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10. 06:05ㆍ문화
1909년 10월 26일 아침 9시 30분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합니다.
문: 의사와 열사의 차이를 전에 들었는데, 가물가물해요.
답: 의사는 무력을 사용해 저항, 열사는 유관순 열사처럼 맨몸으로 저항하신 분을 뜻합니다.
문: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암살』도 생각이 나네요.
답: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은 암살이라고 표현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암살은 몰래 사람을 죽인다는 뜻인데요. 안중근 의사는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전쟁 중에 이토를 저격하고 자진해서 체포된 전쟁포로다라고 말해요. 일개 살인범이나 테러리스트가 아니다는 뜻입니다.
문: 자!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 어떤 의의가 있나요?
답: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은 한국의 자주독립, 동양의 평화, 세계의 평화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암살이 아니라 제국주의 침략에 항거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데요. 반면에 당시 세계 언론의 보도는 강대국의 논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문: 지금 우리의 평가와는 다르다는 말씀인데 어땠을지 궁금하네요.
답: 참고로 의거 현장에서 우리말로 “대한독립 만세” 대신에 러시아말로 “우라 까레아(한국 만세)”를 외치는데, 국제사회에 일본의 침략 만행과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정책의 부당성을 고발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문: 당시 우리나라 상황은 어땠나요?
답: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일본의 보호를 원한다는 식으로 국제사회에 선전하고 있었어요. 안중근 의사의 의거 역시 제국주의 열강의 입맛에 따라 각기 다른 관점으로 언론에서 보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 사건이 난 하얼빈 현지 신문의 반응은 어땠나?
답: 『민우일보』는 93회에 걸쳐 기사를 게재하는데요. “일본이 조선을 대하는 것은 영국이 인도를 대하는 것보다. 유럽인이 유태인을 대하는 것보다 심하다.”, 『신주일보』는 “일본이 조선을 대하는 것보다 심한 강권은 없다. 그런데 우방의 원로가 죽은 것이라, 청일 국교상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문: 일본을 비판하면서도 일본을 배려하는 듯한 모습이 보이네요.
답: 『신보(申報)』는 “이토가 죽은 것을 각국 사람은 애석해했을 것이나, 한국인들은 다르게 느꼈을 것이다. 조선인이 이토를 표적으로 삼은 것은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다. 이토가 말머리를 만주로 향했는데, 이것이 행정상의 의미가 없다고 자칭하지만 누가 믿겠는가?”
문: 행정상의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누가 믿겠는가? 이게 무슨 뜻인가?
답: 『민우일보』의 논평을 보면요. “이토가 이번에 요동에 온 의미는 북경으로 진출해 청국의 재정 고문이 되기를 바라는 데 있다. 일본이 조선의 재정을 감독해 국가행정의 기능을 장악, 조선은 마침내 오늘날의 처지가 되었다. 이토가 죽었더라도 일본의 정책은 바뀌지 않으며, 만주까지 권력을 확장하려 한다는 소문이 있다.”
문: 만주까지 지배하려던 속셈이 있었다는 이야기네요.
답: 『시사보』의 논평에는 “조선에 이토가 통감이 된 후 외교, 재정권을 장악하고 (고종) 황제를 퇴위시키고, 일본인을 사법, 행정관리로 임명했다. 여러 나라는 팔짱을 끼고 조선의 멸망을 관망했다. 한국을 멸망시킨 것은 이토가 아니라 조선 자신이다. 만주의 화란은 이토 때문에 야기된 것이 아니라 청국 자신이다”
문: 깨어나라! 각성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답: 그렇죠. 중국은 동병상련의 입장에서 보도를 한 측면이 있고, 당시에는 중국의 문인들이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소재로 소설, 시, 산문, 희곡을 창작하는 모습을 보이는데요. 안중근 의사도 “나는 하얼빈에서 총 한 방으로 만인이 보는 앞에서 늙은 도적 이토의 죄악을 성토하여 동양 청년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라고 법정에 말합니다.
문: 개인의 명예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인데, 다른 나라의 평가는 어땠나?
답: 홍콩은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죠. 『세계공익보』는 “이토는 평화주의자인데, 일본의 정책이 앞으로 더 거세질 것”이다. 『화자일보』는 “애석하다 이토의 죽음, 두렵다 한인”인데, 중국을 제외하면 많은 나라가 이런 식으로 일본의 입장을 옹호하고 이토를 추모하는 기사가 납니다.
문: 의외네요.
답: 그렇죠. 고종황제가 헤이그에 밀사를 보내는데, 본회의장에서 말도 못 꺼내잖아요. 그만큼 한국은 당시에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있었고, 당시 러시아 역시 만주의 이권을 놓고 일본과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게 중국 땅이긴 했지만 러시아가 관할하던 하얼빈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모습입니다.
문: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신중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답: 러시아 언론은 현지인 극동지역과 페테르부르크 지역의 논조에 차이가 있어요. 극동은 의거를 높이 평가하고 일본의 침략이 곧 저항에 직면할 것으로 경고하고 있지만, 페테르부르크 지역 신문은 의거를 평가절하하고 사건이 러시아 조차지에서 발생한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러시아하고는 무관한 일이다는 논조입니다.
문: 높이 평가했다는 기사는 어떤 것이 있나?
답: 『하얼빈』 신문은 “한국인들의 조국을 노예화한 대가로 모욕을 당한 이들의 정확한 총알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정복자인 이토를 쓰러뜨렸다. 이토 저격 사건은 일본을 비롯한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보낸 정당한 경고다”라고 논평합니다.
문: 미국과 유럽의 반응은 어떤가요?
답: 대부분 유럽 언론은 전반적으로 동아시아 정세에 무지하고 무관심한 모습을 보여요. 이토가 누군지도 잘 몰라요. 딴 사람 사진을 게재하기도 하는데, 대체로 이토의 공적을 찬양하고 평화주의자로 묘사하고 있고, 『뉴욕 트리뷴』은 “이토는 한국을 야만에서 건져냈는데, 한국의 애국자가 이토를 죽이니 다시 이전 야만의 지위를 회복하고자 함이냐”며 부정적 보도를 합니다.
문: 왜 이런 반응이 나왔을까요?
답: 논평을 보면 일본과 친한 서양인들이 글을 쓰고 있고, 또 같은 제국주의에 동참한 국가들끼리 동조하는 모습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일본이 힘이 세니까, 세계 곳곳에 친일파가 많았던 거고, 국가정책이 비슷하니까, 서로 공감하는 거죠. 이토를 죽였지만, 제2의 이토가 있기에 일본의 정책은 변하지 않는다 의거가 어리석다고 논평하기도 합니다.
문: 그야말로 당시 강대국의 논리인데, 안중근 의사는 뭐라고 하셨을까요?
답: 동양평화론을 말씀하시죠. 당시 일본도 동양평화론을 말해요. 일본의 보호 아래, 서구 열강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겠다인데, 안중근 의사는 약소국도 독립된 국가로 평등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건 일본이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을 정당화하려는 논리에 불과한 기만적인 정책이라고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이토를 저격함으로 당시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월간 김창주,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