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2. 16:20ㆍ문화
문: 백설공주 이야기를 준비하셨다고요. 독일 그림 형제의 동화로 알고 있는데, 국내에는 언제 소개가 되나요?
답: 백설공주는 1923년 잡지 『어린이』에 『백설공주』가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이후 1925년에 오천석 번역으로 눈공주로 소개됩니다.(권영경, 2009). 디즈니사의 만화영화 『백설공주』는 1937년 미국에서 개봉하는데, 국내에는 신문지상에 백설희로 소개됩니다. 이렇게 지금과는 다른 이색적인 동화명들이 보입니다. 성냥장사처녀(성냥팔이 소녀), 인어색시(인어공주), 미운 게우 새끼(미운 오리 새끼), 게우는 거위를 일컫는 경상남도 거제 지방의 사투리입니다.
문: 1930년대 미국에서 만화영화 개봉 당시 『백설공주』의 인기는 어땠나요?
답: 1938년 12월 28일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각계에서 환영받는 배우 없는 영화. 디즈니 만화 대인기. 월트 디즈니의 천연색 만화영화 백설공주가 전 세계에서 압도적 환영을 받아 배우 없는 영화가 도리어 굉장히 남는다고 다른 미국 영화제작업자들을 아연케 하고 있는데(중략) 총수입은 사백칠십오만 불이어서 제작비 백만 불의 오 배에 가까운 (수입) (중략) 말성 많은 배우도 만화 인물에게 인기를 빼앗겨 버릴 모양이다.
문: 실재 배우보다 돈벌이가 잘 된다 그런 이야기네요.
답: 그뿐 아니라 작품성에 있어서도 평이 있습니다.
금년도 베니스의 국제영화전, 참가 십구 개 국으로 대성황. 이태리 정부 주최의 제 육회 베니스국제영화전(중략)의 상을 보면, 최고상이 무쏠리니상, 이외에 파시스트상, 민중문화장관상, (등 중략) 영화전 예술 트로피 미국 『백설공주』, 무쏠리니상 이태리 『비행사 루치아노 셀라』, 독일 『올림피아』, 파시스트상은 미국 『톰 소여의 모험』, 이태리 『쥬제페 베르리』(『동아일보』, 1938.11.17.)
문: 당시에 작품성도 인정을 받았다는 이야기네요.
답: 사실 애니메이션이란 장르의 성공이 센세이션 했던 것인데요.
디즈니 씨에게 미술계 최고 영예. 만화영화 미키마우스로부터 백설공주에까지 이르러 세계 예술만화의 절정에 달한 월트 디즈니 씨는 불원 뉴욕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으로부터 미국 미술 최고의 영예를 받게 되었다. (중략) 만화영화 백설공주 중의 원화 한 장면을 미술관이 구입, 전시하는데, 당시에 “미국 미술 발전사 상의 역사적 그림”이란 평(『
동아일보』, 1939.3.1.)
문: 만화영화의 원화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인정을 받았네요. 국내에서도 인기가 있었나요?
답: 당시 신문지상의 광고입니다. 현대가극단과 국도 악극단 합동 가극전 “일곱 난쟁이와 백설공주, 전 세계를 울림 명작 백설공주 가극화”(『동아일보』, 1950.5.31.) 일곱 난쟁이가 백설공주보다 앞에 나와 있는 게 인상적입니다. “국제예술가회의 유네스코에서 돌아와서 (중략) 코르네이뉴의 고전극 루싯드를 못 본 것이 큰 유감입니다만 그대신이라면 우습지만 오페라좌의 백설공주라는 세드쥬 리파아르의 발레 만은 구라파에서 본 몇몇 무대예술 중 가장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경향신문』, 1952.11.13.)였다는 감상평이 있네요.
문: 그러니까 이건 다 무대극이고 아직 만화영화로 상영은 안된 것 같아요.
답: 이런 가극이 동화로 소개되었는데요. 책 광고의 목록입니다. 세계명작그림문고 1. 백설공주 2. 아리바바의 산적 3. 토옴쏘오야아의 모험 4. 피노끼오 5. 거지 왕자 6. 꺼리버어 여행 이야기 7. 집 없는 아이 8. 보물섬 9. 쨘발쨘 10. 홍길동전(『경향신문』, 1955.2.3.) 디즈니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국내에 처음 상영된 것은 1956년입니다. 1957년에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프로그램 소개 코너, TV동화 백설공주가 등장합니다.
문: 다양한 콘텐츠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1960년대로 가볼까요?
답: 1961년 10월 15일 『동아일보』기사입니다.
백설공주 공연. 새로 꾸며진 국제미스코리아오페라단 (중략) 시공간에서 오페레타 백설공주를(그림 원작) 공연한다. 연출은 이보라, 이 오페레타단은 올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1962년 9월 21일 『동아일보』기사입니다.
전국재해대책위원회는(중략) 오페라 백설공주를 사흘 동안 공연토록 했으나, 겨우 만팔천원 가량을 모금했을 뿐인데, 그것도 출연한 미스코리아 오페라단의 점심값으로 다 나가고 밑져야 본전 꼴도 안 된 모양이다.
문: 『백설공주』를 가극으로 만들어서 자선활동을 한 기사군요.
답: 1962년 11월 26일 『경향신문』에는 21세기 과학을 예견하는 기사가 있습니다.
절세미인도 맘대로 낳고 한시간만 자면 피로도 완전 회복, 불로장수 위해 동면센터. 앞날의 더 발달된 세상에서 (중략) 살아보고자, 백 년 동안 잠을 자다가 싱싱하게 젊은 그대로 다시 깨어난 백설공주처럼.... 이래서 사람의 수명은 더욱 연장된다는 것이다.
