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실크로드

2020. 8. 24. 18:00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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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바닷길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어디를 갈까 생각했다. 바다의 실크로드, 실크로드의 바닷길이 생각났다. 실크로드는 흔히 동서 교역로로 알려져 있다. 지선과 간선, 가로세로 여러 갈래의 길이 발견되면서, 단순히 중국과 로마를 잇는 것만이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난 길임이 밝혀졌다. 흔히 실크로드라고 하면 크게 초원길, 오아시스길, 바닷길, 이 세 가지 길을 말한다. 바닷길은 초원길과 오아시스길에 비해서 위치상 남쪽에 있어서 남해로라고 불린다. 중국 남해-인도양-아라비아해-홍해-지중해를 포괄하는 길이다. 대략 37,500리(15,000km) 정도 된다. 15세기에는 이 바닷길이 신대륙인 아메리카 대륙까지 이어진다. 초원길과 오아시스 길은 쇠퇴했지만, 바닷길은 서양이 동양으로 세력을 점점 넓혀가던 근대부터 오늘날까지 그 길을 이어오고 있다. 이 바닷길로 비단, 도자기, 향료, 차가 서방으로 반출되어서, 도자기길, 향료길이라고도 한다.

 

언제부터 이런 교역이 시작되었을까?

  항해는 선사시대 원시인들의 활동 흔적에서도 찾을 수 있다.  6~7천 년 전에 중국의 요동반도, 산동반도의 가까운 바다에 있는 크고 작은 섬들과 교류한 것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다. 4천 년 전 상나라 때에는 영토가 해외로 확장되고, 주나라 성왕 때는 일본, 남방의 베트남과 해상 왕래가 있었다. 이집트 고왕국시대에 나일강과 홍해 사이에 운하가 개통되면서 기원전 천 년경에 지중해, 홍해, 아라비아해 사이에 해상교역이 시작된다. ‘문명교류를 위한 바닷길이 언제 개통이 되었는가?’에 대한 정설은 아직 없지만, 기원전 8세기 말경부터 인도 서남부의 항구와 아라비아해를 횡단하고, 페르시아만을 북상해서 바빌론까지 해상교역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 주역이 인도의 드라비다인들로 알려져 있다.

 

드라비다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사전에는 ‘남인도에 주로 거주하면서 드라비다어(語)를 사용하는 부족’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북인도의 아리아족과 더불어 인도 문화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설명도 있다. 문화적으로는 농경생활을 기반으로 모계적 성격이 강한 사회조직, 거석문화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인도유럽계의 언어, 북방 인종형, 반농 반목 생활, 부권적인 사회조직, 자연숭배 등의 특징을 가진 아리아족과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다. 기원전 1세기경에 인도 서북쪽에서 아리아족이 드라비다족이 세운 인더스 문명을 파괴하면서 침입해 오자, 이들은 남인도로 밀려 내려오게 된다. 실제로 북서부 인도인들과는 유전적으로 확연히 다르다. 이 드라비다어와 한국어가 비슷하다고 연구를 한 학자가 있다.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가 1905년에 한국어와 드리비다어의 비교 연구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한국어와 드라비다어의 비교연구
국내도서
저자 : HOMER B.HULBERT / 김정우역
출판 : 경남대학교출판부 1998.02.28
상세보기

 

헐버트는 ?

  헐버트는 1886년에 우리나라에 왔다. 1896년에 처음으로 아리랑으로 오선보로 채보하고, 여러 재미있는 기록을 남겼다. 대표적인 표현이 ‘아리랑은 조선 사람들에게 쌀이다.’라는 말이다. 드라비디어와 우리말을 비교한 책의 서문을 인용하면, “한국에 정착한 선주민들이 최소한 일부 지역이라도 남방에서부터 이주해왔음을 입증해주는 누적된 증거의 고리를 하나하나 엮어가고 있다. 앞으로 아시아와 태평양 제도에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언어, 즉 아리안족이 역사의 전면에 출현하기 이전의 언어들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질 날이 머지않아 꼭 올 것으로 확신한다”라고 쓰고 있다. 마치 어드벤처 게임에 나오는 대사 같다. 서구가 전 세계를 식민지화하며, 이런 상상을 했다는 것이 부러울 때도 있다. 실제로 영향을 받았는지는 언어학자의 연구가 더 필요할 것 같다. 이렇게 언어뿐만 아니라, 음악도 우리나라와 인도에만 존재하는 유사한 특징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2020/08/16 - [이야기] - 아리랑과 허득선

