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5. 15:25ㆍ考愛
JTBC 16부작 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유보라 극본, 임현욱 연출)은 같은 제목의 정소현의 단편 소설이 원작이다.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다면, 원작 소설도 읽어 보면 좋다. 드라마가 주는 영상미와 여러 에피소드도 대단하지만, 원작이 전해주는 강렬함도 대단하다. 드라마를 중심으로 등장인물, 용서와 죄책감, 문화자본과 신데렐라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작품을 읽어 보았다.
이야기의 모티브
부잣집 며느리로 변신에 성공한 정희주가 가난한 화가 지망생 구해원에게 미술 레슨을 받다가, 구해원과 결혼을 약속한 화가 지망생 서우재와 바람이 난다. 몇 년 후 서우재와의 과거를 모두 단절하고 싶은 정희주에게 구해원이 찾아온다.
등장인물
정희주
주인공 정희주는 빚에 쫓기면 가난하게 산다. 직업은 간병인이고, 환자를 대상으로 부업으로 화이트 핸즈를 한다. 가난을 탈출할 기회는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병원 이사장 아들과 결혼에 성공해 가난에서 탈출한다.
구해원
화가 지망생인 구해원 역시 가난하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독일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정희주는 구해원의 사랑과 창의력 모두를 빼앗아 가고, 구해원은 복수를 시작한다.
서우재
촉망받는 화가 지망생 서우재는 구해원의 애인이다. 서우재는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정희주와 도피한다. 후에 정희주에게 철저하게 버림받지만,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미친 사랑을 한다.
안현성
안현성은 오쟁이를 진 남자다. 아내 정희주와 서우재의 불륜 사실을 알고 있지만, 침묵한다. 침묵 속에서 변함없는 사랑은 주는 그는 정희주에게 공포다.
키워드
용서와 죄책감
사람은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드라마 내내 등장인물들 사이에서는 용서를 바라거나,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란다. 내 잘못을 상대가 용서했다면 나는 용서받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상대가 나를 용서해도 스스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용서받지 못한다. 정희주는 용서받고 죄책감에서 해방되었을까? 그렇다.
호수 속에 슬라이브 수도원에 있던 은종 하나가 빠졌는데,
지금도 맑고 순수한 영원한테는 그 호수 속의 종소리가 들린데
죽은 서우재의 목소리가 들리는 환청에 시달리며, 정희주가 종소리가 들리겠어라고 혼잣말하는 장면은 섬뜩했다. 자신을 위해 젊은 남녀의 모든 것을 빼앗았던 정희주는 용서받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스로 만든 감옥 속으로 들어간다. 마지막 장면에서 정희주는 호수의 종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정희주는 스스로를 용서하고 죄책감에서 벗어났다.
문화자본과 신데렐라
정희주의 눈에 구해원은 가난해도 빛나는 인물로 보인다. 정희주는 신데렐라고 구해원은 반(反) 신데렐라다.
부잣집 며느리가 되어 지독한 가난에서 탈출했지만, 고졸 출신으로 괄시를 받는 정희주가 가진 문화자본은 없다. 부잣집 며느리가 되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가정부 역할이다. 정희주는 신데렐라다. 그것도 두 번의 업그레이드를 한 신데렐라다. 처음 업그레이는 가난에서 벗어난 것이고, 두 번째 업그레이드는 문화자본을 획득해 작가로 성장하며, 진정한 신분 상승에 성공한다. 동화에서 요술로 신데렐라가 된 것처럼 정희주는 요행수로 신데렐라가 되는 데 성공하고,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에 반해 구해원은 반(反) 신데렐라다. 정희주의 눈에 구해원이 가난해도 빛이 나 보인 이유는 문화자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구해원은 돈이 없어도 고단한 가난 따위는 스스로 가진 재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희주는 구해원에게 미술 레슨을 받고, 구해원의 작품 구상을 도용해 화가로 데뷔하는 데 성공한다. 정희주는 이로써 자신이 갖지 못한 문화자본을 획득하게 된다.
또 하나 구해원이 가난해도 빛나 보인 이유는 구해원은 자신의 젊은 성을 돈으로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꿋꿋하게 붓을 들어 성공하려 했다. 반면에 정희주는 화이트 핸즈를 하며, 자신의 운을 바꿔줄 결혼 상대를 찾는다. 정희주는 병원 이사장 아들과 결혼에 성공했고, 함께 화이트 핸즈를 했던 친구는 자신이 간병한 노인의 낚시터를 유산으로 상속받는다. 구해원은 고단한 삶을 살아도 자신이 사랑한 남자와 인생을 헤쳐 나가려고 한다. 정희주는 구해원의 사랑도 빼앗는다.
