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14. 16:32ㆍ전주
거두리 참봉과 단오제
1959년 해방 후 첫 시민의 날, 카니발을 준비하던 모임이 있었다. 전주방송국 내 문화위원회 유기수, 류승국, 김근희, 정재인, 이봉희, 진기풍 등 6인은 전주만의 카니발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회의를 시작한다. 전주의 기인으로 많은 선행을 베푼 ‘거두리 참봉’이란 분의 날을 정해 축제를 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회의 끝에 전통적인 단오제를 계승하기로 결정한다. 지금은 잊힌 인물 ‘거두리 참봉’은 어떤 사람인가?
동냥으로 영결식을
1931년 10월 3일자 『동아일보』 3면에는 거두리 참봉의 장례를 다음과 같이 알리고 있다.
“전북 전주읍 다가정 이보한(속칭 거들 선생) 씨는 61세를 일기로 지난 27일 서거하였다는데, 전주읍내에 무의무탁한 거지가 이백여 명이 집중하야 영결식은 거지들이 부담하겠다고 상가에 쇄도하였는데, 전기 이 씨는 이십여 세부터 세상사를 불관하고 친절한 친구 혹은 친척에게 돈, 의복, 신발 등을 얻어서 거지에게 나눠주며 의복 없는 거지와 배고픈 거지를 보면 먹는 밥과 입었든 의복이라도 거지를 주어 활인적덕(活人積德)한 관계로 거지들이 가가호호에 동냥하야 영결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한다.”
거두리 참봉 이보한(李普漢; 1872~1931)이 타계하자 그의 도움을 받은 빈자들이 장례를 치르겠다며 빈소에 몰려든 사건을 전하고 있다.
※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책을 참고해 주세요.
기억 속의 거두리 참봉
많은 세월이 지난만큼 거두리 참봉을 실제로 본 사람은 이제 흔치 않다. 2006년 고 박병연 옹은 열두어 살 무렵인 1920년대 후반 “어여라 달구방아”를 부르던 이보한의 기행을 기억을 더듬어 유쾌하게 이야기했다.
“어려서부터 첩의 소생이라고 해서 집안에서 외면하고 대우해주지도 않고 행세도할 수 없으니까 반발해서 하는 행동이 광기가 있어. 그러다가 예수교가 처음 들어와 신도가 별로 없었는데, 예배당에 다니면서 성경도 외우고 ‘거두리로다’ 찬송도 부르고 그랬어. 그러면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밥을 얻어먹곤 했는데, 사람들이 저럴 집안이 아닌데, 저리 돌아다닌다 해서 조그만 상에 차려서 대접을 하고 했어.”
함부로 대하지 않고 상을 내어 대접했고 거두리란 별명은 찬송가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한자로는 巨肚裡(거두리)라 쓰는데, 조병희(1910-2002, 시조시인・서예가・향토사학자)는 큰 뱃장을 부리며 사는 사람이란 뜻, 국권을 거두어들인다는 수복의 뜻, 겨레를 거두어 모은다는 단합의 뜻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이 세 가지 뜻에 모두 부합하는 행동을 했는지 증언을 더 들어보자.
어여라 달구방아
“그러면 먹고 남기기도 하고 주인보고 밥한 그릇 더 달라고 해서 거지들한테 주고 그러니까 거지들이 ‘거두리 참봉’을 좋아해서 뒤를 졸졸 따라다녔어. 먹을 것이 나오니까. 또 주인보고 이야기해서 헌 옷도 얻어서 거지들을 입히기도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한 양반이여. 또 노래도 건사하게 잘해서 남의 집을 지을 때 땅을 다지기 위해서 달구방아를 찧는데 아주 큰 나무기둥이나 돌을 줄에 매어서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서 찧는데 힘이 드니까 노래를 부르면서 박자를 맞추는데, ‘어여라 달구방아’하면서 노래를 하면 이 분이 처량하고 구성지게 노래를 잘하니까 집 짓는 데마다 불려 가서 노래를 했었어. 그 양반이 달구방아를 먹인다고 하면 사람들이 구경 가고 그랬어. 양반집 서출이라 그랬는지 한문도 잘 알아서 문자를 써서 노래를 했어. 달구방아가 끝나고 나면 밥상, 술상이 나오면 먹고 나머지는 거지들도 먹이고 그랬어.”
집터를 다지기 위해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 일하며 노래 부르는 장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전주의 도심 속에서 쿵쿵 집터를 다지는 소리와 구성진 민요가락이 어우러진 풍경을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상은 있어
“거두리 참봉 이야기가 여러 가지가 있어. 그중에 경찰서에 붙들려가서 두드려 맞은 일도 있고 그려. 그 양반이 그러고 다녀도 사상은 있어서 일본 놈들 욕하고 그랬어. 정부나 일본 사람들을 비판하고 그러니까 잡아다가 때리고 협박하고 유치장에 가뒀다가 풀어주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래도 소용없으니까 나중에는 미친놈이라 하고 유치장에서 하룻밤씩 재워서 그냥 보내곤 했어. 나는 그때 한 열두어 살 먹었으니까 그 양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그랬지. 아이들이 다 따라다녀. 거지가 아니라도. 그 양반이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어 끼고 검은 보자기로 머리에 감고 옷도 이상하게 입어서 꼭 서양사람 같았어.”
두둑한 뱃장으로 일제강점기 강자를 비난하고, 약자를 도왔던 이보한의 행적은 당시에는 기인으로 또는 광인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월간 김창주,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