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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전주한옥마을 천변 산책

by 월간 김창주 2020.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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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한옥마을 전주천 겨울 풍경(국립무형유산원 앞 오목교)

겨울의 전주천

  “얼어붙은 냇물과 자갈밭에서는 사내아이들과 남자 어른들이 어울리어 연날리기가 한창이었다. 연 날리는 패들은 쇠전 강변 언저리로부터, 매곡교를 지나 전주교가 가로 걸린 초록바우 동천(洞天)에 이르기까지 가득하였다.”(최명희, 「제맹매가」, 『전통문화』 1985. 11월호 163-164쪽)

전주한옥마을 오목교

한벽당은 해수욕장

  “한벽당 아래서 목욕을 다 했어요. 그때는 여름철 되면 한벽당이 목욕탕, 해수욕장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목욕을 추석하고 설날밖에 안 했어요. 한집에 여러 집이 세들어 살던 시절이니까, 마당에 수도시설이 있긴 하지만, 목욕을 거기서 할 수가 없지요. 등목이나 허지. 짓궂은 놈들은 여자들 목욕하는데 꾸역꾸역 가다가 쫓겨나오기도 허고 그랬어요. 더한 놈은 천변에 도로 있잖아요. 자전차를 딱 받쳐 놓고 페달을 막 돌려. 그러면 자전차 라이트가 딱 켜질 것 아닌가, 그러면 목욕하는데다가 막 비춰. 허허허. 장난삼아 그랬지요.(편집자 주 ; ① 전주천에 해가 지면 수백 명의 욕객들로 남녀혼합 목욕이이루어지고 있었다. ② 전주경찰서는 전주천에서 주간 나체 목욕을 하면 적발하여 법적 조치를 할 것이니 각시바위 부근에서 하여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전북일보』① 1957년 7월 21일 ② 8월 21일 사회면 기사)”

“전주천 둔치에서 교동하고 서학동 아이들이 걸핏하면 돌싸움을 했어요. 나중에 어른들이 그래요. 전쟁이 나려고 그랬다고. 물론 심하게 하지는 않았어요. 누군가 하나가 피가 난다거나 하면 바로 돌싸움은 끝났지만, 걸핏하면 만나서 돌을 던졌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6·25때 인공 때도 거기서 목욕을 하는데, 미군 비행기가 우허니 가니까. 애들이 옷을 들고 피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미군 비행기가 인민군들인 줄 알았나 봐요. 한벽루 거가 기차 다니던 굴 있잖아요. 애들이 거기로 숨었단 말입니다. 미군 비행기가 이리와 쏘고 윙 돌아와서 저리와 쏘고 사람 많이 죽었어요. 지금도 흔적은 남아있어요.”

 

참게와 왁대

  “참게를 밤에 잡는 것도 봤는데, 돌로 둑을 만들어서 거기다가 용수 같은 것을 박어요. 거기다 밤에 불을 켜 놓으면 참게가 그 안으로 들어갑니다. 용수가 기다란 고깔모자 같이 생긴 거요. 술독에 이걸 꽂아 놓으면 가운데에 맑은 술만 차요. 그러면 국자 같은 것으로 맑은 술만 퍼내면 됩니다. 고기병이라고 있었어요. 유리병으로 만든 게 있어요. 얇은 유리로 만들었는데 잘 깨집니다. 그것으로도 잡았고, 또 수량이 지금하고 비교하면 2~3배 많았는데, 고무신 신고 있다가 잃어버리고 그랬어요. 어디로 떠내려 가버리고 많이 혼났어요. 어렸을 때. 대나무를 얇게 짜개가지고 거기다 낚싯바늘을 달어서, 지렁이를 꽂아요. 그것을 돌 틈에다가 넣었다 뺐다 하면서 뱀장어를 잡았어요. 어족이 풍부했어요. 고기를 그렇게 잡어도 안 떨어졌어요. 고기 잡고 목욕하고 거기가 낭만이었어요.”

  “지금 쉬리라고 하는 것을 그때는 지름치라고 했고. 미꾸라지같이 생겼는데, 노랗게 색을 띄는 것이 있어요. 그것을 양솔래미라고 했고. 빠가사리, 불거지 이것은 피라미 수놈인데 배에 무지개색 들어간 거. 왁대란 것이 있어요. 새우보다 큰데 억세게 생긴 것이 있는데, 그것을 구워먹고 그랬어요. 쉬리가 일급수에 산다고 그러는데, 그때는 우리한테는 천덕꾸러기였어요. 맨 그거였거든. 그러다가 물이 약간 흐려지면서 붕어가 나오더라고. 처음에는 붕어가 없었어요.”

