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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보물과 도굴

by 월간 김창주 2021.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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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경주박물관이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서 금관총을 재발굴한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1921년에 처음 발굴이 되었으니까, 95년 만에 재발굴하는 셈인데요. 처음 발굴은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모로가 히데오라는 사람이 했는데, 사실은 도굴꾼이었습니다.

국보 제87호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문화재청, 2014)

문: 모로가 히데오는 어떤 사람인가?

답: 일제강점기에는 각 지방마다 일본인이 만든 아마추어 고고학자 모임이 유행했습니다. 경주고적보존회와 부산고고회가 대표적입니다. 모로가 히데오는 경주고적보존회 운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박물관 경주분관의 초대 주임(관장)을 지내고, 1930년대 초반까지 경주에서 절대적인 문화 권력을 행사합니다. 1908년 한반도에 건너와서 무역업을 하는데, 1910년경부터 경주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유물 수집을 시작합니다.

 

문: 2015년에 왜 재발굴했는가?

답: 1921년에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금관총의 유물 수습도 모로가가 주도했는데,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정식 파견된 조사원들은 절차와 방법을 수시한 난폭한 수습에 불쾌함을 토로합니다. 이 때문에 경성으로 유물을 옮겨 정리할 것을 주장하는데, 모로가는 지역 문화재의 외부 유출이라며, 조선인 유지들을 끌어들여 반대하지만, 결국 유물들은 경성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문: 금관총은 어떤 유적인가요?

답: 금관총은 신라의 금관이 고분에서 출토되어 붙은 이름입니다. 1921년 9월 가옥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는데, 이미 파괴된 고분인 데다 정식으로 발굴 조사된 것이 아니어서 묘의 구조나 유물의 정확한 상황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출토물은 금관, 장신구, 무구(武具), 용기 등인데요. 특히 구슬 종류만 총 3만 개가 넘게 나왔습니다. 금관은 경성으로 옮겨지는데요. 경주의 유지들은 금관을 돌려받기 위해 보관창고를 만듭니다. 이후 금관을 경주에서 전시하게 되는데, 여기까지 보면 지역 문화를 위해 긍정적인 행동을 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책을 참고해 주세요.

 

전주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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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aladin.co.kr

국보 제87호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문화재청, 2014)

문: 실상은 어땠나요?

답: 모로가 히데오는 당시에도 사교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1919년에 취임한 사이토 총독이 같은해 11월에 경주고적보존회와 불국사, 석굴암을 답사하고, 모로가와 절친한 사이가 됩니다. 이후에 사이토 총독은 관계기관을 통하지 않고 경주에 내려와 불국사 앞 호텔에 묵으면서 모로가를 만나고 그가 수집한 유물을 감상하기도 하는데, 갑작스런 총독의 경주 방문에 지역 관료들이 크게 난감해합니다. 후에 모로가가 도굴품 취급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을 당시 사이토가 직접 선처를 호소하는 편지를 재판관에게 보내기도 합니다. 사이토 총독과 관계는 대표적인 예고, 정관계와 학자들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경주에서 발굴한 문화재를 단순히 감상만 하고 갔을까요?

 

문: 모로가는 어쩌다 잡히게 되었나?

답: 모로가는 발굴을 할 때마다 고분이 이미 도굴되었다는 결과를 연속해서 보고하는데요. 이것을 수상히 여기던 당시 경찰이 경주읍 황오리의 서영수와 인왕리의 김홍대라는 사람이 고분을 도굴하고 출토된 유물을 운반하던 중에 현행범으로 체포합니다. 취조 과정에서 모로가의 관여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미리 도굴을 하고 이후 총독부의 승인을 받아 발굴한 척한 것이죠. 모로가의 가택을 수색하는데 2만여 원 어치의 유물이 발견되어서 압수가 됩니다. 모로가가 체포된 1933년 금 한 돈이 7원 정도였는데, 요즘 시세로 환산을 하면 육억 원 이상의 유물입니다. 실제보다 감정가를 크게 낮추어 평가해 모로가가 유리한 판결을 받도록 했는데요. 총독이었던 사이토, 일본 고고학계의 원로이자 경도제국대학의 총장을 지낸 하마다고우사쿠, 역사학계의 거물인 쿠로이타카츠미도 재판장에 탄원서를 보냅니다. 결국 모로가는 보석으로 풀려나 박물관 경주분관 주임직에서 물러나고, 이후 경상북도 수산시험장 주임으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재판 과정에서 도쿄의 제실박물관이 가져갔던 유물은 한일수교(1965)를 맺던 무렵에 반환되었습니다.

