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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공중전화로 본 근현대

by 월간 김창주 2021.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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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리한 휴대전화 덕분에 사라져 가는 공중전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문: 공중전화기는 언제 처음 우리나라에 설치되는가?

답: 1962년 무인 공중전화기가 처음 우리나라에 설치된 해였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전화부스 형태의 공중전화기가 국내에 등장을 합니다. 이 전화기를 보면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문: 무인 공중전화기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인가?

답: 지금이야 공중전화기를 지키며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1962년 이전에는 공중전화에 관리원이 상주해 요금을 받고 전화기를 관리했는데요. 이곳을 시대마다 명칭이 좀 다르지만 20세기 초에는 사무소, 파출소라고 하듯이 전화소라고 했습니다.

 

문: 시대마다 전화기의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한데, 언제 전화기가 국내에 들어오나?

답: 전화는 고종황제가 광무개혁을 단행하면서 1898년에 정부의 각 부처와 인천까지 개통을 하고 다음 해에 더 전화를 보급하려고 했는데 기술, 재정난으로 어려워지니까, 일본이 경성, 인천 간 전화선 개설을 계획해요. 우리 정부가 자극을 받아서 1902년에 경성, 인천 간 공중전화를 개통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893년 New Orleans 전화교환원의 업무 모습

문: 왜 자극을 받았나?

답: 통신과 교통은 나라의 근간인데, 이걸 다른 나라에 뺏기면 안 되니까 발 빠르게 움직여서 비교적 통신은 우리의 힘으로 설비하지만, 철도는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입니다. 광무가 고종황제의 연호인데 이것을 따서 개혁을 하면서 전화 설비를 한 것입니다. 또 이 빛을 전주가 이어가고 있죠, 전주한옥마을의 승광재에 황손이 살고 계신데. 승광이 빛을 계승한다는 뜻입니다.

 

문: 그렇군요. 그럼 다시 본론으로 가서 1902년에는 유인 공중전화였나?

답: 전화소라고 했고, 관리원이 상주를 했습니다. 쓸 데 없는 농담을 하거나 하면 통화를 중지시킬 수 있었고, 당시 전화 가입자는 50여 명 정도인데, 대부분 가입자는 중국 상인이었고, 한국인 가입자는 10명 정도, 양반 가입자는 없었다고 합니다.

 

문: 전화 말고 모스부호로 보내는 통신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답: 이건 더 빨라요. 일본이 1883년 나가사키와 부산 사이에 해저 전신선 부설하고 1884년 2월 통신 개시합니다. 1885년 11월 중국이 경성, 인천, 의주 전신선을 가설해서 천진과 통신을 개시하고요. 1894~5년 일본이 경성, 부산, 인천에 군용 전신선을 가설합니다. 1898년 6월에 경성, 전주 간 군용 전신선이 개통됩니다. 러일전쟁 후인 1905년부터 일반인이 일본어로 전보를 칠 수 있게 됩니다.

 

문: 아니 왜 일본어로만 전보를 치게 했답니까?

답: 사실 1905년 5월이 되면 그들은 인계받았다고 하지만, 일본이 국내의 전화마저 장악을 합니다. 당시 한성전보총사에 전화 가입자 65명이었는데, 7월이 되면서 1,037명으로 늘어납니다. 이 숫자가 많은 것을 상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두 달 만에 가입자가 이렇게 많이 늘었다는 것은 신속한 통치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문: 전화는 전주에 언제 들어오나?

답: 1908년 9월 1일 전주우편국에서 시내외 통화 사업을 개시합니다. 당시 가입자는 일본인 36명, 한국인 5명이었습니다. 1937년에는 일본인 390명, 한국인 126명, 외국인 2명 등 518명 가입되어 있습니다. 시내통화도수는 3,421,400통, 시외통화도수는 48,374 통입니다. 가입자 1인당 1일 18 통화를 한 셈이죠.

 

문: 전주도 일본인들이 우편과 통신을 장악하나?

답: 1903년 1월 외부대신 조병식이 일본 임시대리공사 하기와라 모리카즈(萩原守一)에게 “일본인 모리나가 신소(守永新三)가 불법적으로 전주 서문 밖에 설치한 우편사무소를 철폐하도록 조처하여 줄 것을 요청”을 하지만 그 행정력이 전주까지 미치지 못해요.

 

문: 그럼 그냥 막무가내로 계속 우편 사무소를 운영했나요?

