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4. 11:27ㆍ문화
자세히는 모르지만 한 번쯤 하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 같아요. 1980년 10월 12일 제주도에 하멜 기념비가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의미가 있는 사람이란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겠죠.
문: 그렇군요, 하멜은 어떤 사람인가?
답: 백과사전을 보면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선원으로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했다. 1666년 억류생활 끝에 탈출하여 1668년 귀국했다. 그 해에 『하멜표류기』로 알려진 기행문을 발표한다. 이는 우리나라의 지리·풍속·정치·군사·교육·교역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다.
문: 하멜이 동인도회사 선원인데, 일본에 무역을 하던 회사인가?
답: 맞아요. 16세기에 네덜란드는 해외무역이 발달하면서 중국, 일본, 오세아니아, 아메리카에 걸쳐 해상무역이 왕성하게 펼치고 있었고, 동인도회사는 1602년에 네덜란드가 설립한 회사인데요. 이런 해상무역을 배경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문: 주로 어떤 것을 무역했나?
답: 당시에 바타비아, 지금의 자카르타에 동인도회사 본사가 있었는데요. 동양의 향신료와 중국과 일본의 청화백자를 가져다가 유럽에 되팔아 막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처음에 하멜은 포수로 입사를 했는데, 서기로도 근무를 해서 글자를 알았고, 그래서 표류기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문: 앞에서 표착이란 말이 표류하다가 도착했다는 말 같다.
답: 그렇죠. 물결에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육지 도착했다는 뜻인데요. 그때가 1653년(효종 4) 7월 하멜은 상선 스페르웨르(Sperwer) 호를 타고 타이완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가게 되었는데 항해 도중 태풍을 만나 일행 36명이 제주도 표착하게 됩니다.
문: 이방인들이 제주도에 도착했는데, 어떤 일이 있었나요?
답: 당시 하멜보다 먼저 조선에 와서 귀화한 네덜란드인이 있었습니다. 박연인데요. 네덜란드 이름은 얀스 벨테브레인데요. 박연이 직접 한양에서 제주도로 내려와서 통역을 합니다. 사정을 알아보고 대책을 세워주지만, 만족스럽지 않았아요. 하멜 일행은 제주도에서 어선을 훔쳐서 일본으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한양으로 압송이 됩니다. 이후에 효종 임금을 알현하는데, 하멜 일행은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왕을 호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달마다 70말의 쌀과 옷, 총은 물론 호패까지 지급받았습니다.
문: 취직도 시켜주고 조선 사람으로 인정을 받은 셈이네요.
답: 사람이 향수병에 걸리면 고향에 가고 싶잖아요.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 말고삐를 잡고 애원을 하다가, 발각이 되어서, 하멜 일행은 뿔뿔이 흩어져서 유배를 가게 되는데요. 1663년으로 가면 남원에 5명 순천에 5명, 전라좌수영에 12명이 분산 배치됩니다.
문: 처음에 32명이었는데, 수가 많이 줄었네요
답: 그렇죠. 그만큼 고생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결국 1666년에 8명이 탈출해 일본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멜 표류기』에는 “우리는 쌀과 물, 물병과 냄비 등을 지고 성벽을 넘었다. 해안을 벗어나 작은 섬으로 가서 물을 채우고 돛을 올렸다. 5일 아침 지나가던 어부가 우리를 불렀지만 대답도 하지 않았다.” 13년간 조선에서 살았던 셈입니다.
문: 탈출에 성공했네요. 그냥 일본으로 보내줘도 될 것 같은데, 조선 정부는 왜 하멜 일행을 안 보내줬나요?
