 구역이 난다. 빙수가가 하는 양반들은 돈도 좋지만 한편으로는 얄밉기도 한데, 그 구역도 나는 색시들은 좀 치우는 게 어떨지, 불량한 중학생 쓰레기통 대장들의 코 묻은 푼돈이 아니더라도 달리 돈벌이가 많을 터이니까”라며 빙수 점주와 불량한 중학생들의 행태를 고발하고 있다.

  당시에는 신문지상으로 경찰서에 민원을 넣는 코너가 있었던 모양이다. “요사이 빙수가가에는 나이 어린 계집 아희들을 데려다 두고 색주가 모양으로 각색 소리와 음담패설을 마음대로 하니, 점잖은 사람은 어디 빙수나 사 먹을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종로서에서는 “그렇게 심한 가요. 여급사로 나이 어린 여자를 두고 있는 빙수가게는 우리 관내에도 상당히 많습니다만, 만약 그렇다면 풍기 문제가 되니 엄히 단속하겠다”라고 답하고 있다.

  1926년 5월 빙수가가의 풍경은 “얼음 빙자를 써서 문 앞에 달아놓고, 구술을 엮어 주렴을 드리웠다. 얼음을 가는 소리와 빙수가 싸구려, 차고 달고 시원해요, 목마른 데는 제일이오, 얼음 1관에 7 전이고, 딸구물, 파나나물은 한 병에 삼십 전 내외, 세태의 별한 풍속인지 작년 여름에는 빙수를 찾는 사람이 어린 계집애가 있는 빙수점으로 많이 출입하였는데, 금년 여름에도 그런다면 밑천 없는 빙수 장사는 없는 걱정을 더하게 되었다”라고 쓰여 있다. [월간 김창주, 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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