정희주에게 도둑질당하고 서우재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휩싸여, 구해원은 자신이 자신을 스스로 버렸다. 정희주는 구해원의 빛나는 모든 것을 빼앗았을까? 그렇지 않다. 사람과 사랑은 오고 가도 구해원이 구축한 문화자본은 그대로다. 구해원이 가진 문화자본은 미술이다. 드라마 말미에서 구해원은 개인전을 개최했다. 다만, 구해원이 잃은 것은 분노가 삼켜버린 시간이다.
“실연과 파산은 슬픈 일이지만 두려운 일은 아니다. 당신은 여전히 살아 있고, 당신의 육신과 영혼은 건재하다. 생각해 보라. 애인이 떠나고 재산이 사라졌다면 애초 그건 당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원래 당신 것이 아니었으므로 잃어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멈추어 서서 가만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정말로 당신 것이었다면 떠나지도 않고 잃어버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서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 건 바로 당신 자신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세상의 득실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페이융 저, 허유영 역, 『법화경 마음공부』, 유노북스, 2019, 109~110쪽
놓지 못하는 사람들
서우재는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유부녀 정희주와 사랑을 한다. 서우재는 후에 정희주에게 버림받지만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미친 사랑을 한다. 정희주의 남편 역시 마찬가지다. 아내의 외도를 알고 있지만, 변함없는 사랑을 아내에게 보낸다. 정희주는 남편이 자신의 외도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두려워하고, 남편의 이런 태도에 소름 끼쳐한다.
두 남자의 사랑은 정희주에 대한 사랑일까? 정희주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두 남자는 그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이 구축한 세계와 규칙이 파괴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드라마 극 중 인물들은 모두 본래 제 것이 아니었음에도 잡은 것을 놓지 못하며 괴로워한다. 그것은 쉽게 놓을 수 없는 사랑과 자본, 용서, 죄책감이다. 드라마에서 안현성과 서우재는 놓지 못해 패망하고, 정희주와 구해원은 잡은 것을 놓으며, 용서받는다.
결혼은 사기, 불륜은 구원?
결혼한 대부분의 여성은 현타(현실 자각 타임)를 맞은 신데렐라다. 그녀의 웨딩드레스가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현타는 후에 더 크게 오고, 결혼은 곧 사기라는 후회가 밀려온다. 여성은 결혼 후 진정한 신데렐라가 된다. 왜 그럴까?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라는 동요의 가사를 바꿔보자. 신데렐라는 어려서가 아니라, 결혼한 후 부모님을 잃는다. 엄마가 밥해주고, 청소해주고, 빨래해주던 일을 이제 본인이 해야 하며, 계모와 언니가 아니라,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구박 속에서 눈치를 보며 살게 된다. 유리구두를 들고 온 왕자라고 생각했던, 남편은 왕자가 아니었다.
유리구두가 깨지지 않게 고이 모시고 살 것처럼 청혼하지만, 유리구두는 말 그대로 한 걸음만 걸어도 깨지는 구두다. 유리구두를 받았다면, 유리 밭 길도 받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감내하는 것이 결혼이고, 남녀의 사랑이다.
동화 속 신데렐라는 자정이 되기 전에 집에 가야 하지만, 왕자는 신데렐라를 붙잡으려 뒤쫓아간다. 정해진 시간에 집에 돌아가야 하는 것은 마법이 풀리기 때문이 아니다. 불륜을 숨기기 위한 골든 타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신데렐라는 불륜 동화였다. 드라마와 영화 속 불륜은 신데렐라 이야기의 변주다. 그 많은 드라마들이 불륜을 소재로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혼에 대한 자각과 탈출에 대한 환상을 담은 이야기가 신데렐라다. 청년 세대들이 결혼을 포기하는 이유는 결혼식이 앞으로 올 수많은 고난에 대한 사기극이란 것을 자각했기 때문은 아닐까?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꿈꾸는 5월의 신부는 사회 유지를 위한 교육의 산물이다. 결혼이 진정 낭만적이고 행복하다면, 결혼식이 그렇게 화려할 필요가 있을까? 결혼식은 환상이고 결혼은 현실이다. 결혼식은 고단한 결혼 생활을 감추고 환상을 심어주기 위한 일종의 사기극이다. 이런 이유로 결혼 후에도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을 꿈꾸고, 그런 사람을 다시 만나길 소망하고, 가슴 설레는 연애를 상상하는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결혼이 사기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불륜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사회가 합의한 이야기의 끝은 모두 이렇게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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