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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독립운동과 고문과 詩

by 월간 김창주 2020.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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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전주대학교 학생회관 앞에서 전주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한 플래시몹 행사가 있었다. ‘독립의 함성에서 평화와 통일’이란 주제로 열렸다. 전북대학교 문회루 앞에서는 전주 3·13 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행사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전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의 이야기 중에 몇 가지만 꼽아 보았다. 거두리 참봉 이보한, 전주 신흥학교와 기전학교의 만세운동, 비밀결사 화령회의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다.

 

거두리는 무슨 뜻?

  거두리는 별명이다. 본명은 이보한(1872~1931)이다. 참봉이라고 불렸으니, 양반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 분이 스스로를 거두리라고 했는데,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불렀다. 그 이유가 “어려서부터 첩의 소생이라고 해서 집안에서 외면하고 대우해주지도 않았는데, 천재성이 있었다고 해요. 전주에 예수교가 처음 들어와 신도가 별로 없었는데, 예배당에 다니면서 성경도 외우고 ‘거두리로다’ 찬송을 부르면서 돌아다녔어”라는 증언이 있다(박병연, 2006).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밥을 얻어먹곤 했다. 사람들이 항상 조그만 상에 차려서 대접을 했다. 오미자를 즐겨 다려 마셨는데, 전주에 있는 한약방에서는 무료로 대주었다. 함부로 대하지 않고 예의를 갖추어 대해주었던 이유가 있다. 거두리란 말이 이 분의 행적, 특징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평생 헐벗은 사람에게는 옷을 굶주린 사람에게 밥을 주며 도왔다. 기행을 많이 했다.

  1931년 10월 3일자 신문기사에 거두리 참봉의 장례를 알리는 기사가 있다. “전북 전주읍 다가정 이보한 씨는 61세를 일기로 지난 27일 서거하였는데, 전주읍내에 무의무탁한 거지 이백여 명이 집중하야 영결식은 거지들이 부담하겠다고 상가에 쇄도하였다.” 거두리 참봉의 도움을 받은 빈자들이 장례를 치루겠다고 빈소에 몰려든 사건을 전하고 있다. 당시 상여를 메고 가는 요령소리(장송곡) 가사다. “굶는 사람 밥을 주고, 떠는 사람 옷을 주고, 전주성이 울었거든 남고산아 안 울껀가” 기사는 긴 장례 행렬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거두리 참봉의 독립운동 활동은?

  여러 이야기가 있다. 1919년에 3.1운동이 있었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일본 소방대의 곡괭이를 맞아서 쓰러져서, 종로서에 잡혀간다. 가혹한 취조와 고문을 받다가, 느닷없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주모자를 알고 있다. 함부로 말할 수 없으니, 잘 대해 주면 정신을 차린 다음 서장에게 모든 것을 말하겠다.” 일경들은 거두리 참봉이 거물이라고 판단을 한다. 서장의 심문을 받는데, 이렇게 말한다. “주모자는 하느님이다. 주소는 구만리장천이다. 아득히 높고 먼 하늘이다.” 그래서 모진 매를 맞는다. 이때 미친 사람 행세를 해서 며칠 후에 풀려난다. 전주로 내려오는 길에 수원에서 또 독립만세를 외치다 수원서에 또 잡힌다. 형사들에게 취조를 받다가 갑자기 호통을 친다. “종로경찰서장은 나의 다정한 친구다. 이럴 수 있느냐”하니까, 또 거물로 착각을 하고 일경들이 서울에다 전화를 한다. 또 당한 거다. 그렇게 있다가 풀려나 천안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잡힌다. 이번에는 꽤 오랫동안 갇혀 있었는데, 이때부터 필요할 때마다 능숙하게 미치광이 행세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당당했다. 어록이 있다. 몇 개만 소개한다. “돈을 모으면 곤란한 사람이 된다.”, ”하고 싶은 일은 하지를 말고, 하기 싫은 일은 해야 한다”라는 말을 평소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자주 말했다. 거두리 참봉, 두둑한 뱃장으로 일제강점기 강자를 골탕 먹이고, 약자를 도왔던 이보한의 행적이 현대인에게 “정의란, 신념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학생들의 독립운동?

  1930년 1월 25일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들은 독립만세운동을 하였다. 그 중 신흥학교 학생 80여 명은 전주시내로 진출하여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을 미리 눈치 챈 일경은 학교 앞에 초소를 세우고 24시간 철저히 학생들을 감시하였지만, 학생들을 막지 못했다. 사건 전날인 24일 신흥학교 학생들은 기숙사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담요로 창문을 가리고, 태극기와 전단을 직접 붓으로 그리거나 쓰기 시작했다. 전단의 내용은 민족차별 금지, 식민지 교육 철폐 등이었다. 25일 아침 기숙사생과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태극기와 전단을 나누어 주고 결의문을 낭독한다. 전단을 뿌리며 “자주독립만세! 학생만세! 동감(同感; 광주학생운동에 동감한다는 뜻)만세!”를 외쳤다. 다가교를 건너 전주 시내로 진출하자, 일경들은 총을 쏘며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연행했다. 이날 연행된 학생 수는 36명이었다. 일경은 시위의 배후를 캐기 위하여 고문과 매질을 가하였고, 배후가 드러나지 않자 학생들을 구류 처분했다. 비참한 옥살이였다. 한 겨울에 연일 이어지는 매질과 고문에 학생들의 수감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매일아침 옷을 입힌 채 냉수를 끼얹고 운동장을 돌게 하거나, 시멘트 찬방에 꿇어 앉혀 놓았다. 건강이 악화되어 순국한 학생도 있었다.

