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28. 10:31ㆍ문화
지정환 신부님(1931~2019)은 국내에서 처음 치즈를 만든 분입니다. 피자에 치즈가 없다면 어떤 맛일까요? 누구나 한 번쯤은 드셔 보셨을 치즈인데요. 1970년대 초에 지정환 신부님이 치즈로 사업자등록증 내려고 농림부 차관을 만나러 가는데요. “대한민국 사람은 100년이 지나도 치즈를 먹을 일이 없으니, 괜한 농민들 들쑤시지 마시고. 성당에 가서 기도나 하십시오.”란 냉대를 받습니다.
고동희 박선영이 저술한 『치즈로 만든 무지개 지정환 신부의 아름다운 도전』의 머리말에 지정환 신부님이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함축적으로 쓰여 있습니다.
가난으로 고통받는 농민들을 위해 치즈를 만들었고, 독재로 고통받는 민중들을 위해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으며, 소외로 고통받는 장애인들을 위해 그들을 세상 속으로 끌어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단호히 말했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다만 함께 했을 뿐입니다.”
문: 외국에서 오신 신부님으로 알고 있는데 언제 오셨나요?
답: 1959년 12월 8일 부산항에 도착하셨는데요. 신부님의 본명은 디디에 서스 테 벤스입니다. 디디에와 발음이 가까운 지를 성으로 해서 지정환이란 이름을 쓰셨습니다. 1931년 12월 5일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태어나셨어요. 어린 시절 꿈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우편배달부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독일의 침공을 받아, 전쟁의 참상을 아는 분이셨습니다. 1950년 6월에 극장에서 한국의 전쟁에 대한 뉴스를 처음 접했고, 같은 해 6월 28일에 루뱅대학교에 입학합니다.
1960년 전주 전동성당 보좌신부, 1961년 부안성당에 부임하셨습니다. 부안에서 성당 살림을 위해 원조받은 밀가루를 모두 땅을 개간하는 데 사용합니다. 3년간 주민들과 함께 100 정보의 땅을 개간합니다. 1 정보가 3,000평인데요. 신부님이 병 치료차 벨기에에 6개월간 있는 사이에 가난 때문에 힘들어 한 주민들이 개간한 땅을 다 팔고 떠나버립니다. 가난 때문에 하루하루가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이 농사를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어요. 얼마나 실망을 하셨으면, 이때 한국인의 삶에는 관심을 두지 않겠다. 종교 활동만 하겠다고 다짐도 하셨다고 해요.
문: 임실에 가신 것은 언제인가요?
답: 1964년 임실로 발령이 났어요. 가난한 임실을 보고 소보다 값이 싸고, 임실의 지형에 맞는 산양을 선택해서, 청년들과 산양을 키워 산양유를 판매합니다. 산양이 점점 늘어나서, 1966년 산양협동조합을 설립하고요. 당시에는 우유를 먹는 것도 흔치 않았고, 환자들이 산양유를 약으로 알고 아침저녁으로 먹었어요. 산양유를 판매하지만, 수요가 많지 않아서, 남게 되는데요. 이것으로 치즈를 만들기로 계획을 세워요. 연유나 분유를 만들 생각도 했지만, 엄청난 시설비용 때문에 그나마 생각한 것이 치즈였습니다.
문: 치즈 종류도 많은데, 어떤 치즈가 만들어지나요?
답: 1966년 첫 치즈 만들기에 도전하지만 지정환 신부님 역시 만드는 방법은 몰랐어요. 변변한 도구도 없어서, 모기장, 비누 틀, 약탕기 등 생활 주변의 도구를 활용하지만, 번번이 실패합니다. 결국, 벨기에 있는 부모님에게 2,000달러를 원조받아요. 1968년 달러당 환율이 270원, 자장면 한 그릇이 50원이었습니다. 이 돈으로 치즈공장을 세웠지만, 제대로된 냉장시설도 없어서 계속 실패를 합니다. 막걸리 만들 때 사용하던 누룩도 사용을 하지만, 실패합니다. 프랑스 낙농 학교에 치즈 기술자를 요청해서 국내에 오는데요. 치즈 공장에서 한 달 근무한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였어요. 그 기술자가 가져온 치즈에 관한 책 한 권으로 계속 시도하지만 실패합니다. 신부님이 직접 치즈를 배우기 위해 3개월간 프랑스와 벨기에로 떠나는데요. 이때 부모님에 편지를 써요. “기왕 미쳤으니, 끝까지 미치겠습니다.” 교육을 받던 3개월 동안 또다시 조합원 11명 중 10명이 모두 산양을 팔고 떠나버립니다. 사실 하루하루가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라, 조합원들이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고 해요.