  “당시에는 천변에 오리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아침에 오리를 몰고 천변에 풀어 놓고 해질녘에 오리를 몰고 집으로 들어가요. 그 녀석들이 참 주인을 잘도 따라다녔어요. 해질녘에 오리들이 일렬로 뒤뚱 뒤뚱거리며 집에 들어가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어요.”(『전주 근대생활 조명 100년』 제2권 개정판, 전주문화재단, 2009, 566~568쪽)

지금은 웨딩촬영하는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다.

돌싸움

  “해마다 정월대보름날 밤이면 매곡교 부근 소전 강변에서는 석전이 벌어져. 석전이란 게 돌팔매질이여. 돌을 던져서 상대방을 다치게 하는 놀음이지. 남밖장, 초록바위, 교동, 서학동, 완산동에 사는 아이들이 모여서 군자정패니 초록바위패니 하면서 서로 패를 갈라 돌싸움을 벌이는 거여. 매곡교 근방 소전 강변은 인가도 드물고, 자갈이 많아서 석전하기로는 제일 마땅한 곳이여. 석전을 하려면 사전에 준비가 필요한 거여. 우선 두툼하게 옷을 껴입어야 허지. 날아온 돌을 맞아도 다치지 않아야 하니까 말이여. 또 얼굴에다가는 밥덮개(멍덕)에다 솜을 두툼하게 넣어서 그것을 쓰는 거여. 그러고서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돌을 한군데로 모아. 그래야 돌을 던지기가 쉽지.”

  “그렇게 준비를 하고 있다가 기린봉 위에 보름달이 떠오르면 그것을 신호로 석전은 시작되는 거여. 돌싸움은 처음에는 아이들이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청년들도 합세하는 거여. 그날의 석전은 보름달이 중천에 오를 때쯤 어느 편인가 한쪽이 무너져. 그러면 끝나는 거지. 돌싸움이 끝나고 나면 머리 터진 놈, 얼굴 깨진 놈, 어깨 다친 놈 부상자들이 많아. 지금 생각하면 어쩌자고 그런 무서운장난을 했는지 잘 모르겠어. 허나 생각해 보면 적의 침략을 많이 받은 우리인지라 언젠가 적이 쳐들어 올 때를 대비해서 젊은이들에게 담력을 키워주는 데에 뜻이 있을 것이여. 그렇지만 석전은 놀음치고는 너무 위험하다고 해서 1920년부터 관에서 금지 시켰어.”(『전주 근대생활 조명 100년』 제1권, 전주문화재단, 2007, 566~5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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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북사

  “소화정 종연방적 공장(현 진북동 우성아파트 일원) 맞은편 산기슭에 있는 조그만 사찰이다. 험한 절벽을 등에 진 채 강에 면해서 높이 솟아 있다. 1940년에서 120년 전 가경(嘉慶) 25년 경진 10월, 1820년), 이서구(李書九)가 우리 도 관찰사로 재임(再任)하면서 참배하고 만년향화불멸(萬年香火不滅)의 요지라 칭했던 곳이다. 그 개창은매우 오래됐으며, 완산 동·서·남·북 4사(寺) 중 하나라 전해지는데 사암(寺庵)내에는 전주 4면 석불 중 하나인 오래된 석불도 안치되어 있다. 신도 수 60여 명.”(『국역 전주부사』 369쪽)

  “어은골의 맞은편에 있는 산은 엉골산, 서살미, 엉골뒷산, 서산이라고 부른다. 서살미의 끝자락에는 진북사가 있는데, 서살미 끝에 있는 범바우 앞에 지어진 절이라 하여 범바우절이라고도 부른다. 범바우는 부엉바우라고도 하며, 이로인해 사람들은 진북사를 부엉바우절이라고도 한다. 범바우(부엉바우)는 일제 강점기에 발파되어 그 흔적조차도 찾아 볼 수 없으며, 그 자리에는 도로가 나 있다. 엉골이나 도토릿골, 서신동의 감나뭇골, 잿뜸, 바구멀에 있는 사람들은 진북사보다는 범바우절, 혹은 부엉바우절이라 부르는 것을 더 좋아한다.”(김규남, 이길재, 『지명으로 보는 전주 백년(상)』, 전주문화원, 2005, 216쪽)

 

진북사 뒷산에는

                                                         조기호

 

여승들만 사시는 진북사 뒷산에는

상수리나무에 가부좌 튼 두루미가 산다.

