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14. 11:06ㆍ전주
1936년 8월 9일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남승룡 선수가 3등, 손기정 선수가 1등으로 우승을 하셨죠, 그리고 1992년 8월 10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황영조 선수가 56년 만에 또 다시 금메달을 거머쥔 날입니다.
문: 그 당시에 어떻게 독일까지 갔을까요? 비행기로 갔나요?
답: 유라시아 횡단 열차를 타고 베를린까지 가는데, 부산을 출발해서, 하얼빈, 바르샤바를 거쳐 베를린에 도착합니다. 만주와 시베리아를 횡단해 유럽에까지 가는 보름이 걸리는 여정인데, 생각만 해도 멋지죠?
문: 오늘은 손기정 선수와 마라톤에 대한 이야기군요
답: 아니요. 마라톤에 대한 이야기는 맞는데, 손기정 선수가 아니라, 남승룡 선수가 대한 이야기로 재구성해 보았습니다.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이라는데, 남승룡 선수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 마라톤을 바라보면 재미있습니다.
문: 뭔가 다른 접근인데, 남승룡 선수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유가 있는가?
답: 생전에 인터뷰한 내용이 있어요. 베를린 올림픽 때 1등을 한 손기정의 금메달 보다,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어서 그가 부러웠다. 당시 손기정 선수를 보면 월계수를 앞에 들고 고개를 푹 숙인 사진을 볼 수 있는데, 남승룡 선수는 남다른 신념과 학식을 겸비한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 그러게요. 마라톤하면 손기정 선수, 국내 신문사가 일장기를 지우고 게재한 일장기 말소사건이 생각나는데, 남승룡 선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아요.
답: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할까요?
문: 혹시 전주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나요? 전주에 오셨다든가?
답: 남승룡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다음 해인 1937년 11월 23일에 전주공회당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신부와 남승룡 선수의 사진이 나란히 신문지상에 게재가 되어 있고, 신부는 소병익씨의 셋째 딸 소갑순 양이란 기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두 분 다 선남선녀이고, 결혼을 앞둔 소감을 전하고 있습니다.
문: 요즘 같으면 스타 선수의 결혼 기사인데, 뭐라고 하셨는지 궁금하네요.
답: 옛날 어르신들은 내외를 하셨잖아요. 부부간에도 같이 손을 잡고 밖에 못 다녔다고 하더라고요. “운동선수들은 결혼에 대한 애착이 별로 없는데, 저 역시 별다른 의미는 없고 다만 부모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결혼하는 것입니다. 결혼 후에도 마라톤에 더욱더 정진하여 오는 동경대회에서 큰 목표를 두고 정진하겠습니다”
문: 요약하면 나는 결혼보다 마라톤 기록을 위해 열심히 뛰겠다네요.
답: 그렇죠, 결혼 때문에 국민 여러분의 기대를 저 버리는 일 없이 정진하겠다 인데, 그 만큼 남승룡 선수는 당시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 왜 전주에서 결혼을 하셨을까요?
답: 장가를 가기 위해서 신부의 집으로 온 거 같아요. 소병익 씨는 전주 만석꾼으로 알려져 있는데, 신문을 더 찾아보니까, 1925년에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 소병익 씨가 자기 면내에 매일 아사자가 나오자, 쌀을 배급하고 면내 가난한 사람들의 세금 500여 원을 대납했다는 기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문: 500원이 얼마나 되나?
답: 당시 백미 한 가마가 8원 50전 금 한 돈이 5원 50전인데, 현재로 환산하면 1,400만 원 정도인데, 1925년에는 소작쟁의 극심했던 시절이었는데, 더 조사를 하고 싶었는데, 다음 기회에 한 번 더 조명해 보기로 하고 남승룡 선수 이야기로 다시 가겠습니다.
문: 남승룡 선수의 고향은 어디인가?
답: 전남 순천의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납니다. 프로권투선수로 처음으로 세계무대에 진출해 명성을 떨쳤던 서정권(권투의 신, 링의 황제)과 같은 순천 동갑내기 친구로 서정권의 집에서 함께 서당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경성 협성실업학교 재학 시절에는 여름방학 때 마라톤 연습도 할 겸 경성에서 순천 고향 집에까지 뛰어갑니다.
문: ㅎㅎ 몇 시간이나 걸렸을까요?
답: 당시 이길용 기자가 이 희대 사건을 취재하는데, 이 분은 1936년에 베를린 올림픽에서 남승룡과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지운 분이기도 합니다. 1931년 7월 기사인데요. 경성 순천간 631km 37시간 34분 주파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문: 이후에 많이 유명해졌을 것 같은데요.
답: 국내에서 두각을 보이다가 일본을 유학을 가게 됩니다. 동경에 있는 메이지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때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해서 3위의 성과를 내게 됩니다. 이후 귀국해서 후학을 양성하며 지도자의 길을 걷고, 1964년 도쿄올림픽대회 코치를 마친 후 모든 체육활동을 접고 은둔생활을 하시다가 2001년 작고하셨습니다.
문: 왜 은둔생활을 하셨나요?
답: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데, “젊은이가 맡아야 발전한다”며 도쿄올림픽 이후 육상계를 떠나 칩거에 들어가시는데, 가족의 증언에 의하면 “마라토너로서 최선을 다했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셨는데, TV나 신문 잡지 등 각종 언론매체에서 이인자의 비애라는 보도의 설움과 반감을 있었고, 199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제패 60주년 기념행사 이후에는 더 이상 공식 석상에 나오지 않았다” 전하고 있습니다.
문: 신념이 강한 분이란 생각과 1등 지상주의를 싫어하셨던 분 같아요.
답: 인생은 마라톤이란 신념을 가지고 계셨고, 1940년 잡지 삼천리 인터뷰를 보면 마라톤 선수는 수도승과 같은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는 기사가 있어요. 2001년 타계하셨을 때 가족의 인터뷰가 있는데, “아버지가 손기정 선생님의 그늘에 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1등이 대우받는 세상임은 틀림없지만 마라톤 발전을 위해 노력한 아버지는 영원히 존경받을 겁니다”라는 기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순천에서는 매년 남승룡마라톤 대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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