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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아리랑과 허득선

by 월간 김창주 2020.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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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잡가의 명창 허득선

  허득선은 조선시대 고종 임금때 활동한 음악가다.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평양의 경림동 출생이다. 앞을 못보는 어머니를 위해 어릴때부터 노래와 우스갯 소리를 시작했다. 얼마나 가창력이 뛰어났는지, 고종이 총순이란 벼슬을 하사했다.

  총순이란 어떤 벼슬이었을까? 1882년 고종 앞에서 기밀경 등의 서도가무를 열연해서 당시 민비, 명성황후의 주선으로 총순 벼슬을 하사 받았다고 하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총순이란 벼슬은 1895년에 생겼다는 점이다. 1895년에 근대적인 경찰제도를 도입하면서, 포도청 대신에 경무청이 만들어진다. 이때 총순은 경찰의 직제 중에 하나로 말단의 순검 위에 위치해 있다. 초급간부로 추측을 할 수 있다. 당시에 경무청은 지금의 경찰 업무를 포함해서 다양한 일들을 했다.

  순검들의 업무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① 백성들에게 방해되는 일을 방지하고 보호하는 일, ② 건강을 보호하는 일, ③ 방탕하고 음란한 짓을 금지하는 일, ④ 국법을 위반하려는 사람을 은밀히 수색 체포하는 일 등이다. 전염병 예방, 소독, 검역, 종두, 음식물, 의약 같이 위생에 관한 일, 외국인 거류 단속, 무허가 벌목 단속 외에 호구조사 같은 일도 담당을 했다.

  정말로 허득선이 총순이란 벼슬을 받았을까? 이 지점이 의문스러워서 여러 책을 뒤진 것인데, 국내에서 나온 관련 책들은 거의 다 보았다. 국내 연구의 출처는 북한에서 나온 책을 참고 해서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도서관 북한자료센터에 그 출처인 책들을 소장하고 있어서, 복사신청을 했지만, 이쪽 자료는 복사 서비스를 안한다고 해서, 서울에 한번 올라가서 직접 봐야 할것 같다. 거짓은 아니라고 판단하는데, 당시에 이런 산타령패들이 궁궐에서 공연한 기록과 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황현의 『매천야록』이나 다른 기록에도 꽤 남아있다. 문제는 벼슬을 받은 해가 1882년인지 1895년인지다. 1882년에 총선에 상응하는 벼슬을 받았는데, 후대에 총순이란 말로 대치된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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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잡가의 명창 허득선은 어떤 공연을 했길래 벼슬까지 받았을까?

  허득선의 귀가 유별나게 컸다. 특기가 큰바퀴가 아래위로 가락에 맞게 움직임에 따라서 머리에 쓴 망건이 아래위로 오르락내리락 했는데, 이게 꽤 재미있는 장면이었던가 보다. 즉흥적 가락과 임기웅변을 잘했다. 즉흥적으로 연기한 곱새춤에 고종 임금이 만족해서, 술을 하사하고, 기밀경 공연으로 벼슬까지 내린다. 기밀경은 현재는 단절이 되었다. 서도 무속음악으로 알려져 있다. 죽은 망자를 천도하는 내용인데, 조선말에 서도 소리꾼들이 소리판에서 불러 흥을 돋구었다.

 

왜 이렇게 궁궐에 소리꾼들을 불러서 공연을 했을까?

  기록이 많지 않아서,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몇 가지로 나눠서 추측할 수 있다. 『명종실록』 16년(1561)에 이런 기록이 있다.  “임금은 궁궐에 있기에 정치의 잘잘못과 풍속의 미악을 들을 수 없으니, 비록 광대의 말이라도 혹 풍자하는 뜻이 있으면 채용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이것이 나례를 행하는 이유이다”라는 기록이다. 나례는 가면을 쓰고 배우 한두 명이 한 연극을 화극이라고 한다. 『중종실록』에는 나례 때 정재인, 무용수로 하여금 민간의 고역과 구황의 절차, 관공서에서 빚이 있어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거두고 백성들이 도망 다니는 것 등의 모양을 해 보이게 하라라는 기록도 있다. 당시의 현실을 담아 공연하게 했다. 현대의 블랙코미디가 생각난다. 조선말에는 외세의 침략도 있었고, 나라가 혼란하던 시절이라, 이런 공연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기록도 있다.

  황현의 『매천야록』을 보면 단편들이 남아있다. "남쪽의 급변이 일어나 날로 급하니 궁궐 공사를 서둘렀다." 남쪽의 급변이 동학농민혁명을 말한다. "광대를 불러 새로운 소리의 염곡을 연주케 하였는데, 이를 아리랑 타령이라 한다. 민영주가 원임각신으로 광대무리를 통솔하여 아리랑을 관장하고, 그 정교하고 서투름을 평가하여 상의원의 금은을 상으로 내렸다.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가 궁궐을 난입한 때에 이르러 그쳤다"고 기록을 남겼다.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의 기록에서는 또 다른 이면을 읽을 수 있다.

  헐버트는 1886년에 조선에 온 언어학자이자, 선교사였다. 고종에게 헤이그 밀사를 건의하고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 운동에 협력해서 195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1896년에 헐버트 역시 아리랑에 대해 기록을 하는데, 잘알려진 이야기가 한국인에게 아리랑은 쌀이다라는 표현이다. 『매천야록』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아리랑이 3,520일간 밤마다 노래되었다는 것인데, 3,520일이란 말을 세어보면. 1883년을 가르키고 있다. 또 헐버트가 당시에 아리랑을 악보로 남겨놨는데, 이게 서도소리의 시김새 특징이 있다. 당시 아리랑이 서도소리를 하는 산타령패에 의해 연주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Homer Bezaleel Hulbert(1863~1949)

그렇다면 아리랑이 허득선과 관련이 있을까?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허득선이 1882년에 총순이란 벼슬을 받았다는 점, 그리고 당시 서울의 경강을 중심으로 선소리 산타령이 유행했다는 점등 보아서 정황만 있을 뿐이다. 헐버트가 알 듯 모를 듯 기록해 놓은 것이 재미있다. 허득선의 소리는 이후에 김관준으로 이어지는데, 이 분이 현재는 단절된 「안중근의사가」를 만들고, 1920년 1월 8일자 『독립신문』을 보면, 상해민단의 신년축하회에서, "우리 국민의 단정코 실행할 육대사 연설 후에 아리랑 타령"을 부르는데, 동시대에 최영년은 "아리랑을 말세의 소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왜 밤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아리랑을 연주케 했을까? 

백성을 교화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것이라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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