문: SF소설 같은 이야기를 백설공주와 연결했네요.
답: 1964년 9월 7일『경향신문』광고입니다. 국내에서 『백설공주』를 영화합니다. “(영화 광고) 어여쁘고 아릿다운 비운의 백설 아기를 에워싸고 역어내는 일곱 난쟁이들의 흐뭇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백설공주 이야기를 한국화 했다고 할까요? 사극 같은 느낌입니다. 영화에서 거울은 실재 거울이 아니라, 거울이란 이름의 시녀가 등장을 합니다.
문: 어쨌든 외국의 동화를 우리식으로 재해석해서 의미가 있었을 것 같다.
답: 1966년 4월 9일『경향신문』기사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움직이는 그림책이 나왔습니다. (중략) 아직 글을 읽지 못하는 꼬마 동생에게 언니가 읽어주면서 책장으로 넘기면 백설공주가 의자에 앉아서 양말을 꿰매는 모습이 (중략) 입체적으로 움직이며 나타나는 그림책. 한 권에 500원”
문: 1966년 500원? 물가가 어느 정도였나요?
답: 당시 설렁탕 한 그릇이 90원 정도였고, 금 한 돈이 2,000원여서,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한 권에 오만 원 정도 한 것 같습니다.
문: 1960년대에 백설공주와 관련된 콘텐츠가 다양해진 것 같은데, 1970년대로 가볼까요?
답: 「예술을 다시 재단하는 필요악 영화 검열」이라 제목의 1971년 3월 6일 『동아일보』기사가 있습니다. 검열이 심해서 당시 관객들은 영화 자막에 문공부 편집이라고 써야한다. 영화를 제7의 예술이라고 하는데, 검열관을 제8의 예술인이라고 풍자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만화영화 『백설공주』에서 공주가 난장이들과 우정의 인사로 입 맞추는 신까지 잘려나간 인도에 비하면 한국 관객은 운이 좋다고 말하기도 하고요.
문: 지나친 영화 검열을 풍자하고 있네요.
답: 그런데 1980년대로 가면, 월트디즈니사가 성인용 상품에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도용한 상점들을 고소를 하는데(『경향신문』, 1981.10.14.), 19금 상품에 캐릭터를 도용한 사건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벌어진 일인데, 미국도 당시에는 지적재산권, 상표권에 대한 의식이 약했던 것 같아요. 백설공주가 어떻게 보면 지적재산권에 확보에 대한 기여를 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 그렇군요.
답: 1984년 9월 18일 『매일경제』기사인데요.
국내 전자회사가 월트디즈니사와 상표 사용권 계약해서 만화 시계 17종 개발, 이 시계 문자판에는 도널드, 미키마우스, 백설공주, 신데렐라 등. 진품과 가품을 구별하기 위해 디즈니사의 미키마우스 스티커가 시계에 붙어 있었는데, 체온에 따라 색이 변화
문: 혹시 어렸을 때 만화시계를 차고 다녔나요?
답: 그럼요, 유행이었죠. 「대학가 운동권학생 은어 유행」이란 제목의 1985년 11월 12일『동아일보』기사가 있는데요. 당시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백설공주라는 은어는 문교부장관을 뜻했습니다. 신문에 여러 개가 조사되어 나와 있는데요. 당시 대학의 현실과 경찰의 시위 진압 등을 풍자하는 내용들입니다.
문: 시대가 변하니까 백설공주가 학생운동에 등장을 하네요.
답: 세태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데, 1986년 2월 12일 『경향신문』기사인데요.
서울 압구정동의 한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날을 맞아 백설공주 연극을 준비하다가 “왜 우리 딸을 백설공주 안 시키고 뉘 집 딸만 백설공주 하느냐”는 학부모의 반발로 끝내 연극을 취소시켰다. 또 기마 놀이를 시킬 수 없다. 서로 대장이 되려고 해서.
문: 이제 1990년대로 가볼까요?
답: 1996년 9월 26일 『한겨레신문』에는 “왕자의 키스에도 깨어나지 않는 백설공주. 자연이 병들면 우리도 병인 든다”는 공익성 광고가 등장합니다. 1997년 3월 31일 『경향신문』에는 “혁명가 백설공주, 노동운동가 신데렐라. 왜곡된 동화 원본 찾기, 새로쓰기 활발히 전개, 왕자만 기다리는 여성, 계모는 나쁜 여자라는 인식 등은 기득권층 남성들이 만든 성차별, 사회 편견 거부, 올바른 삶, 인간을 재조명하는 동화 다시 읽기 시작”했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문: 왜 혁명가, 노동운동가란 수직어가 붙었나요?
답: 당시 독일학자 이링페처가 찾았다는 『백설공주』 원본은 백설공주는 전제군주제를 반대하는 부잣집 딸이었는데, 반란군과 합세해 왕정을 무너뜨리고 왕비를 처형한 내용이었고, 『신데렐라』는 왕자의 청혼을 물리친 노동운동가였다는 해석이 등장합니다. 이렇게 백설공주 이야기는 시대에 따라 새롭게 변주하고 있습니다. [월간 김창주, 2018]
'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멜 표류기 (0) | 2021.06.04 |
---|---|
공중전화로 본 근현대 (0) | 2021.06.03 |
인류학은 일반화를 극복할 수 있는가? (0) | 2021.06.01 |
무지한 스승의 원형 (0) | 2021.06.01 |
진실의 은폐와 후쿠시마 원전 폭발 (0) | 2021.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