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주

한파가 매서운 1월에 전주약령시 열려

by 월간 김창주 2020. 8. 16.
728x90
반응형

 

동서의학연구회관에서 발기

  한파가 매서운 1월, 과거 전주에서는 매년 약령시가 열렸다. 1923년 7월 14일 전주 중앙동에 있던 동서의학연구회관을 중심으로 전주약령시 설립을 위한 발기인회가 개최된다. 당시 대전은 약령시 개시 10주년을 맞이한 해였고, 대구약령시는 약품 개선을 논의하며, 신문지상에 광고를 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인다. 진주약령시 역시 매일 성황이라는 신문기사를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전주는 늦은 출발을 보인다. 인삼의 주산지였던 개성은 1925년 약령시를 개시한다. 같은 해 전주약령시는 30여만 원의 매출을 올린다. 당시 경성금은조합의 금 한 돈 가격은 5원 50전이었고, 약령시는 12월에 시작해 1월말에 문을 닫았다. 1926년에는 약령시가 열리던 각 지역에서 더 많은 손님을 끌어오기 위한 경쟁이 시작된다. 이때 전주에서는 손님들을 위해 기차할인권을 제공하고, 창고를 신축하고 무료로 대여해 39만 원의 매출을 올린다.

 

박계조의 활약

  1927년 12월 전주약령시 총무 박계조의 활약이 눈에 뛴다. 경찰당국과 교섭해 도로변에 임시 점포를 가설할 수 있게 하고, 야간에도 영업할 수 있도록 전기와 백열등을 가설한다. 시내의 음식점과 여관과는 제휴해 가격을 할인해 주고, 약령시 기간에 전주에 도착하는 화물의 운임비는 반만 받도록 교섭해 성공한다. 같은 시기 대구약령시는 판매 부진이라는 기사가 등장하지만, 전주는 약재가 없어 팔 수 없을 정도로 약령시 개시 이래 최고인 43만 원의 판매고를 올린다. 부진한 상황에서도 대구는 100만 원의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었다. 전주는 아직까지 비교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대구약령시의 부진에 따라 이전 논의가 시작된다. 점포가 산재해 고객이 불편하다는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였다. 당시 전주는 약령시를 현 다가동우체국사거리에서 완산교에 이르는 구간에 개설했다. 1930년 12월 전주약령시 총무 박계조가 신문지상에 다시 등장한다. 선전원으로 약재 채취 상황을 살피고 내객 안내 등을 위해 함경남북도, 강원도, 평안남북도, 경상남북도에 파견했다는 내용이다.

 

만주에서 약재 재배

  후에는 국제적인 생산망과 판매망을 갖춘다. 당시 풍경을 증언을 통해 읽어 볼 수 있다. “한약재를 구입하고자 하는 사람은 약령시장이 열리는 때에 맞추어 자기가 필요한 약재의 목록을 미리 작성해서 갖고 오는 거여. 그러면 약령시장 한약재 점포 앞에는 그 점포의 종업원들이 늘어서서 호객을 하면서, 서로 자기네 점포로 오도록 유인을 혀. 점포 앞에는 한약재가 가득 담긴 가마니들을 세워놓고 견본만을 조금씩 보이는 거여. 손님들은 견본을 살펴서 자기가 필요한 약재를 확인하게 되고 필요한 만큼만 구입하는 거여. 약재를 구하는 손님들도 대개는 자기가 1년 동안 사용할 약재를 한꺼번에 구한다고 봐야지. 이렇게 해서 두 달 정도 약전거리는 매우 부산했어. 너무 바쁘다보니 어떤 점포 종업원들은 길가에서 때늦은 점심을 드는 사람들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여. 그러다보니까 약령시장이 열리는 두 달여 동안 약령시에는 외부손님들을 위한 임시 식당이며, 임시 여인숙들이 생겨날 수밖에. 당시 우리 가친께서는 약령시에서 팔 약재를 구하기 위해 일본을 비롯해서 만주와 대만 등지를 직접 돌아다니셨는데 중국(만주)에서 나오는 약재를 당재, 이북에서 나오는 약재를 북재, 남쪽에서 나오는 약재를 ‘남재’라고 불렀어. 선친이 재산을 많이 정리해갖고 만주 안도현 이라고 있어, 가서 땅을 많이 샀어. 거서 약초재배를 했어. 사람 시켜 가지고, 한 달을 살더라도 우리땅 먹지 남의 땅 안 먹었지. 약초 재배도 허고, 그래서 내가 왜정 말엽에 거길 (감독하러) 갔었어” 최희상(1914~2008, 전 전북대학교 기성회장) 증언

728x90

800여 종의 약재와 5,000여 명의 판매자

  전주약령시에서 거래한 약재는 도내 산 222종, 타 도 및 중국산 370~380종, 여기에 일본에서 수입한 약재를 합하면 800여 종의 약재를 거래하였다. 그중 전주의 주요 거래 약재 26종은 ‘은행나무, 반하, 명감나무, 마, 뽕나무, 노가리초, 쇠물팍, 거름때나무, 으름덩굴, 현호색, 수박풀, 황벽나무, 붉나무, 과남풀, 은조롱, 현삼, 사철쑥, 삽주, 생강, 형개, 소녑, 탱자나무 등이었다. 1936년 전국 각지 약령시의 매출액을 보면, 전주 약70만 원, 대구 70만 원, 대전 20만 원, 진주 10만 원이었다. 약령시가 열리는 두 달 동안 전주에 몰려드는 판매자의 수는 약 5천 명에 달했다.

 

완산동 청학루에서

  1933년 1월 18일 완산동 청학루에서 전주약령시 10주년 행사가 성대하게 열린다. 전국의 약업 관계자 300여 명이 모여, 약령시의 발전 정책을 논의한다. 10년간 전주약령시는 총4,731,000원을 매출을 기록했다. 1933년 금 한 돈 가격은 7원이었다. 지금 금 시세로 환산하면, 10년간 1,450억 원 규모의 매출이다. 1934년 2월부터 매년 전주약령시 주최로 한방의학강습회를 전주공회당에서 개최하여 500~1,000여 명이 참여, 대성황을 이루는 등 콘텐츠를 다양화한다. 이때 약령시 개최는 제천, 함흥, 평양 등 전국 각지에서 유행하지만, 1943년 조선총독부의 ‘생약통제령’에 의해 약령시는 폐지된다. 1999년 부활한 전주약령시 한방엑스포는 전주한옥마을 일대에서 전주비빔밥축제 등과 함께 열렸고, 2010년까지 11회째 치러졌으나, 현재는 실효성 문제로 이마저 중단되었다. 전주약령시가 열리던 거리에는 박계조를 기념하는 비석만이 옛 영광을 알려주고 있다. [월간 김창주, 2015]

전주한옥마을 화명원

728x90
반응형

'전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립운동가와 기생과 생강  (0) 2021.04.16
독립운동과 고문과 詩  (0) 2020.09.06
노동절과 유급휴가  (0) 2020.08.16
책방을 운영한 소설가  (0) 2020.08.16
전주한옥마을 천변 산책  (0) 2020.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