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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무전여행

by 월간 김창주 2021.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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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전주 관통로 사거리를 지나가는데 낯선 풍경 하나를 보았어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 1명과 여성 2명이 배낭을 메고 종이 푯말을 들고 서있었어요.

 

문: 푯말에 뭐라고 쓰여 있던가요?

답: “무전여행 중입니다. 고속도로 요금소까지만 태워다 주세요”였어요.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지요. 무전여행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래서 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문: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답: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20세기 초에 무전여행이 시작된 것 같은데요. 제가 찾아본 바로 1921년 신문기사가 가장 오래되었고, 1926년부터 학생들 사이에서 무전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신문지상에서 화젯거리로 다루고 있는데, 지금 하고 풍경이 많이 다릅니다.

※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책을 참고해 주세요.

 

전주미학

전주미학

www.aladin.co.kr

히치하이커의 손짓(Drozd, 2007)

문: 지금하고 풍경이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답: 1940년 당시에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김남천이 쓴 수필 「무전여행」이 있는데, 제가 요약을 해왔어요. 제가 한 번 읽어 볼게요.

 한때 학생들 간에 무전여행이 성행하였다. 방학 때를 이용하여 서넛이 짝을 지어 지방을 순회하는 것인데 고을이나 술막에 들리면 신문지국이나 지방인사의 신세를 졌다. 당시의 사회는 생판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학생들의 숙박을 주선해 주고 그들의 점심값을 알선해 주는 것을 다시없는 즐거움으로 여겼다. 지금은 그런 무전여행도 없거니와 있다고 해도 대접을 받지는 못할 것이다. 어느 동안에 시세가 변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가끔가다 이 무전여행을 하고 스스로 즐기고 혼자서 유쾌해한다. 관광협회에서 각처의 여행안내를 한 묶음 잔뜩 얻어다 두고 가끔 소설을 쓸 때 써먹곤 하였다.

이 글을 보면 두 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먼저 술막은 주막을 말하는데요. 하나는 무전여행이 환대를 받았다는 사실이고요. 그런데 1940년에 이르러서는 그렇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죠.

 

문: 그러게요. 잠자리도 주선해 주고, 밥도 사주고, 당시에 인심이 좋았다고 봐야 하나요?

답: 잘 생각해보면요. 인심이 좋았다고 보기보다는 근대 이전의 문화가 남아있었다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무전여행을 가난한 학생이 했다고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방학 때 가난한 학생이면 어디를 갈까요? 집에 가서 농사일을 돕겠죠. 또는 학비를 벌든지요.

 

문: 누구나 여행을 할 수 없는 시절에 학생들의 특권 같은 것일까요?

답: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손님으로 대접을 했다고 봐요. 그나마 일제강점기에 학생 신분으로 무전여행을 할 수 있었다는 건 그만큼 여유가 있었다는 것을 뜻하고, 실제로 각 지역 신문지국에서 이 학생들의 동정을 보도하고 돕고 있는 게 이것을 반증합니다.

 

문: 조선시대 여행은 어땠나요?

답: 17세기 기록인데요. 하멜 아시죠? 

 

하멜 표류기

자세히는 모르지만 한 번쯤 하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 같아요. 1980년 10월 12일 제주도에 하멜 기념비가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의미가 있는 사람이란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겠

sawlead.tistory.com

  하멜이 저술한 『조선 왕국기』에 17세기 조선의 여행 풍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요. 서울로 가는 큰길에는 주막이 있었지만, 이외에는 여관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나그네가 아무 집이나 안마당으로 들어가서, 자기가 먹을 쌀을 내놓으면, 집주인은 밥을 지어서 반찬과 함께 나그네를 대접했습니다. 집집마다 순번을 정해서 나그네를 대접하는 마을이 많았는데요. 이에 대해 어느 집도 군소리를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강준식, 『하멜 표류기』, 웅진닷컴, 2004, 287쪽)

 

문: 그런데 1940년에는 왜 무전여행하는 학생들을 반기지 않았을까요?

답: 앞에 수필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관광협회가 만들어지고 각지의 여행안내를 하는 인쇄물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는 현지의 숙박비, 음식값, 교통요금, 명소 등이 자세히 안내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관광자본이 생겼다는 말이죠. 당연히 공짜 손님이 싫어지죠.

 

문: 관광지가 되면서 돈벌이가 안되니까, 무전 여행객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씀이네요. 그러면 이렇게 시절이 변하기 전에 무전 여행객들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기록이 있나요?

답: 1926년 6월 21일 신문기사를 보면요. 

