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23. 15:57ㆍ考愛
이별 뒤의 침묵은 둘이다. 나의 침묵과 그 사람의 침묵. 나의 침묵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포화 상태다. 나는 그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전화를 걸고 싶고, 문자를 보내고 싶고, 메일을 전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 말들에게 스스로 금기를 내린다. 안 돼, 그러면 안 돼, 그건 너의 약속을 배반하는 거야. 그건 그 사람을 더 아프게 할 뿐이야...
하지만 또 하나의 침묵이 있다. 그건 그 사람의 침묵이다. 그 사람이 닫아버린 침묵의 문 앞에서 나는 나의 침묵을 부둥켜안고 나날이 서성인다. 혹시 전화가 오지 않을까. 문자가 날아들지 않을까... 하지만 나의 침묵이 열리지 않는 것처럼 그 사람의 침묵도 열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단 하나 허락된 말하기를 배운다. 그건 모놀로그다. 잘 지내나요. 아무 일 없나요. 아프지는 않나요. 내가 보고 싶지 않나요. 난 너무 보고 싶어요... 집에서, 차 안에서. 거리에서. 카페에서. 나는 자주 그 사람의 침묵을 향해 혼자 중얼거린다.
한트케의 왼손잡이 여인 마리안느처럼: “요즈음 사람들이 그러더라. 마리안느. 거리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네 모습을 보았다고, 네가 서서히 미쳐가는 것 같다고...” 김진영, 「침묵」, 『이별의 푸가』, 한겨레출판, 2019, 41~42쪽
사랑은 끝나도, 그 사람은 오지 않아도, 이별의 계절은 다시 온다.
그와 그
『이별의 푸가』의 부제는 ‘철학자 김진영의 이별 일기’이다. 책을 다 읽고 ‘글쓴이는 어떤 사람일까, 그의 그는 누구일까?’ 궁금해졌는데, 저자 김진영(1952~2018)은 타계했다. 그와 그 사이에 이 책이 있다. 한 번에 읽기는 쉽지만, 여러 번 읽게 만드는 책이다.
책은 양장본이다. 책이 이쁘다. 책을 펼치면 활자도 예쁘다. 읽기도 전에 글씨체에 반했다. 정갈하게 정돈된 느낌이다. 이와 달리 반전이 있다. 정돈되었지만 지독한 이별을 마주하게 된다. 아프게 잊었던 사람이 있다면 읽지 않는 게 좋다. 마음속에 매복해 있던 이별의 기습을 무방비 상태로 받을 수 있다.
또 하나 마음에 들었던 것은 표지 디자인이다. 악보의 오선보처럼 수평선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곡선이 그려져 있다. 선으로 만든 디자인 역시 단정해 보이지만, 때로는 따스한 봄날 같고, 여름의 폭풍과 가을비와 겨울바람을 담고 있는 사랑과 이별의 노래 같다.
만남과 이별
처음 그와 그는 각자의 공간과 시간 속에 서있다, 서로 다른 수평선 위에서. 그가 한 음정을 낸다. 음정 하나가 오선보를 타고 흘러나온다. 떠내려 온 그 음정을 이어 그도 한 음정의 소리를 낸다. 허우적 대던 음정과 음정이 서로를 이어 첫 선율을 만들어낸다.
누가 먼저였는지 알 수 없다. 아니 누가 먼저는 없었다. 처음부터 둘은 서로를 껴 안기 위해 수평선의 수면 위를 함께 떠내려 오고 있었다. 둘은 만나 오선보 위에 봄여름 가을 겨울의 선율을 만들어 간다.
어느 날 함께 만들던 노래는 끝이 난다. 선율이 끝나는 자리에서 악보에 쓰이지 않은 노래가 시작한다. 이미 만들어진 선율을 되새기며, 그때 함께 만들지 못한 선율을 잇는다. 음악을 듣는 것은 악보에 담기지 않은 음악을 듣는 과정이다.
사랑은 이별 후에 다시 쓰인다. 이별 후에도 그와 그는 함께 한다. 가보지 않은 곳에 함께 여행을 하며, 같이 술을 마시고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찻집에서 서로 기대어 키스를 한다. 이별 후에 그와 그는 작은 시간도 최선을 다해 사랑을 하고 눈을 흘기며 다툰다.
그러다 손목시계 째깍 거리는 소리에 깨어난다. 손목시계의 째깍 소리는 메트로놈의 똑딱 소리처럼 일상의 리듬 속으로 그를 잡아 시간 속으로 이끈다. 이제 그와 그는 더 가까워질 수도 멀어질 수도 없는 평행선 위를 떠내려 가고 있다. 그의 심장 소리를 듣고 싶다.
그러나 두 번 다시 해후할 수 없는 이별도 있다. 그때 추억은 매복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우리를 습격한다. 어느 거리, 어느 장소, 어느 소리. 어느 물건 속에 숨어 있다가 급습한다. 그리고 육체의 어느 한 곳에 적중한다. 우리는 고통으로 허리를 굽히고 쓰러진다. 김진영, 「통점」, 『이별의 푸가』, 한겨레출판, 2019,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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