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6. 07:20ㆍ전주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이 화제였다. 기계문명과 문화의 대결로 읽는 사람도 있었다. 바둑 중계 중간에 나오는 ‘바꾸기’란 말을 들으면서, 20세기 광란의 제국주의를 떠올린 사람 역시 많을 것 같다. 내가 이 땅을 먹고 너는 저 땅을 먹어라. 아프리카 지도에 직선으로 그려진 국경선과 가쓰라·테프트 밀약 같은 밀실에서 이루어진 제국주의자들의 땅따먹기가 생각났다. 이세돌의 한 판 승리에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문화적 자긍심을 지킨 선비정신이 떠올랐다. 또한 바둑을 두는 인공지능 알파고가 산술적이기 때문에 하찮아 보이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왜 두려운가? 『정의란 무엇인가』의 마이클 샌델 식으로 말해 보자. 곧 굶어 죽을 것 같은 사람 셋이 있다. 그리고 떡이 세 개 있다. 그렇다면 각자 하나씩 나눠 먹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상황을 바꿔보자. 엄마, 아빠, 아이가 있다. 그럼 부모는 곧 죽을 것 같은 아이에게 세 개를 다 줄 수도 있다. 그런데 인간은 세 개를 모두 죽은 자를 위해 바다에 던질 수도 있다. 다른 문화에서는 알 수 없는 이런 제의적 모습들을 인류학자들은 각각의 문화적 의미를 밝혀 찾아내었다.
이런 도덕적 문화적 인간적 문제는 곧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인공지능 무인자동차가 거리를 주행하는 영상은 더 이상 새로운 뉴스가 아니다. 이 첨단기술에 누군가는 고민에 쌓여있다. 사고가 났을 때 무인자동차에 탑승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더 많은 피해자를 낸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가치 판단에서 인공지능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탑승자와 그 밖에 있는 사람을 모두 살상해야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적진에 나포된 인공지능 탱크가 아군에게 다시 돌아오기 위해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혹자는 군인을 대신할 수 있는 터미네이터가 15년 후엔 가능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 정도 예측은 인공지능을 개발한 선진국에서 이미 논의 중이거나, 되었을 것 같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시대가 올 것인가? 다시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장으로 가보자. 이세돌과 동등하게 바둑을 둔 사람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이세돌과 동등한 수준이 아니었음에도,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경기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인공지능이란 도구가 약자에게 주어진다면 좋은 수단이 되겠지만, 강자의 수단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인공지능을 갖춘 도구를 누구나 소유할 수 있을까? 결국, 인공지능은 착하든 악하든 인간을 닮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방에 민가가 보인다. 탈출 불가”를 외치며,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파일럿 고 김도현 소령을 기억한다. 그의 살신성인(殺身成仁)에서 보이는 인간의 존엄과 위대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는 21세기 대학이 필요한 학문은 무엇일까? 대학에서 사라져 가는 문학과 철학과 역사를 토론하는 인문대학일까? 인문학과 공학이 만나는 융복합 학문일까? 지금 이 시대에 우리 선배들의 선비정신과 다시금 재조명받고 있는 전주정신이 왜 중요한지 그 의문에 고민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 『전북중앙신문』(2016.4.1.10면)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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