답: 이면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요. 먼저 하멜이 1666년 조선에서 탈출에 성공해서 나가사키에 도착해 심문을 받는데요. 조선 국왕에게 내보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해 하멜의 답변이 있습니다. 조선의 사정을 다른 나라에 알리고 싶지 않아 하멜 일행을 내보내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강준식(2004)의 연구에 따르면, 더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당시 조선은 북벌 정책에 주력하고 있었는데, 조선의 군사 상황이 외부에 유출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하멜은 조선의 군사 훈련 풍경을 보고, “그들은 세계의 무게가 자기들 어깨에 얹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맹렬히 군사훈련을” 한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둘째는 1637년 일본에서는 기독교로 개종한 기리시단의 대대적인 농민 봉기가 있었습니다. 시마바라의 난이라고 하는데요. 이때 많은 크리스천들이 살해를 당합니다. 하멜 일행을 일본으로 보낸 후에 심문 과정에서 크리스천이란 사실이 밝혀지면 살해당할 가능성이 있었고 인도적인 차원에서 내보내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북벌정책에 도움이 되도록 하멜 일행을 신무기를 개발하는 훈련원에 배속시켰다는 추측 등입니다. 실제로 신무기 개발의 결과가 있었는지, 도움이 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문: 8명이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답: 나가사키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관(商館)이 있었고, 이를 통해 일본 막부(무사정권)에도 전해져 조선에 남아있는 네덜란드 선원들의 석방 교섭이 진행되었습니다. 1667년 석방 교섭이 완료되어 조선에 남아있던 동료도 모두 석방되었고 1668년 네덜란드로 귀국을 합니다.
문: 하멜이 귀국해서 쓴 것이 『하멜 표류기』군요.
답: 사실 하멜이 책을 내기 위해서 쓴 것은 아니고요, 13년 동안 못 받은 월급을 받기 위해서 동인도회사에 작성한 보고서인데요. 당시 조선의 지리·풍속·정치·군사·교육·교역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 되었고, 후에 보고서가 출판됩니다.
문: 조선이라는 나라를 네덜란드와 유럽에 처음 알린 책이었겠다.
답: 상당한 인기가 있었던 같습니다. 당시 일본이 조선과의 무역에서 많은 이익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조선과 직접 교역을 위해 1000톤 급의 선박인 코레아 호를 건조했지만, 일본 막부(무사정권)의 반대로 조선으로 항해하지는 못했다.
문: 그런데 1980년에 하멜 기념비가 세워진 이유가 있을 것 같다.
답: 하멜표류기는 1930년대에 일부 내용이 번역되어서 국내에 출판이 되었는데요. 이후에 간간히 하멜에 대한 이야기와 책 광고가 나오다가, 1966년에 네덜란드의 한국통이라 불리던 훠스 박사가 내한을 해요. 한국전쟁 때 통역장교로 참전을 하기도 했는데, 한국에 하멜과 동료들의 자손이 남아 있을 것이다란 말을 하는데요.
문: 13년이나 살았으니까 그럴 만도 하네요.
답: 실제로 하멜보다 먼저 왔던 박연은 조선인 처와 자식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네덜란드에도 처가 있어서 1991년에는 네덜란드의 박연 후손이 찾아와 ‘한국 쪽 후손’을 찾은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기사를 읽어보면요.
박연의 13대손인 헹크 벨테브레 로테르담 철학과 교수는 최근 아버지와 함께 조상의 뿌리를 찾아 제주에 왔다가 돌아갔다. (중략) 벨테브레 교수는 화약 기술자였던 13대조 박연이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에 상륙, 한양으로 압송된 뒤 훈련도감에서 재직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사망일시, 무덤 소재 등을 밝혀내고 13대조의 한국 후손을 만나고 싶다고 (하략) (『동아일보』, 1991.3.14. 8면)
문: 한국 쪽 후손을 찾았나요?
답: 한국 쪽 후손은 찾지 못했고, 박연의 후손은 대부분 600여 명이 당시 네덜란드에서 어업에 종사한다고 알려져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문: 하멜은 후손이 있을까요?
답: 하멜은 귀국 후에 독신으로 살다가 사망했는데요. 1979년에 한국국제문화협회와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이 각 1만 달러를 내어서 제주도 기념비를 세우게 됩니다. 이후에 1996년에는 KBS 1 TV에서 2부작으로 하멜 표류기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합니다. 당시에 박연 역을 스윈클 주한 네덜란드 대사가 연기를 하고, 하멜 역은 보스나 농무참사관이 맡았다는 후속 기사기 있습니다.
문: 오늘의 결론은
답: 하멜은 죽었지만, 이야기를 남겨서 영원히 우리나라와 네덜란드를 이어주고 있습니다. 나의 이야기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월간 김창주, 2018]
※ 보다 자세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 싶은 분은 다음 책을 참고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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