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5. 09:07ㆍ전주
무악산의 수난기
전주에 사는 분들이 봄 여름 가을 겨울 내내 자주 가는 산이 있다. 모악산이다. 어르신 중에는 모악산의 진짜 이름이 궁금하다는 물음이 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무악산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다 모악산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2004년 무악산을 주장하며 책을 한 권 낸 어르신이 있다. 책 이름은 『무악산의 수난기』다. 책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줄이면 “모악산의 원래 이름은 무악산이다”는 것이다. 어떤 게 맞을까? 사전에서는 정식 명칭은 모악산이라고 적고, 다른 이름으로 무악산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책을 읽고 저자인 김병곤 선생님 댁에 전화를 드렸다. 안타깝게 몇 해 전에 돌아가셨다. 1913년생이시고 38년간 교단에 서셨던 선생님이셨다. 5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셨다. 『무악산의 수난기』라는 책이 2004년에 출간되었으니 아흔 세가 넘어서 책을 내실 정도로 활동적이고 열정적인 분이었던 거 같다.
교가에서는 무악산
책에서 무악산이 옳다는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두 가지 정도 소개하면, 저자인 김병곤 선생님은 금구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3세였던 1926년 모악산이 아니라 무악산이라 가사로 교가를 배우고 노래했다. 어느 날부터 사람들이 모악산이라 하더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한국사찰의 주련』이란 책에서도 무악산 금산사이라고 표기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책에는 반대 의견도 적혀 있다. 대표적인 게 일제강점기에 금산사에서 만든 『금산사지』라는 책이 있다. 인용하면 “절은 모악산 금산사라고 명칭 한다. 전설에 의하면 산의 상봉에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 형상의 돌이 있어 모(母)악이라고 한다지만 이것은 터무니없는 말에 불과하다”라고 쓰여 있다. 비록 『금산사지』에 모악산이라고 쓰여 있지만, 산의 정상에 아이와 어머니 형상의 돌이 있어 모악이라고 부른 건 아니라는 말이다.
※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책을 참고해 주세요.
점하나 차이
의문이 깊어져 여러 고지도를 찾아보았다. 그중 시사점을 줄만한 지도 두 개가 있다. 18세기 중반에 나온 「해동지도」가 있고, 1872년에 나온 「지방지도」가 있다. 둘 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관찬 지도다. 18세기 이전에는 무악산으로 표기되어 있고 19세기부터 모악산으로 표기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 사이에 모악산에 대한 어떤 일이 있었을까? 한글로도 모와 무가 점하나 차이지만, 한자로도 그렇다. 어미 모(母) 자가 네모 칸에 가로 획을 긋고 위아래로 점을 찍는데, 없을 毋자는 네모 칸에 가로 획을 긋고 위아래로 점을 찍는 게 아니라 세로획을 그어서 어미 모자와 비슷하다.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무악산도 모악산이란 다른 이름, 어머니산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아이 낳기를 바라는 바위가 있는데 일명 까진 바위가 있다. 단순한 오기일까? 어떤 이야기가 있어 바뀌었을까? 지도에 무자를 옮겨 적다가 모자가 되었고 이후에 어머니와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발생한 것은 아닐까?
생각과 사상의 해방구
신라시대 국신사라는 절이 지어지는데 후에 이름이 구순사로 바뀌고, 현재는 귀신사로 불린다. 불교 관련 기록을 보면 국신사는 김제 무악산에 있다고 나온다. 진실은 무엇일까? 신라 때에도 모악과 무악이 동시에 쓰였을 수 있고, 18세기 중반 이후에 무악이 모악으로 바꿨을 가능성도 있다. 맞다 틀리다 보다 왜 이런 다른 설이 생겼는지 생각해보고,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포용력이 중요하다. 현대사회는 다원화된 사회고, 나와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또 하나 대부분 기원을 찾는 문제는 진실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작용을 한다.
모악산에서는 다양한 민중 신앙이 발원했다. 모악산이 이런 다른 이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오래전부터 생각과 사상의 해방구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단적인 예로 정여립에 관한 설화만 해도 전주와 완주 지역이 다르다. 조선시대에는 역적으로 몰았고, 살던 집은 파서 연못을 만들어 버렸다. 정여립에 대한 설화는 악행을 저지른 역적으로 그려지곤 하는데, 금구면과 금산면의 설화에서는 정여립을 문무를 갖춘 영웅으로 그리고 있다. 역사가 지배자의 권력을 기록한다면 반대로 구전은 민중의 역사관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역적을 영웅으로 말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모악산이 민중사상의 발원지로 자유로운 생각이 가능한 곳이 아니었을까?
최남선의 훈계
최남선도 모악산에 와서 비슷한 기록을 남긴다. 1925년이니까, 35살이었다. 『심춘순례』란 책인데, 뜻을 풀이하면 봄을 찾는 여행기다.
“가만히 서서 사방을 둘러보니 전주는 견훤 이래 여러 번 혁명의 본거지이던 곳. 태인만 해도 이인좌의 군대, 박필현의 용사지, 고부는 전봉준 동학당의 책원지, 모악산 신령이 얼마나 많이 반역아 종육에 큰 솜씨를 보여 왔던가?”
최남선은 이런 혁명과 반란이 있었지만, 후손이 대를 잇고 사는 것은 모악산이 이들을 잘 돌봐왔기 때문이란다. 물론 충신도 있었다. 이 모든 게 모악산이 자유로운 사상과 생각을 품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고구려의 검모잠, 백제의 복신 등이 조국 부흥을 위하여 나아가 싸우던 벌판과 물러나 쉬던 골짜기가 빤히 보이는 저기가 아니면 문득 여기가 아닌가. 또 외세의 침략에 반발하던 힘을 발휘하던 우리 선조의 피와 살이 얼마나 많이 섞이고 스민 땅인가”
최남선은 이어서 훈계를 한다. 지금 너희들은 “옥토에 너무 편안히 사는 것 아니냐?” 당시는 일제강점기였다. 편히 살지 말고 각성하라는 말로 들린다. 최남선의 후일의 모습을 보면 남을 혼낼 처지가 아니었다. 최남선은 1949년 친일 반민족 행위로 기소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최남선의 글에서 천재성을 읽을 수 있지만, 역시 인간은 한 치 앞의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다.
모악산과 김시습
조선시대 김시습도 세조의 왕위찬탈에, 불합리한 세상을 떠나 전라도를 여행한다. 모악산에 오르기도 한다. 그의 “구름이 오고 가도 산은 다투지 않는다”라는 시 구절이 있다. 무슨 뜻일까? “산처럼 듬직하게 싸우지 말자!”는 뜻일까? 아니다. 나는 구름에 불과하다. 큰 산 주위에서 명분을 갖고 치열하게 싸우면서 살라는 말일까?
그렇다. 언제나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시선이 문제다. 산은 무악산이라 하든 모악산이라 하든 그냥 거기에 있다. 뭐라 부르든 상관이 없다. 그것을 보는 사람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평가는 달라진다. 나와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무악산의 수난기』을 읽어보면 김병곤 선생님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가졌기에 그는 여전히 살아있다. 무악산인지 모악산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추억과 이야기를 담아 모악산에 새로운 이름을 지어준다면, 그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로 노래처럼 변주할 것이다. [월간 김창주,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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