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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비빔밥의 문화원형

by 월간 김창주 2021.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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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화(觀花) 시절

  1921년 4월의 꽃구경하는 풍경이다.

“관화 시절의 단속, 꽃 때가 되어 사람의 왕래도 차차 많아짐에 따라 경찰관도 많이 출동하여 통행 등을 단속하고, 구호반을 설치하여 부상한 사람이 있을 때 속히 구호하며, 맥주, 사이다 등 음료 및 음식 값을 엄중히 단속한다는데, 물가를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맥주 한 병 칠십오 전, 사이다 한 병 삼십 전, 일본식 비빔밥 일 인분 오십 전, 점심 상등 일 원 보통 칠십 전”

  일본식 비빔밥이 50전이었던 것에 비해 1930년 우리 비빔밥의 가격은 10~15전 내외였다. 1931년 5월 윤백남이란 사람이 전주 대정여관에 하루를 묵고 말로만 듣던 전주비빔밥을 먹는다. 그의 평은 "무엇이 좋아서 전주비빔밥, 전주비빔밥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라며 솔직한 소감을 기록했다. 당시에도 전주비빔밥은 꽤 유명했던 모양이다. 그는 며칠 후 상주에 도착하는데, 서울과 흡사한 비빔밥을 먹을 수 있었다며 상주 음식에 홀렸다고 단가를 한가락 지어 기록했다.

도시 비빔밥과 시골 비빔밥

  1937년 11월 안경이란 사람이 묘사한 종로 W백화점으로 비빔밥을 사 먹으러 간 풍경이다.

 "백화점 내로 들어가니 스팀의 훈훈한 감촉이 필자의 몸과 마음을 녹여주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대 긴장 리에 대기하고들 서있다. 오층입니다. 양화부, 완구부, 식당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걸의 꾀꼬리와도 같은 말소리가 끝나자(중략), 정오가 지난 때라 식당 안은 사람들로 와글와글, 비빔밥 한 그릇을 주문하고, 비빔밥을 태(怠) 템포로 파스 하기 시작했다(천천히 먹었다는 말)"

  이어지는 이야기는 시골에서 온 영감님의 눈은 경이와 불안을 느낀 채 급속도로 회전했다는 식의 묘사, 쇼팽의 소야곡과 방아타령 중 어떤 음반을 구매할지 고민하는 신혼부부의 모습, 백화점에서 물건 값을 깎아달라는 시골사람들의 모습 등을 우스꽝스럽게 그리고 있지만,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1938년 10월의 "기산영수(箕山潁水)의 향기 탄 함평소주에 비빔밥"이란 제목으로 비빔밥 한 그릇에 십오 전, 여기에 소주 두 잔이란 기사를 볼 수 있다. 함평 소주의 근원이 기산영수의 수향(水香)이 아닐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1939년 5월에는 익산 황등 건덕정에서 궁도대회가 개최되는데, 황등은 요교제(황등호)와 비빔밥이 유명하다고 소개한다.

※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책을 참고해 주세요.

 

전주미학

전주미학

www.aladin.co.kr

 

비빔밥은 물가의 기준

  1954년 4월에는 "현실 무시하는 사정위 물가폭등을 조장"한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서울시 물가사정위원회에서 백반 한 상에 근 쌀 한 말 값이라는 터무니없는 음식물 가격을 사정하여 내무부에 인가 신청을 하였다"며, "현실을 무시한 사정을 한"것에 비난을 하고 있다. 이어서 책정한 음식 가격을 한정식 450환, 냉면 150환, 비빔밥 150환, 설렁탕 150환, 떡국 150환, 만둣국 150환, 대구탕 150환, 커피 50환, 홍차 50환이라고 공개했다.