봉래 척후대 두 소년 조윤덕 군과 이창성 군이 일 년 동안 예정으로 전 조선 무전여행을 계획하여 출발하였는데, 종로양복점에서 소년 군복 두 벌을 기부하였다. 여행로 순은 아래와 같다. 문산, 개성, 해주, 원산, 부산, 목포, 광주, 전주 등이다.

 

문: 양복점에서 옷을 주네요. 전주가 여행지에 들어 있고요. 척후대는 뭔가요?

답: 척후대는 지금의 보이스카우트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전주는 당시 무전 여행객의 코스에 거의 대부분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이 소년들이 각 지방의 신문지국을 들르는데요. 양복점에서 옷을 기부한 것처럼, 사소하게는 각지에서 누가 빙수를 제공했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문: 그만큼 색다른 이슈였고, 계속해서 보도가 된 모양인데, 우리 동네 이야기도 있나요?

답: 1928년 1월 15일 신문기사를 볼까요. 

군산의 김동진, 배철아, 김영일 군이 청년의 큰 뜻을 품고 작년에 군산을 떠날 때 유지 수십 인이 축복하는 동시에 처음 뜻을 관철토록 작별 연회를 한 후 충남 서천 방면으로 첫걸음을 옮겨 240일 만에 전 조선을 무사 돌파했다.

 

문: 작별 연회면 잔치를 해줬다는 말인가요?

답: 아마 요즘 말로 하면 파티를 해줬다는 말일 텐데요, 이렇게 무전여행임을 당당히 선포하고 떠나는데,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지원을 받고 계속해서 동정이 보도됩니다. 그만큼 흔하지 않은 화젯거리였죠. 이러다 1930년대부터 시들해집니다. 1960년대 다시 붐이 일어납니다.

 

문: 붐이라고 하셨는데 어느 정도였나?

답: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 가면 대한민국사연표에 1962년 9월 27일 무전 여행자 범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963년에는 무전여행에 관한 신문기사 수가 10배 이상 급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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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범람이라고 하면 넘쳐났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가 있을 것 같다.

답: 여러 이유가 있는데요. 1962년에는 독일, 인도, 스웨덴에서 무전여행 차 한국에 입국한 학생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세계 59개국을 무전여행하고 돌아온 김찬삼의 『세계일주 무전 여행기』와 프란츠 그루바의 『세계-무전여행 입문』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합니다.

 

문: 책의 영향이 컸다는 말씀이네요.

답: 무전여행이 하도 붐이 되니까, 1963년에는 김수용 감독, 곽규석 주연의 영화『후라이보이 무전여행』이 흥행에 성공하기도 해서 당시 사회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데, 단순하게 책의 영향으로 도 볼 수 있지만, 이 밑바탕에는 대중문화의 확산에도 있습니다.

 

문: 어떤 점에서 그런가요?

답: 1961년 일간지 80만 부, 1965년 140만 부, 1969년 270만 부, 1963년에 라디오 수신기 140만 대가 보급됩니다. 소수의 엘리트 계층이 향유하던 문화활동이 대중화하는 현상이 보이는데, 대중이 새로운 문화적 세력을 부상했다고 학자들은 의미를 해석하기도 합니다.

 

문: 책 이전에 당시에 미디어가 크게 대중화되기 시작했다는 말씀인데, 무전여행이 범람이란 기록에서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 것 같은데, 문제는 없었나요?

답: 1962년에 “치안국에 의하면 충청남도에서만 무전 여행자 1,830명이 다녀갔으며, 지금(10월)도 169명의 무전 여행자가 있”었는데, 이들이 “헛된 영웅심과 공상적 모험욕에 사로잡혀 길을 떠난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문: 무술영화 보고 흉내 내듯 책 보고 흉내 내는 헛된 영웅심이었다 그런 말로 들리네요.

답: 예를 들어 “공짜로 교통기관, 접객업소를 괴롭히고, 관공서와 중소기업체에서 구걸하는가 하면 지방의 친지나 선배들에게 여비를 뜯어가곤”하는 학생들의 행태가 사회문제화되면서, 1960년대 말에는 치안당국의 집중단속과 규제의 대상이 됩니다.

 

문: 그렇군요. 지금은 시대가 많이 변했잖아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요. 전주에 오는 무전 여행객들 환영해야 할까요?

답: 이 시대에 진짜 무전여행이 있을까 의심도 되는데요. 지금 한옥마을에서 한복을 입고 노는 문화를 만든 사람들은 대중교통인 기차를 타고 전주에 온 20대들이거든요. 10대에는 사춘기가 오고 20대 30대에는 오춘기가 온다고 하는데, 전주에 청년들이 가방 하나 메고 돈 몇 푼 들고 와도, 재미있게 놀고먹고 자신의 인생을 고민하고 설계할 수 있는 오춘기를 날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합니다. 청년 여러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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