 

석가가 중생을 구제하시려 정진하실 때

까막까치 온갖 잡새가 집을 짓고 배설을 해서

부처님 불두가 울퉁불퉁 까맣다는데

 

저 두루미도 전주천 물소리 물어다가 공양을 바쳐

아미타불이거나 도솔천 너머

 

진표율사 잔기침도 물어다가

미륵정토 연연한 발그레 눈빛을 아우르거니

 

수염도 없고

머리와 눈썹만 허옇게 센 비구니스님

새벽 쇠북 한번 칠 때마다

 

염불처럼 하얀 배설을 찔금찔금 싸서

부처님 불두고 이제는 희어질게라

 

바래다 못해 파르스름 배코 친 노승 머리 하나

법당 앞 불두화로 풍경 곁에 매단다.

 

초록바위

  “곤지산 자락은 본래 전주천변까지 길게 뻗어내려 와 있었다. 전주천변 쪽으로 뻗어 내린 산자락 끝에 초록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는 천주교 순교자들을 참수하는 자리였다고 한다. 초록바위가 전주천 부근까지 길게 뻗어내려 있었고 전주천 가장자리로 소로만 있었기 때문에, 비가 오는 날이나 바람이 많은 날에는 이 근처가 매우 음산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초록 바위에 얽힌 사연만을 초로바위 안내석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며, 전주천 제방 공사를 하면서 초록바위도 함께 사라졌다. 또한 천변 가장리에 솟아 있는 곤지산 자라은 이팝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서 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있다.”(김규남, 이길재, 『지명으로 보는 전주 백년(상)』, 전주문화원, 129쪽)

  “매곡교, 매곡이란 이름은 완산동을 옛날에는 맷골이라고 불렀대요. 그래서 그지명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고. 또 동학 때 동학군들이 완산동에 집결해서 한동안 살았는데 그때 동학군들이 완산동에 매화꽃을 많이 심어서 그 연유로 매곡이란 말이 생겼다는 말도 있어. 또 매곡교 넘어 전주천 천변에는 나무시장이 있었어. 매곡교에서 서천교 길목에는 책방들이 여러 개 있었지. (중략) 옛적에는 전주천의 강폭이 좁았을 뿐 아니라, 제방도 제대로 안 되었을 때니까, 초록바위 끝이 전주천 가운데까지 와 있었어.”

  “그런가하면 초록바위 근처에는 애절한 사연도 있지. 조선조 고종 때라고 하더구먼. 당시 15세이던 소년 남명희와 이름 없는 소년 홍복주의 아들, 두 소년은 천주교 신자인데 프랑스 세력과 내통한다하여 관가에서 잡아갔대요. 관가에서는 두 소년에게 죄를 용서해주는 조건으로 천주님을 믿지말라고 종용했지만, 두 소년은 끝까지 천주님을 믿겠다고 했대요. 관가에서는 두 소년을 초록바위에서 전주천으로 밀어뜨려 물속에 빠져죽게 했대요. 또 서천교에도 애절한 사연이 있어. 역시 조선조 고종 때일 거여.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에 살던 천주교 신자 조윤호라는 소년이여. 관가에서 조윤호를 잡아다가 천주님을 믿지 말 것을 종용했대요. 하지만 조윤호 소년 역시 끝까지 천주님을 배반할 수가 없다고 했대요.”

초록바위 위에서 촬영. 가운데 전동성당이 보인다.

  “그러자 관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조윤호 소년을 서천교 아래서 태장 2백대를 때려죽이려 했지만, 죽지 않자 조윤호 목에 밧줄을 걸고 걸인들로 하여금 밧줄을 잡아당기게 해서 죽였대요. 초록바위 근처 냇가에서는 옛날에 죄수들을 잡아다가 사형을 시켰대요. 지금 초록바위 앞과 서천교 옆에는 순교비가 서 있지. 그래서 옛날 우리들이 어릴 때는 밤에 초록바위나 서천교 옆을 지나가려면 무서운 마음이 들었어.”(『전주 근대생활 조명 100년』 제1권, 전주문화재단, 2007, 380~381쪽)

 

동학을 앓는 사람들

                                   조기호

 

애초에

해 뜨는 동쪽에서 왔다고 했다

 

동학이 전주성 입성하던 날

서문을 열어준 죄로

남문 밖 초록바위 장대에 꽂힌 할애비

 

정여립과 동학이 피칠 한 채 두어 번 훑어가고

성깔 부리고

줏대 있는 젊은 종자들

댓잎바람 불 듯 씨알까지 쓸어갔다

 

나 닮은 무지랭이 빈차리만 남아

만삭된 동학을 앓는다.

 

동에서 왔다가

전라도를 홀랑 까뒤집어놓고

고부지나 변산 바다에 빠져죽은 동학

 

먹먹한 저 노을

가슴애피 선혈이 붉다.

 

관련 문헌

민들레 가시내야
국내도서
저자 : 조기호
출판 : 문학사계 2015.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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