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포역과 전주 경편철도

2021. 6. 12. 09:52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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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번에 이어서 철도와 관련된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춘포역부터 시작할게요. 익산의 춘포(春浦), 만경강에 배가 드나들던 포구였고, 봄 춘자를 쓰니까, 우리말로 봄나루라는 말이 됩니다. 철도가 있기 전에는 배가 주요한 운송수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문: 춘포보다 봄나루가 더 이쁘네요. 춘포역은 언제 생겼나요?

답: 1914년 전주와 익산간 경편철도가 개통되면서 역 건물이 지어지는데, 처음에는 대장역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호소가와농장은 경편철도 개통에 맞추어 정미소를 완공합니다. 이 일본식 이름은 1996년에 춘포역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호소가와는 풍남동에도 거대한 별장을 지어요.

춘포의 범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멀리 보이는 포크레인이 만경강을 정비하고 있다.(2015.11.6.)

문: 풍남동이면 지금의 전주한옥마을인가요? 지금도 있나요?

답: 전주한옥마을 입구에 있는데요. 1960년대 중반 이후 전북대학교 총장 관사였다가, 1970년대 중반에 왜식의 건축 양식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양옥을 건립합니다. 지금은 전북대예술진흥관입니다. 풍남동 일대는 일본식 집과 일제강점기 공공기관의 일본식 사택들이 꽤 있습니다.

 

문: 맞아요. 한옥마을에도 일본식 집들이 드문드문 보이는데, 대장역은 무슨 뜻인가? 호소가와의 별명인가?

답: 호소가와(細川) 농장은 춘포를 오오바무라(大場村: 넓은 뜰이라는 뜻)라 불렀어요. 우리식 지명을 지워버리고 일본식 지명을 사용했습니다. 춘포역은 현존하는 남한의 600여 개의 역사 가운데 가장 오래전에 건립되어서 2005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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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포역(2015.11.6.)

문: 넓은 평야에 만경강이 흐르고 있어서, 아름다운 곳인데, 역을 짓고 정미소를 함께 완공했다는 점에서 일제의 수탈을 읽을 수 있네요.

답: 완산팔경에 돛단배들이 돌아오는 모습이 산수화 같다는 동포귀범이 있잖아요. 경편철도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만경강 뱃길을 유용하게 사용했지만, 춘포역이 생긴 이후에는 만경강 대안(對岸: 건너편 언덕)의 김제시 백구면 주민들도 배를 타고 건너와서 춘포역에서 전주, 익산, 군산에 갔습니다.

 

문: 그때는 승객이 많았을 것 같다.

답: 1934년 6월 12일 『동아일보』 신문 기사를 보면요.

대장촌역은 만경강 중류의 포구로, 문자 그대로 귀범이 머물던 곳이오, 명사십리 백사장은 만병을 통치, 모래찜이란 것이 있어 단오절이면 전라도를 막론하고, 멀리 충청도 경상도까지 남녀노소가 운집, 강변 모래에는 수만의 언어 떼가 물결쳐 일대 장관을 이루는데, 철도 당국에서는 매년 이때를 기회하여 기차 왕복 할인을 행한다.

 

문: 그런데 경편철도가 뭔가?

답: 지금 철로보다 가로 간격이 반 정도인 철로인데 기차 크기도 그만큼 작아서 ‘성냥갑만하다’라는 비유를 사용하곤 합니다. 전주와 익산 간에 경편철도를 놓고 전주역이 1914년 11월 17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합니다.

 

문: 지금은 구경할 수가 없는데, 어떤 풍경일지 궁금하다.

답: 일제강점기 전주전매국에서 근무했던 구미정언(久米靜彦) 증언입니다. “1923년 이리역(현 익산역)에서 성냥갑 같은 경편철도를 타고 흔들리면서 전주역(현 태평동 SK뷰 아파트 앞)에 내렸다. 역전은 한산했고 인력거를 타고 포플러 나무 가로수 밑을 지나 대정정(현 중앙동)까지 가던 시절이었다”

 

문: 아름다운 풍경인데요. 일제가 철도를 놓은 것은 수탈이 목적 아니었나요? 경편철도를 놓은 사연이 있을 것 같다.