문: 지정환 신부님은 치즈 만드는 비법을 가지고 한국에 돌아오시나요?
답: 이렇게 돌아와서 지정환 신부님은 치즈 생산에 성공합니다. 앞에서 소개한 책에 성공한 비법이 간략하게 적혀 있는데요. 꼭 제가 비법을 알아낸 기분이었습니다. “산양유를 70도에서 15초 동안 가열 살균 후 유산균을 넣고 발효. 발효된 산양유에 송아지의 위에서 추출한 소화 효소인 레닌을 넣어 응고. 응고시켜 만든 커드(curd) 속의 수분을 제거한 후 모양을 잡아 숙성 건조하면 치즈가 됨.” 이 치즈가 프랑스식의 포르살류(port salut) 치즈입니다. 이후 계속 성공을 하게 됩니다. 1970년에는 체더치즈 생산에 성공을 합니다. 마을 이름 성가리를 따서 성가치즈라고 이름 지어서, 서울의 외국인 상점과 조선호텔에 납품을 성사시켜요. 이후에 1972년부터 우유로 치즈 생산을 시작합니다. 이때 임실치즈협동조합이 탄생해다. 신부님은 “첫 부임지인 부안에서의 실패 후 주민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역량을 기르도록 하는 일이 중요함을 깨닫고 지속적인 교육을 실시”합니다. 1972년 모차렐라 치즈 생산에 성공하면서 판로를 계속 개척해요.
문: 1970년대에 민주화운동에도 참여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답: 1975년에 민주화운동에 뛰어드는데, 지정환 신부님은 본격적인 민주화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벨기에 대사를 찾아가셔요. “제가 앞으로 한국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거나 구속이 되더라도 절대 대사관 차원에서 접근하지 마십시오. 저는 벨기에인이 아니라 한국 신부로서 활동하는 겁니다.” 민주화 운동을 하시면서 이런 말을 외치셨어요. 자신의 이름을 삼행시로 만들었는데요. “나는 정의가 환히 빛날 때까지 지랄하는 지정환이다.” 1974년 있었던 인혁당 사건의 부당함을 알리는 인쇄물을 전주에서 인쇄해서, 서울 명동성당에서 배포하셨어요. 이후에 공안당국에서 계속 감시를 하고 치즈공장까지 감시를 하니까, 주민들이 일을 할 수 없게 돼요. 이때 지정환 신부님은 경찰서에 전화를 합니다. “앞으로 어디를 가든 내가 스스로 보고를 할 테니까, 치즈공장에는 얼씬도 하지 마라.” 그 이후로 어김없이 약속을 지켰다고 합니다. 이렇게요. “나 지금 데모하러 서울 갑니다.”
문: 다시 치즈 이야기로 돌아와서요. 치즈 제조 성공 후가 궁금하다.
답: 대기업 치즈와 경쟁을 하게 되는데요.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로 치즈시장이 개방이 돼요. 1997년 IMF가 있었고요. 어려운 시절을 겪고 2001년부터 다양한 치즈를 개발하며 안정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후에는 상표권을 두고 분란이 있었지만, 치즈 하면 누구나 아무 의심 없이 임실을 떠올리죠. 여러 사건들을 보면 요즘 한창 진행 중인 마을 만들기 교본에 나올 법한 사례입니다. 앞에서 지정환 신부님이 “첫 부임지인 부안에서의 실패 후 주민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역량을 기르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마을에 들어가 사업을 하다 보면 사업의 지속성을 위해 주민의 자발성이 가장 중요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자발성을 끌어내는 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치즈 생산 성공과 민주화 운동 이후에는 장애인들의 자립과 재활을 위한 활동을 하시고 장학재단을 만드셨습니다.
끊임없이 던지는 비난의 말이 있었어요. “신부면 성당에서 기도나 해라!” 이런 이야기는 성직자가 아닌 일반인도 많이 듣습니다. 사회참여에 고민하면, 네 할 일이나 잘해라는 일갈을 받을 때도 있는데요. 비난 속에서도 지정환 신부님은 주민들과 함께 기적을 만드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애초에 산양 두 마리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지정환 신부와 임실 주민들이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의지로 빚어낸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 본 글은 『치즈로 만든 무지개 지정환 신부의 아름다운 도전』을 참고하였습니다. 보다 자세하고 정확한 내용을 알고 싶은 분은 아래 책을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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