인도 사람들이 기원전부터 해상활동을 했다는 기록과 유적은?

  기원전 3천 년경의 모헨조다로 유적, 아잔타 석굴에 선박에 관한 벽화와 유적이 남아있다. 아리아족의 고전인 리그베다에 해상 원정과 상인들의 해상활동이 묘사되어 있다. 불경에도 여러 기사가 남아있다. 구약성서열왕기를 보면, 기원전 10세기 솔로몬 왕이 홍해 연안인 에지온-게베르에서 배를 만들자, 히람 왕이 바닷일에 익숙한 자기의 종들과 솔로몬의 종을 오피르에 파견해서, 황금 420 탤런트(16톤)를 가져온다. 항해에 3년이 걸렸다. 오피르는 산스크리트어로 남인도를 지칭한다. 기원전 10세기경에 이미 남인도와 홍해 사이에 해로가 개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불타의 전생 이야기인 자타카(jātaka)에는 인도 상인들이 공작새를 배에 실어서 바베라국까지 운반한 기록이 있다. 바베라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론을 말한다.

 

중국의 기원전 해상활동은?

  하나만 소개하자면 한서 지리지에 “베트남(일남), 수마트라(도원국), 미얀마(읍로물국), 남인도의 해안인 칸치푸람(황지국)까지 11개월간 항해" 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명주, 벽(둥근 옥), 유리, 기석이물을 구입하고, 황금과 각종 비단을 가지고 간다. 교역의 이득을 위해서, 표독하게 살인을 하기도 하고, 폭풍우를 만나 익사하기 일쑤고, 몇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이곳 남인도 칸치푸람에서 다시 8개월간 항해해서 말레이 반도, 다시 2개월간 항해해서 일남(베트남)에 도착을 한다. 황지국 남쪽에 기정불국(스리랑카)이 있다.(축약하여 인용함.)”는 기록이 있다. 당시는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했다. 송나라 때는 70일 밖에 걸리지 않은 일남과 인도의 동남해안을 11개월에 걸쳐 갔다. 이때 중국 상인들이 대진, 즉 로마까지 진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중국 정크선

 

어떤 물건을 로마까지 팔러 갔을까?

  로마시대 역사가 플로루스가 기원후 1세기 말에 쓴 역사서를 보면, 기원전 30년경에 중국인이 인도 사신과 함께 로마 궁전을 방문해 코끼리와 보석, 진주 등을 바쳤다. 로마까지 오는데 4년이란 긴 시간을 보냈고, 피부색으로 보아 분명히 별천지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기원전의 바닷길을 이어 보면, 중국 광주(광등성 광저우)-일남-말레이 반도-수마트라 서북해안-말라카 해협-미얀마 서남해안-인도 황지국-인도의 소비라-인더스강 하구-페르시아만-유프라테스강 하구-바빌론으로 이어진다. 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못하고 길 이야기만 했다. 기원후의 바닷길은 다음 편에서 쓰겠다.

 

참고문헌

실크로드 사전
국내도서
저자 : 정수일
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2013.10.31
상세보기

거인의 어깨 위에서 읽은 것을 재 정리한 것입니다. 7~8년 전에 정리한 글로 참고문헌 목록을 잊어버렸습니다. 인용 기호가 제대로 표기되지 않았거나, 참고문헌 목록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것은 모두 제 불찰입니다. 제가 잘 기록하지 못한 부분을 알려주시면 감사한 마음으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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