답: 우리 정부의 철폐 요구가 있자, 간판을 건물 뒤에 달고 영업을 계속 이어가는데요. 1903년 7월부터는 집배 사무를 시작합니다. 1906년에는 전보사를 장악해서 전신 사무를 취급하고, 1906년 7월부터는 전주우편국이라 개칭합니다. 1910년 일제의 강점 이전에 전주의 근대적 통신수단을 점령한 것입니다.

 

문: 모리나가 신소는 어떤 사람인가?

답: 모리나가는 일본 야마구치현 사람으로 성씨가 다른 형인 이노우에 쇼타로(井上正太郞)와 함께 1897년 전주에 최초로 이주한 일본인입니다. 이후에 신문도 창간을 하고 전주학교조합의 관리자가 되어서, 전주의 통신, 언론, 학교, 종교를 모두 장악한 유지가 됩니다.

 

문: 답답한데, 해방 후로 가보죠.

답: 1946년에는 경성소방서장이 신문에 기고한 글이 있어요, 불이 나도 일반시민이 알릴 방도가 없어 헐레벌떡 뛰어오면 이미 늦는다는 글입니다. 1947년 11월 5일 서울 시내 100여 개소에 관리인을 둔 공중전화를 부활한다는 소식이 실려 있지만, 1953년 10월로 가면 한국전쟁 전 서울에 2만 대 전화가 있었지만 현재 3천대로 3/5 이상이 거의 전멸 상태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문: 더 우울한데, 재미있는 기사 없나?

답: 아직... 1962년 9월 20일 서울시내 열 곳에 무인 공중전화 10대 설치됩니다. 체신부에서는 무인 공중전화의 편리점은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어서 비밀 통화하기에 좋다고 홍보합니다. 신문에서는 연애 연락소가 될듯하다고 예상하지만, 보름도 안 돼 5대 도난되는데요. 이후에는 돈 통만 절도합니다. 전화요금은 5원이었습니다.

 

문: 5원이면 어느 정도 가치인가?

답: 1962년에 화폐개혁이 있어서, 물가 변동이 심했는데요. 시내버스 일반이 5원, 두부 한 모 5원, 1963년 라면 하나가 10원이었고, 금 한 돈에 880원, 쌀 한 가마에 2,000원이었고, 가정용이나 영업용 전화는 정액제로 가정용은 430원, 영업용 700원이었습니다. 1963년부터 기본요금 일백 원에 도수 요금을 합한 요금제로 바뀝니다.

 

문: 도수 요금이면, 전화를 건 만큼 요금이 올라가겠네요.

답: 그 전에는 정액제라 다방 같은 데서 전화 인심이 좋았지만 이후에는 전화기에 자물쇠를 달기도 하고, 다이얼판을 뗀 전화기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공중전화 사용이 늘어나는데, 1965년부터는 공중전화에 벙어리 저금통, 국고수입증대 기계라는 별명이 붙기 시작합니다.

 

문: 무슨 뜻인가?

답: 지금이야 뭐 별로 황당하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전화기 고장이 잦아서 돈을 그냥 꿀꺽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1970년 이후에는 화난 시민이 국가를 상대로 이 돈을 돌려 달라는 소송을 하는데, 당시 법원은 동전만 삼키는 전화기는 국가의 책임이다. 원고에게 5원을 지급하라고 판결이 나오는데, 이 돈을 돌려받기 위해 2,722원의 소송비용이 들었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문: 참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공중전화에 길게 줄 서서 기다리고, 그랬었죠?

답: 하나만 더 소개를 하면, 1971년 12월 신문에 발표한 이어령 전 장관의 「우물터와 전화」라는 수필이 있는데, “공중전화통에서 여성이 전화를 사용하고 있을 때 그것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는 장마철에 처마 밑에서 햇볕이 나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지금 이런 표현을 한다면 아마 많은 비난을 받을 것 같은데요. 전화로 읽어본 과거 사회의 한 단면입니다.

 

문: 지금은 사라져 가는 공중전화기인데, 여러 사연들이 있었네요.

답: 지금은 시민들이 많이 사는 동네지만, 1969년에는 삼천동, 송천동, 평화동 등이 대부분 전기 혜택을 받지 못해 호롱불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전주시가 4,534개의 전기등 설치를 계획합니다. 불과 50년 전 일입니다. 반세기 만에 호롱불이 첨단 IT의 불빛으로 바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보면 엄청난 산업의 발전이 느껴지는데요. 이게 다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하신 업적입니다.  [월간 김창주,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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