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6. 23:03ㆍ전주
이리역(현 익산역) 폭발사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번에 1920년에 전주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수학여행을 간 이야기를 말씀드렸는데요. 경편철도 이야기도 했고요. 이번 이야기는 1977년 11월 11일에 있었던 이리역 폭발사고입니다. 1977년이면 거의 45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이네요. 사건은 평온했던 11일 금요일 밤 9시 15분에 발생합니다. 한국 대 이란의 월드컵 예선 축구경기를 TV에서 하고 있었고 이리역 부근 삼남극장에서는 하춘화 씨가 700여 명의 관중 앞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문: 기차에 있던 화약이 폭발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답: 이리역에 깊이 15미터, 직경 30미터의 깊은 웅덩이가 패인 폭발이었는데, 인천에서 출발해 광주에 도착 예정이었던, 기차가 익산역에서 정차 중에 다이너마이트 914개 상자(22톤), 초산 암모니아 200개 상자(5톤), 초안폭약 100개 상자(2톤), 뇌관 36개 상자(1톤)가 터진 대형 참사였습니다.
문: 상상하고 싶지 않은데, 피해규모가 어느 정도였나?
답: 승객을 태운 열차가 역 내에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는데요. 역 반경 500m 가옥은 전파, 고층 건물은 기둥만 남았고, 반경 1km 가옥은 반파, 4km 이내 가옥은 창문이 떨어져 나갔고, 반경 8km 건물은 유리창이 박살 났습니다. 사망자 59명, 중상자 185명, 경상자 1,158명으로 1,402명의 인명피해, 1,674가구 7,373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문: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거죠?
답: 당시 철도운송규정 제46조를 보면 화약 운송은 직송하게 되어 있었는데, 인천에서 이리까지 오는 데만 22시간이 걸립니다. 이때 호송원이었던 신 씨가 화약류 직송 원칙을 무시하고 수송을 늦추고 있는 이리역에 항의를 하는데 무시를 당하니까, 술을 마셔요.
문: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답: 잠을 자로 화약을 실은 열차로 들어오는데, 캄캄하니까 양초를 켜서 화약 상자 위에 올려놓고, 침낭 속에서 잠이 드는데, 촛불을 안 끄고 잠이 든 거죠. 그러다 연기에 잠이 깨는데, 불이 끄다가 도저히 안 되니까, 도망을 쳐서, 본인은 살아요.
문: 어떻게 폭발물이 있는데 양초를 켤 생각을 하죠?
답: 당시 기록을 보면, 호송원은 폭발물 취급 자격도 없었고, 화약류 직송 원칙을 안 지킨 수송 관계자의 무사안일이 복합되어 발생했는데, 직접적인 원인이 된 신 씨는 징역 10년 형을 받습니다. 나중에 희생자 유가족들이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내는데, 이건 좀 후에 말씀드릴게요.
문: 당시 피해복구 상황이 궁금한데요.
답: 재빠르게 복구가 되는데요. 당시 단기대책으로 천막촌을 건설하고, 장기대책으로 이재민 아파트를 건설하게 됩니다. 천막촌이 익산 소라산하고 배산에 세워졌는데, 8일만 877개를 세웁니다. 목재 17만 재, 합판 18,350매, 보도블록 93,000매가 사용이 됩니다. 군인 29,900명, 예비군 17,000명, 학생 2,600명, 총 49,500명이 천막촌 건립에 동원이 됩니다.
문: 이재민 아파트도 지어지나?
답: 2010년에 재개발된 모현주공아파트인데요. 사고 난지 200일 만인 다음 해 7월에 입주를 해요. 26개 동 1,180가구가 살 수 있는 대규모 아파트였습니다. 당시 정부는 피해 복구 예산으로 130억 원을 투입합니다.
문: 당시 130억 원이면 어느 정도 예산 규모인가?
답: 당시 80kg 쌀 한 가마가 22,000원이었고, 이때 이리시의 한 해 공익사업비가 8억 원 정도였으니, 엄청난 사업비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고 1년 후에 신문지상에는 “화약 폭발사고의 장본인인 신 씨 구속에 대해 요즘 이리 시민들은 신 씨의 동상을 세워줘야 한다고 이색적인 농담”를 한다는 기사가 있어요.
문: 믿거나 말거나 인가? 왜 그런 이야기가 나왔나?
답: 안타까운 사고지만 단기간에 난관을 극복한 것은 사실이었고, 역설적이지만, 일부 전문가는 “새 이리 건설계획을 20년 앞당겼다”는 평가를 하기도 하는데, 뭐랄까? 개발의 역설 같은 느낌입니다.
문: 폭발 사고를 낸 신 씨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도 같은 맥락인가?
답: 사고 난 2년 후인 12월 21일에, 가족을 잃었던 유족들이 사건 발생의 장본인이었던 신 씨를 석방해달라고 탄원을 해요. 그 이유는 "사고를 계기로 입었던 뜨거운 동포애에 보답하고 자랑스러운 시민상 정립을 위해 펼치고 있는 애향운동에 호응, 이 같은 탄원을 하게 됐다"라고 밝혀요.
문: 이해가 안 되는데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요?
답: 저도 이해가 안 가는데, 나름 해석을 해봤어요.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사고 당시 폭발음을 듣고 본능적으로 집 밖으로 뛰어나왔는데, 그때서야 집 안에 있던 애들 생각이 났다고 해요. 그래서 찾아보니까, 아내가 두 아이를 안고 맨발로 집 밖에 나와 덜덜 떨고 있었는데. 유리 파편에 발에 상처에 나있는데, 자기는 그 와중에도 신발을 신고 있어서, 그게 너무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문: 모성애가 무언지 알 수 있는 장면인데, 결론은?
답: 앞에서 남성들이 엄청난 속도로 피해를 복구하잖아요. 그와 함께 여성의 용서와 포용이 있었다고 생각을 해봤어요. 좌우 이데올로기 전쟁 속에서 서로에게 총을 겨누었지만, 아이를 낳고 양육한 것은 여성이잖아요. 남성들이 돈을 번다고 밖에서 전쟁을 할 때 여성들의 포용과 화해가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추석이 다가왔다. 놀랍게도 마을은 언제 (한국)전쟁을 겪었나 싶게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중략) 이것은 마치 수천 년 동안 수많은 권력자들의 부침 속에서도 생존을 영위해온 민중이 끈질긴 생명력으로 펼치는 강력한 시위와도 같았다. (라종일, 『낙동강』, 파주: 형설라이프, 2010)
당파싸움, 좌우 이데올로기 전쟁과 같은 극적대립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양육한 것은 여성이다. 대립의 역동성을 공존의 문화로 변환할 수 있는 동력을 나눔을 전제로 한 축제 또는 종교적 제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음식을 나누며 조상을 섬기는 명절인 한가위는 대립을 공존으로 변환하는 하나의 사례다. 라종일은 참혹한 한국전쟁 중에 있었던 추석 풍경이 축제이자, 권력자를 향한 시위와도 같았다고 묘사했다. [월간 김창주,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