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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비행사 신용인

by 월간 김창주 2021.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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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에 착륙한 비행사

  1920년대 전주에 착륙한 비행사에 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2007년 전주역사박물관에서 발간한 『숨겨진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에 나오는 두 장의 사진에서 시작한다. 아무것도 없는 들판인데 이곳에 복엽기 한 대가 착륙해 있고, 여러 사람이 기념촬영을 한 사진 하나, 다른 하나는 비행사의 가족으로 보이는 가족사진이 나란히 실려 있다. 장소는 1925년 진북동 우성아파트 자리라고 쓰여 있다.

 

불시착

  지금과 같은 현대적인 비행장은 아니었다. 1925년 4월 신문기사를 보면 또 다른 비행기가 광주를 전주로 알고 공중을 수차 배회하다가 비상 착륙, 진흙에 박혀 비행기는 망가졌으나, 비행사와 동승자는 무사하다는 기사가 있다. 본래 행선지가 전주인데 광주에 불시착했음을 알 수 있는 기사다.

 

비행사 신용인

  1927년 5월로 가보면, 일본에 유학 중이던 비행사 신용인이 전주에 비행학교 설립을 발표한다. 그 이유는 “경성이 비행학교 설립에 적당하지만, 홍수가 많은 관계로 전주에 설치한다”라고 언급한다. 고향이 고창이어서 이렇게 말했던 것 같기도 한데, 같은 해 8월에는 고국방문 비행을 발표한다. 재산이 꽤 많았던 것 같다. “지금 극도로 경제공황인데, 조선사회 일반의 동정으로는 불가능하고 일절의 비용은 전부 내가 부담하고자 한다. 내가 가진 비행기가 세 대나 있으니, 비행기 사는 데는 돈이 들지 않고, 학교 설립 비용은 2만 원을 예상”하고 있다. 2만 원이면 지금 돈으로 얼마나 될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당시 금 한 돈이 5원 50전이었다. 지금 금 시세와 비교하면, 육억팔천육백만 원 정도 될 것 같다. 당시 경제공황이었고, 화폐가 귀한 시절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큰돈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고국방문비행

  1927년 11월 전주민우회에서 비행가 신군 환영회를 조직한다. 12월 인천에 백삼십 마력의 비행기가 도착, 연일 동정이 보도된다. 12월 17일 전주덕진비행장에 착륙을 예고하지만, 16일 전북도경찰부로부터 “전북 관내는 때가 때임으로 비행중지를 명한다”는 통지를 받는다. 당시 만주에 사는 우리 동포를 길림성 관헌들이 폭압 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지역의 화교를 배척하는 비신사적 사건이 일어난다. 이것을 두고 지역 화교들은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려고 이간질한 것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어쨌든 다음 해 4월 4일 오후 3시에 전주 덕진연못 부근 착륙하는데 비행기 이름은 타이거호였다.

※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책을 참고해 주세요.

 

전주미학

전주미학

www.aladin.co.kr

비행기에서 내리는 신비행사라는 제하의 기사다. 자세히 보면 앞에 TIGER라는 글자를 읽을 수 있다. (『동아일보』, 1927.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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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헌납식

  앞에 책에서 1925년 진북동 우성아파트 자리에 착륙한 비행기를 보면 영어로 타이거 호라고 쓰여 있다. 신용인이 1928년 타고 온 비행기도 신문지상의 사진을 보면 타어거호라 쓰여 있다. 그 모양도 비슷한데, 우연일까? 앞에 사진을 기증한 분의 기억 상 착오일까? 후자로 추측되는데, 진북동 쪽 비행장은 193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다. 이 부근에 방직공장이 들어서는데 군수물자를 만들고, 낙하산을 만들기도 한다. 『전주부사』를 보면 1937년 11월 진북동에 폭이 50m인 비행장을 완공하고 비행기 헌납식을 했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있었다. 지역민에게 비행기를 헌납하라고 강제로 성금을 걷게 했는데, 이때 헌납식을 보면 비행기 5대가 전주에 날아와서, 일본 해군기로 헌납되어서 다시 날아간다. 성금을 냈으니까, 한번 보여주기 위해 온 것이다.

 

친일 비행사

  그러나 비행학교는 전주에서 개교하지는 못했고, 조선비행교라는 이름으로 1929년 5월 5일 경성 여의도의 이 학교 비행장에서 개교를 한다. 신용인이 교장이 되는데, 이후 이름을 신용욱으로 개명한다. 1948년에는 대한항공 전신이라고 말하는 대한국민항공사를 설립하는데, 반전이 있다. 1949년에 반민특위에 친일 비행사로 체포된다.

  당시에는 구명운동도 있었고, 혐의가 적다고 풀려난다. 이후 2대, 3대 국회의원을 지냈는데, 1958년에 여객기 1대가 납북이 되면서 계속 사업에 실패, 4대 국회의원에서 낙선한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고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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