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10. 05:21ㆍ문화
1950년 12월 15일 흥남부두로 가려고 하는데요. 가기 전에 먼저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문: 흥남 철수작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들려야 할 곳이 어디인가요?
답: 한국의 지붕이라고 배웠던 개마고원입니다. 1950년 12월 13일 개마고원 장진호에서 전투가 끝나는데요. 흥남 철수작전은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는데, 장진호 전투가 끝나고 이틀 후 흥남 철수 작전이 시작됩니다.
문: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 궁금한데요?
답: 장진호 전투에 참전한 미 해병사단이 열 배에 달하는 12만 명의 중공군에게 포위되어서 전멸 위기에 놓였다가, 성공적으로 후퇴한 작전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문: 후퇴를 했다면 졌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은데, 성공했다는 표현이 맞나요? 한편으로 제가 군사작전은 잘 모르지만 열 명이 한 명을 포위하고 있는데, 여기서 탈출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지 않은가요?
답: 그렇죠. 이때 포위한 중공군 10개 사단 중 7개 사단에게 큰 타격을 입혀서, 한국군과 유엔군, 피난민 등 12만 명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고,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을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또, 중공군의 함흥 지역 진출을 2주간 지연시켰습니다.
문: 그러니까 중공군의 진출을 늦추고 방어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는 말이군요?
답: 그렇죠. 이렇게 12만 명의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에 도착해서,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중공군하면 인해전술이 생각나는데, 말로만 듣던 1.4 후퇴의 시작이었습니다.
문: 이제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가 시작된 흥남부두로 가보죠. 말이 10만 명, 20만 명이지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인데, 정말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실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죽느냐 사느냐를 놓고 탈출하는 거잖아요?
답: 2008년에 전주문화재단에서 그 현장에 계셨던 전주의 어르신을 직접 만나서 증언을 들었어요. 이때 기록한 것을 들고 왔는데요. 공통된 장면이 하나 있는데요. 엄청난 인파를 보고, 내가 저 배를 탈 수 있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느낀 공통된 충격 같은 것입니다.
문: 자 그럼 한 분 한 분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답: 두 분인데요. 공통점은 두 분 다 1931년생이시고, 학도병으로 참전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 보면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던 셈인데요. 다른 점은 한 분은 고향이 전주고, 한 분은 함경북도예요. 함경북도는 매머드 화석이 발견된 곳이기도 한데요. 지도에서 보면 참 멀죠.
문: 전주에서 학도병으로 참전하신 어르신 이야기부터 들어볼까요?
답: 성함이 정세헌 선생님이신데요. 당시 전주사범학교 학생이었고, 배구 선수 주장을 하셨는데요. 1950년 6월 24일~25일 이틀간 전국체전이 있었어요. 25일에 결승전을 앞두고 아침밥을 먹고 나가는데 종로에서 우리 군용차들이 군가를 부르면서 가는 것을 보았는데, 이때 인민군이 쳐들어 왔다는 것을 듣습니다.
문: 전국체전을 하고 그런 것을 보면 전쟁이 날 거란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답: 정세헌 선생님도 금방 우리가 이기겠지 하고 별로 걱정을 안 하셨데요. 그래서 결승전까지 마치고 기차에 올랐는데, 그게 마지막 기차였습니다. 이후에 한강철교가 폭파되었는데, 그래도 “우리는 안심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문: 별 걱정을 안 하셨다는 이야기인데, 언제 학도병으로 입대를 하셨나요?
답: 한 달이 채 안된 7월 13일에 자원해서 입대를 하셨는데요. 중간에 우여곡절이 참 많아요. 기회가 되면 또 말씀드리고 바로 흥남으로 가겠습니다. 원산, 함흥, 흥남, 성진, 길주, 명천까지 거의 함경북도까지 북진을 했는데, 길주에서 중공군을 만나요.
문: 중공군에게 밀려서 후퇴를 하셨겠네요?
답: 네. 증언을 한 번 들어 볼까요.
“눈이 하얗게 와서 산이 하얀데 개미떼 같이 중공군이 내려와. 그러면 아군 비행기가 폭격을 막 허거든. 밑에서는 대포를 막 한 10여 분 쏘면 조용해져, 하이고 전멸되었구나, 다행이다 허면 또 내려와요. 네댓 번 그렇게 한다니까, 한이 없어, 그러니까 후퇴를 했어.”