답: 1912년 봄, 전라북도 도장관이었던 이두황이 전주 시내의 유지들을 모아 놓고, 철도의 전주 통과를 촉구하면서, 1주당 50엔씩 하는 주식 가입을 종용하는데요. 이때 전주의 유력자들은 이두황의 주장을 이구동성으로 거부, 끝내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두황은 책상을 치며, “그렇다면 전주는 결국 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소리를 질러요.

 

문: 이두황은 어떤 사람인가?

답: 이렇게 보면 선각자 같은데, 도장관은 지금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직위예요. 이두황은 동학교도를 잔혹하게 진압하고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해서,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전라북도의 첫 도장관으로 부임한 사람이었습니다.

 

문: 왜 안 샀을까요? 이두황이란 사람이 미워서 그랬을까요?

답: 당시 이런 철도 부설을 놓고 일본 대기업에서는 채권을 팔고 다녔고 전주의 유지들은 이것에 응하지 않은 것이지, 철도를 반대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이후에 호남선이 관설(官設)로 전주를 제외한 노선 전체가 1914년 개통됩니다.

 

문: 당시 관설이면 총독부에서 만들었다는 말이 되겠네요?

답: 이때 반대했던 유지들이 바로 나와서 “자체적인 철도 설치를 위한 운동비의 기부 모집에 진력을 기울여” 기성회가 1912년 설치되고, 1913년 1월 전주와 이리 간 철도 부설 허가를 얻었고, 1914년 2월 전북철도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공사에 착수, 같은 해 11월 전 구간이 개통됩니다. 경편철도는 당시 국내 최초의 민간 사설 철도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문: 관설이 아니라, 전주 민간의 힘으로 건설했다는 말이 되네요?

답: 그런데, 장사까지 잘 돼요. 일제가 철도를 사서 1927년에 국유화를 해버려요. 1929년에는 현 전주시청 자리로 전주역을 이전하고 1938년 한 해 승차인원은 364,193명이었고, 1939년에는 여수에서 전주를 경유하여 경성으로 가는 직통열차를 1일 1회 운행했습니다.

 

문: 그러면 이 경편철도 구간에 춘포역이 있었군요.

답: 덕진, 동산, 삼례, 대장(춘포), 구 이리(동 이리) 5개 역이 있었는데요. 대지주들이 서로 자신들의 농장을 지나게 하려는 암투를 벌이는데, 이 가운데 절충되어 나온 역들입니다. 동산역은 미쓰비시 재벌 총수인 이와자키의 호를 따서 동산농장이 있었고, 삼례역에는 금융재벌이었고 친일파였던 박기순 농장, 백인기 농장, 춘포에는 대장농장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문: 일제강점기 철도를 놓지 못해 우리 동네가 발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누구의 생각인지, 옳은 견해인지 고민해 봐야 할 문제네요.

답: 그렇죠. 2013년에 옛 만경강 철교가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되었는데, 일제가 경편철도를 사들이면서, 원래 나무다리였는데, 철교로 새로 만들어요. 1927년 기공 당시 이름은 삼례 대천 철교였고. 이때 일반철도로 광궤화(레일간격 762→1,435㎜)하고 1928년에 철교로 준공하는데 일제강점기 호남평야 쌀 수탈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문: 아픈 역사를 간직한 철교네요.

답: 이런 수탈의 철도를 폭파하려는 시도가 1944년에 있었어요. 이리농림학교의 20여 명의 학생들이 김제군 금구면 오산리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고깔봉광산에서 총기와 폭약을 탈취, 폭파를 시도하려다 실패하고 김제경찰서에 구금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사건인데, 학생대표였던 이상운은 해방을 1개월 앞두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문: 많은 분들이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답: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가 되었고, 추모탑이 현재 익산시 마동 전북대학교 특성화 캠퍼스 내에 세워져 있습니다. 해방 후 이리농림학교에서는 목천포 철교 폭파 미수 사건을 연극으로 만들어서, 전주, 이리, 정읍, 김제에서 대환영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월간 김창주,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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