 

비빔밥의 스토리텔링

  1958년 11월 『동아일보』의 "팔도강산 발 가는 대로 붓 가는 대로"라는 기획 기사를 보면, "전주에 들릴 기회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유명한 전주비빔밥 한 그릇 먹어본다"라며 전주의 근대 건축물 속에 위치한 초가집인 옴팡집을 소개한다. 마담 이 여사가 손수 간을 맞추며 반드시 주문을 받고 나서야 음식을 만들어 백반을 먹으려면 한 시간 반 내지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며, 성개젓, 고록젓, 전어밤젓이 특미고, 타지방에서는 못 보는 고들빼기김치 등은 누구의 구미도 당길만하다며 적극 추천하고 있다.

  이후 1963년 10월 "없어진 명물 옴팡집"이란 기사를 보면, 경원동 한 모퉁이에 쓸쓸하게 남겨진 "이숙자라고하는 68세의 노인은 전주비빔밥의 특색을 표고자장(버섯과 쇠고기를 장졸임한 간장)과 고기 국물로 밥을 비비는 묘와 함께 이 고장의 별미인 나물을 얹는 것"이라며, 옴팡집이 처마가 낮아 도백(도지사)들도 절을 하며 식당에 들어왔다고 회고했다.

  도지사도 절을 하며 식당에 들어와 먹었다던 전주비빔밥의 스토리텔링은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진다. 1969년 5월 『경향신문』의 기획기사 "역사와의 대화-녹두장군 전봉준"편을 보면, "용머리 고개에서 만난 한 고로(노인)는 그때 동학군 군사들이 한번 움직이려면 밥 해대기가 얼마나 큰일이었는지, 군사들에게 일일이 반찬을 갖춰 먹일 수가 없던 탓으로 그냥 밥을 비벼서 지게에 져 날랐던 데서 오늘날 전주비빔밥이 전통이 됐습니다"라고 전하고 있다.

전주 콩나물국밥(2014)

비빔밥의 산업화

  1970년에는 신세계백화점이 "팔도강산 특산물 민속전"을 개최하는데 전주의 비빔밥 업소가 참여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듬해에도 신세계백화점이 구내식당에서 전주비빔밥을 판매하여 고객 유치에 효과를 보았다. 이에 서울 시내 백화점 모객 작전이 새로운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와 함께 당시 신문에서는 토산물 개발과 수출이란 칼럼도 눈에 띈다. 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전주와 서울이 1일 생활권이 되었다는 기사, 전주의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는 기사가 신문을 장식했다. 동시에 전주시내의 다방과 음식점과 토산물 가게 등의 경기는 좋아졌지만, 관광객이 당일 집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숙박업소는 한산하여 일부 업자는 울상이라는 기사도 볼 수 있다. 전주 여성의 옷차림도 서울과 닮아갔다. 기성복이 들어오면서 양복점, 양화점이 문을 닫게 되었다는 기사도 보였다. 당시 전주 톨게이트에는 하루 평균 500여 대의 차량이 오갔다. 전주에서 서울까지 가는 고속버스 요금은 850원, 운행시간은 3시간 10분이 소요되었다.

  1975년 2월 『동아일보』의 기획기사 "공업화 바람에 탈바꿈하는 고도 전주"편을 보면, 전주식 비빔밥이 사라져 가고 있어 얼치기 콩나물국만 남아 예전 그 맛은 아니라고 비평하고 있다.

  1976년 9월 『경향신문』의 칼럼에는 전주비빔밥의 조리법이 등장하는데, "밥은 양지머리를 푹 고은 육수로 짓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양미경 박사의 연구(2013)에 따르면 이 조리법은 당시 전주의 유명 식당 주인이 농담으로 한 말이 기록되어 전주비빔밥의 원형처럼 재구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전주만 비빔밥이 유명했던 것도 아니다. 타 지역과 달리 전주비빔밥이 유명세를 가질 수 있었던 계기가 존재했고, 그에 따른 이야기들이 있었다. 문화의 원형은 시대의 담론에 따라 재구성된다. 정전화된 문화의 원형이란 존재할 수 없는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대상이 시대를 관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통시적인 특징이 있다면, 그것을 문화의 원형이라 지칭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화원형은 변형과 응용을 수용할 수 있어, 그 문화의 유전자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월간 김창주,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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