문: 듣기만 해도 공포감이 밀려온다.
답: 배를 타고 후퇴를 하는데 배에 홀수선이 있어요. 배 밑에 빨갛게 그어져 있어서 그 게 가라앉으면 더 이상 태우면 안 되니까, 그것을 보고 사람을 태워요. 그런데 미군이 사람을 더 태우기 위해서 기중기로 탱크를 바다에 버리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요.
문: 지금 생각하면 뭐 당연한 거 아닌가?
답: 그런데 이것은 박춘혁 전북대 명예교수님의 증언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데, 함북 길주가 고향이신데, 학도병으로 참전해서 흥남에서 탈출을 하셨는데요. 그때 “나 같은 사람이 과연 저기 저 배를 탈 수 있을 것인가, 전쟁통이니까 군장비가 우선이 아니겠는가”라고 생각을 하셔요.
문: 긴박함도 느껴지고, 비굴함도 느껴지고, 여러 감정이 교차하네요.
답: 영화 『설국열차』에서 보면 꼬리 칸에 탄 사람이 앞 칸으로 가려고 하는 게 현재의 풍경이라면, 이때는 지붕이든 어디든 일단 기차에 타야 살 수 있었는데, 생사가 달린 문제에서 자존심이 뭐 필요할까? 쉽게 답하기 어려운데, 제가 발견한 게 있어요. 반전이 있습니다.
문: 무엇을 발견했나요?
답: 자존감이라고 할까요. 다른 건 다 줘도 이건 안된다 처럼 별주부가 자신의 간을 지킨 것과 같은 신념을 발견했는데요. 다시 정세헌 선생님 이야기로 가면요. 포항에 내려서 원주까지 다시 올라가는데요. 포위돼서 보급품 중에 담배가 떨어져요. 한국군이나 미국군이나 난리였데요.
문: 그래서 어떻게 되나요?
답: 어쨌든 포위망이 뚫려서 아군 수송대가 들어와서요. 군인 한 명이 수송차 위에 앉아서 담배를 떡하니 피우니까, 원 플레이 원 플레이하고 야단이 났는데, 한 번만 달라 이 말이죠. 근데 이 사람이 한 번 피고 착 버리고 또 버리고 하는데, 미국군이고 뭐고 다 줄줄이 서서 주워서 피는데, 여기서 배운 게 하나 있으셨데요.
문: 뭘 배우셨을까요?
답: 증언을 들어 볼까요.
“그 줄에 안 선 영국군이 있었어. 미군 하나가 훅 피고 “헤이 테이크 유”, 한번 피울래 하면서 주니까, 받아서 그놈 얼굴을 팍 째려 보더만 받은 채로 팍 놔버리더니 그놈 얼굴을 보면서 발로 작신 밟아버려. 영국 사람들이 양반 근성이 있고 자존심이 세, 내가 그것 보고 담배를 평생 끊었어.”
문: 좀 민망한 장면인데, 이게 왜 별주부의 간인가?
답: 앞에서 탱크를 물에 버리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데. 얼마든지 또 생산해 낼 수 있으니까 버린 거죠. 바로 이 대목에서 문명에 대한 충격을 받은 것인데요. “우리가 현대문명에서는 뒤져있지만, 문화적으로는 우리가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이 사례 말고도 곳곳에서 읽을 수 있어요.
문: 담배 사건을 보면 결국 나는 영국 사람보다 양반이고 자존심이 세다는 말이 되네요.
답: 그렇죠. 미국의 원조를 많은 나라들이 받았지만, 모두 다 경제발전을 이룬 것은 아니거든요. 도움을 받기만 하면 타성에 젖을 수 있는데, 이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문화적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찾을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박춘혁 교수님은 흥남에서 탈출해서 동포항에서 내려요. 강원도 횡성까지 걸어가는데, 여기 성당에서 하룻밤을 묵어요. 너무 추워서 꼬박 뜬눈으로 새웠는데, 밤중에 노랫소리를 듣는데요. 크리스마스 성가대 노래였어요. 북한에서 크리스마스가 뭔지 몰랐는데 별천지에 왔구나 생각을 하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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