 

문: 발굴된 유물을 어떻게 이용했나?

답: 경주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고대 일본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물건으로 역사를 왜곡하는데 활용이 됩니다. 경주를 고대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잃어버렸던 땅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데 사용됩니다.  한편으로 박물관 사업을 통해 식민 통치 초기부터 ‘전통의 존중’이라는 형식을 통해 왜곡된 과거로부터 현재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주입시키는데 활용한다. 신라 유적조사와 유적 보존활동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고 일본제국의 권위를 강화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권력층에 전달하고 설득을 합니다. 한편에서는 문화재를 이용해 관광객을 유치하고 거기에 나오는 이익은 경주 거주 일본인 사회가 독점적으로 나누어 가집니다.

 

문: 1921년 금관총 발굴 때문에 세상 떠들썩했다고 하셨는데, 그때도 관광객이 있었겠죠?

답: 다양한 수익사업을 벌이는데, 금관총 발굴 이후 수많은 일본인들이 경주를 방문합니다. 이 안내를 경주고적보존회가 맡아했고, 경주를 선전하는 다양한 책자와 전단지가 일본에 뿌려지는데요. 선전의 주요 내용은 금관총과 경주 기생이었습니다. 1930년대에는 경주의 고적을 유람하는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고 경주 고적 안내를 통해 이익을 올렸는데, 개발된 코스별 요금과 고적을 설명하는 안내서까지 제작해서 배포하기도 합니다. 기념품으로 탁본을 제작하기도 하고, 각종 서적과 엽서를 만들어 판매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역사 유적지를 역사적 판타지와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관광지로 만듭니다.

 

문: 일제강점기에 전주에도 관광객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답: 1931년 전주 역시 명소 사진이 붙은 「전주 안내도」라는 관광지도가 제작됩니다. 당시 신문에서는 조선왕조의 발상지로 경기전과 태조어진 등이 조명되고, 관광지화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몇 해 전 지역의 소수 학자들 사이에서 세초 매안한 태조어진을 경기전에서 발굴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는데요. 발굴이 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발굴이 되든 그렇지 않든 그 자체가 문화재를 파헤치고 훼손할 수 있기 때문에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 결정 전에 지역의 원로 분들은 삼양다방에서 “경기전을 발굴하자는 말은 일제강점기를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이미 일본인들이 철저히 파헤쳤고, 있다면 이미 가져갔다”는 말씀을 하셨죠.

 

문: 그러면 전주에도 당시에 아마추어 고고학자 모임이 있었나요?

답: 『전주부사』에 천년이 된 기와 사진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발굴한 사람은 오마가리 미타로라는 사람인데, 1930년대 부산고고회 설립에 간사로 참여하고 부산에서 세관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전주에는 전매국 직원으로 온 인물입니다. 『전주부사』에는 그가 “전주의 옛 기와 수집에 이상할 정도의 노력을 기울여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거의 전국적으로 기와 수집을 합니다. 이 천년 기와는 1926년 화원정 도립의원 부근에서 발견되는데, 지금의 경원동 한국전통문화전당 자리입니다. 천년전주라고 흔히 말하지만, 전주에 “천년이 된 유물이 무엇이 있냐?”라고 누군가 물으면 쉽게 말하기 힘들어요. 일본 어딘가 있을 것 같은데, 찾아와야겠죠? 좀 더 많은 연구와 조사가 필요한 실정입니다.  [월간 김창주, 2015]

전주 경원동 한국전통문화전당 부근에서 1926년 발굴된 천년 기와

위 유물 사진에 대한  『전주부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전(磚) ‘두 사자가 자웅을 겨룸’ (이상 오마가리 미타로 씨 소장) : 1926년 무렵에 화원정의 현 도립 의원 부근에서 발견. 고찰에 사용되었던, 바닥에 까는 기와로 신라 말, 고려 초 즉 약 1천 년 이전의 것으로 여겨진다. 길이 1척 3촌 2부, 폭 9촌5부, 두께 2촌 3부. 이곳 부근에는 약 500년 전인 조선 세종 시절에 승의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아직 실록각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실록을 일시 그 절에 보존했다고 한다. 그 외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참고문헌

「전주 안내도」, 1931
홍성덕 외 역, 『국역 전주부사』, 신아출판사, 2009
이순자, 「1930년대 부산고고회의 설립과 활동에 대한 고찰」, 『역사학연구』 33집, 2008
정인성, 「일제강점기 경주고적보존회와 모로가 히데오」, 『대구사학』 95집,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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