  이때 조그만 몽당연필로 숨기고 감옥에 들어간 한 학생은 매일 두 장 지급되는 휴지 중 한 장에 동시를 지었다. 작은 창을 통해 보이는 하늘과 구름은 글의 소재가 되었다. 후에 「누가 누가 잠자나」, 「하늘」, 「구름」과 같은 작품들이 탄생한다. 목일신(1913~1986) 선생님이다. 누구나 아는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로 시작하는 「자전거」의 동요 작사가다.

 

전주신흥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를 폐교

  “1937년 9월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학교는 문을 닫았어요. 폐교된 신흥학교 학생들을 고창고보로, 일부는 전주시내에 있는 학교로 모두 전학을 시켰어요.” 당시 신문기사에는 폐교 기념식의 모습, 학생들을 태우고 가려는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폐교 당시 5학년 학생 전원이 언젠가는 독립이 될 것이란 의지를 담아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학교를 상징하는 S자를 사진으로 남기고 전학을 갔다. 많은 지식인이 변절하고 있었지만, 학생들은 확고하게 미래를 보고 있었다.

1937년 폐교 당시 5학년 학생 전원이 학교를 상징하는 S자를 사진으로 남기고 전학을 갔다.

  “나도 고창고보로 전학 갔어요. 학교 분위기가 얼음처럼 차가웠어요. 정신적으로 학교 다니기가 힘들었어요. 고창고보에서는 일본 축제일이 되니까 신사참배 하러 학생들을 모두 강제로 데리고 가더라고요. 화장실까지 뒤져서 한 학생도 빠지지 않게 그렇게요. 신흥학교에 다닐 때는 한 번도 그렇게 심하게 적극적으로 신사참배에 참가하도록 강요받지 않았어요.”(김대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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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결사 화령회의 독립운동

  1943년. 이희동(1925~2016) 선생님이 순창에 금과보통학교를 졸업하면서 몇몇 동문들과 화령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한다. “홍원표(광주사범학교), 조영철(전주사범학교), 홍성길(전주북중학교), 김영규(전주농업학교)와 함께 활동을 한다. 이희동 선생님은 순창농림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나이가 제일 많아 조직의 대표를 맡는다. 주요 투쟁 목표는 ① 식량 공출 반대, ② 쇠붙이 공출 반대, ③ 송진 공출 반대, ④ 징병반대, ⑤ 징용반대였다. 이 내용을 삐라로 만들어서 장날 새벽에 장꾼들에게 나눠주고 돌리게 했다.

 "이때는 일경의 눈을 피했지만, 친구 홍석길을 황해도 해주로 위장 취업을 시켜 보낸는데, 이유는 당시에 임정이나 미국의 상황과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런데 이 기밀문서를 우편으로 주고받았는데, 순창우체국의 우편검열에 걸려서 적발이 되었어요. 그래서 함께 했던 친구들과 1943년 11월 검거되어서 1944년 1월에 구속되고, 해방이 되어서 풀려났어요. 당시에는 크게 세 가지 분류의 범죄자가 있었어요. 사상범과 못 먹고 살 때니까 경제사범, 그리고 파렴치범이 있었습니다. 사상범은 어떻게든 그들 나름대로 교화를 시키려고 함부로 안했어요. 단, 조서를 꾸밀 때 조직원이나 조직에 대해 순순히 말하지 않을 때는 모진 고문을 했어요. 그런데 간수들이 전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아세요? 한국사람입니다. 고문한 사람이요. 첫 번째 고문은 그냥 매 같은 것으로 때리지 않고, 소다리를 어떻게 쪘는지 야들야들하게 만들어서 그것으로 쳤어요. 그것도 안 되면 두 번째 고문은 거꾸로 매달아 놓고 콧구멍에 물을 부어요. 그것도 안 되면 세 번째로 의자에 앉혀 놓고 전기 고문을 해요. 스위치를 누르면 정신이 획 돌아가 버려요.”(이희동, 2006)

 

시을 외우자

  프랑스의 마지막 레지스탕스로 나치와 싸웠던 스테판 에셀이 『분노하라』라는 책을 썼다. 나치의 포로수용소에 잡혀서 고문 등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시를 외우면서 그 운율의 힘으로 견뎠다는 대목이 있다. 문학과 예술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 수 있다. 또 한편으로 프랑스까지 갈 것 없이 전주에도 만세운동을 하며 동시를 작시 하며 혹독한 고문을 극복한 목일신 선생님이 계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분노하라
국내도서
저자 :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 / 임희근역
출판 : 돌베개 2011.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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