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 16. 22:24ㆍ음악
500년 된 거문고
1979년 완주군 화산면 화월리에서 500년 된 거문고(길이 159cm, 너비 19.3cm)가 발견된다. 6개의 현을 가진 거문고는 기타의 지판에 있는 플랫처럼 괘가 있다. 대나무로 만든 나무 막대기 모양의 술대를 사용해서 연주한다. 소리가 깊고 장중해서 예로부터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 일컬어졌고, 학문과 덕을 쌓은 선비들 사이에서 숭상을 받았다.
누구의 거문고일까? 거문고의 임자를 알리고 글귀가 전자(篆字)체로 음각되어 있었다. 탁영금(濯纓琴)이었다. 당시 전북대학교박물관은 이 거문고가 연산군 때, 무오사화(1498)로 희생된 “탁영 선생의 소장품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고 고증”한다. 직필(直筆)의 사관(史官), 김일손(1464~1498)이 사랑한 거문고가 500년 만에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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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땔감으로 거문고를
무오사화는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사초(史草)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사건이다. 사초는 공식적인 역사편찬의 자료가 되는 기록으로 실록의 편찬이 완료되면 세초(洗草)된다. 세초를 통해 파기되어 비밀에 붙여야 하는 문서를 훈구파가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세조의 왕위찬탈을 풍자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문제가 된 사초였다. 훈구파의 정치공작으로 사림파는 큰 화를 당한다. 김일손은 극형에 처해졌고, 그의 스승인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한다.
직필은 무엇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 또는 그렇게 적은 글을 뜻한다. 꺾이지 않는 직필의 정신을 보여준 그가 사랑한 탁영금 역시 사연을 가지고 있다. 김일손이 마을을 산책하다가 오동나무가 불에 타는 소리를 듣는다. 거문고의 몸체를 형성하는 오동나무가 좋아야 울림이 좋은 것은 당연하다. 그런 좋은 오동나무는 불에 타는 소리도 좋다. 이 나무 타는 소리에 끌려 그가 한 노파의 집 앞에 도착하는데, 노파가 문짝을 뜯어 땔감으로 쓰고 있었다. 족히 백년은 된 문짝을 하나는 이미 땔감이 되었고, 다른 한 짝이 땔감이 되려는 찰나에 꺼낸다. 이 문짝으로 만든 거문고가 바로 탁영금이 된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구한 나무로 직접 거문고를 만들려고 할 정도로 선비들은 거문고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 김일손은 탁영금이라고 음각한 이 거문고를 늘 곁에 두고, 정신 수양의 악기로 마음을 다스렸다. 발견 당시 옻칠된 오동나무에 팽팽하게 6개의 줄이 매여 있었고, 줄을 받쳐주는 괘와 20점의 부품 모두 깨끗이 보존되어 있었다. “보관상태가 좋아 요즘 새로 만든 거문고 보다 소리가 좋았다”는 기록을 보면 놀랍게도 발견 당시 연주가 가능했다. 그가 마음을 수양한 그 거문고는 어떤 울림을 내었을까?
전주의 마음
1964년 오늘 완산동에 있던 청학루를 개수해 전주국악원으로 개원한다. 명인의 증언에 의하면 전주국악원은 한국전쟁 직후에 개원한다. “전주에 6·25사변 직후에 ‘전주국악원’이라고 있었어. 성당 옆에 팔달로가 개설되었지만 그 전엔 골목이었어.(최선, 2008)” “6·25 후에 전동성당 서쪽 골목에 국악원이 있었어요. 그게 누가 만들었냐면 사업하던 전경석 씨라고 허시는 분이 그림 그리고 글 쓰시는 김희순(1886~1968) 씨라고 허는 분허고 돈을 내고 모자라는 돈은 은행에서 빚을 내가지고 그 집을 샀어요.(김유앵, 2008)”
선비의 정신과 전주의 마음은 이렇게 악기의 울림과 음률로 전승되고 있다. [월간 김창주,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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