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26. 16:16ㆍ문화
망년회와 송년회
망년회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연말에 한 해를 보내며 그해의 온갖 괴로움을 잊자는 뜻으로 베푸는 모임을 말합니다. ‘송년 모임’, ‘송년회’로 순화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송년회 역시 연말에 한 해를 보내며 베푸는 모임이란 뜻입니다. 망년회는 잊자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잊고 다시 시작하자라는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실상 잊으려하면 더 잊어버리지 않잖아요. 약간 반어법의 의미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함께 고생한 일을 잊을 수 없음을 모여서 위로하고 기념하자는 의미도 있는 것 같지요.
망년회는 일본말?
망년회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에도 올라와 있지만, 일본에서 유래한 말이라 송년회로 순화하자는 의견이 있는데, 한편으로 그렇지 않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망년회’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써 온 말로, 조선 전기 문인인 서거정의 ‘한강루의 망년회 석상에서(漢江樓忘年會席上)’란 시에서도 볼 수 있고, 중국 당나라의 시성 이백(李白)도 현종(玄宗)에게 지어 바친 시에 ‘망년회’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제천 정자 위에서 망년회(忘年會)를 열었을 때는 대궐 진수가 줄줄이 이어지기도 했었지’라는 구절이 있지요.
조선시대에도 이미 망년(忘年)이란 의미는 한자어는 같지만, 지금과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과거에 함께 급제한 사람들의 ‘나이를 따지지 않는 모임’을 뜻한 말이죠. 합격 동기라고 해도 과거에 급제한 나이가 다 다르니깐, 허심탄회한 자리를 갖자는 것이 망년회였고, 망년지교(忘年之交), 망년지계(忘年之契)라고도 불렀습니다. 과거 급제한 동기생들의 계모임 같은 거죠.
개항 이후 망년회
그렇다면 지금과 같이 한 해를 잘 보내자는 의미로 망년회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언제부터 일까요? 지금의 망년회란 개항 이후 조선에 정착한 일본인들이 친지들과 어울려 시끌벅적하게 보낸 풍습이 슬그머니 퍼진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1876년에 부산이 개행을 했고 1880년 5월 원산과 1883년 1월 인천이 차례로 개항하는 19세기말에 일본에서 들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찾아본 기록 중에 가장 빠른 것은 1914년 12월 6일자 부산일보의 금요회의 망년회를 알리는 소식인데요. 현재의 부산일보와 제호는 같지만 다른 신문입니다. 1907년부터 일본인이 발행하다가 광복 후에 폐간된 일본어 신문입니다.
일본인들의 망년회 풍습을 보여줄 기록을 찾아봤습니다. 1884년 조선에 입국한 알렌 선교사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했고 갑신정변 때 부상을 당한 민병익을 수술해서 목숨을 살리기도 했고, 후에는 외교관으로 활동을 해요. 알렌이 남긴 조선 견문기에 당시 일본인들의 망년회 풍습이 나옵니다. 어느 망년회의 이야기라는 글인데요. 알렌이 일본 고베를 출발해서 몇 개의 항구를 거쳐서 제물포에 이를 때까지 6일간 일본 기선, 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배에 백인은 스코트랜드인 선장과 알자스에서 온 여인과 딸만이 있었는데, 섣달 그믐날에 부산항 도착을 합니다.
“일본인 수부들이 내일이면 다가올 새해를 위해 망년회를 시작하고 있었다. (중략, 밤새 술을 마시고 잔뜩 취해 있었다) 자정이 지나고 새해가 오자 수부들은 식당의 냄비와 국자를 들고 나와서 활기차게 두들기며 요란스럽게 배 안을 돌아다녔다. 그들은 곧 유령처럼 소리치면서 마치 모든 정신 병원의 문이 열리기라도 한 듯 냄비를 두들기며, 그 알자스에 온 여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알렌이 이때 급하게 그 방으로 들어가는데요. 그 일본선원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아요. 이 선원들이 알렌과 여자를 가운데에 두고 마치 인디언들의 탈춤과 같은 춤을 추었고, 여자는 머리를 무릎에 박고 모든 성인과 성녀들에게 신의 가호를 빌고 있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결국 알렌과 이 일본 선원들을 방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는데, 자신들의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자 싫어하는 기색이 보였고, 여인과 자녀들을 안심시키며 계속 그 방에 머문 채 제물포에 도착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전세계 곳곳이 세계화되고 정보통신이 발달해서 이런 문화 차이를 느끼거나 기괴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적지만, 당시에는 그만큼 문화적 차이가 크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아마도 일본 선원들이 누군가를 괴롭히려고 했다기보다는 자신들의 전통풍습을 함께 하자라는 그런 의미가 행간에 보이긴 합니다. 알렌 역시 당시에는 문이 열린 정신병원에 비유할 만큼 광란적인 풍경을 묘사하는데, 한편으로는 그 사건으로 인해 차에 타 먹는 설탕이 더욱 달콤하게 느껴진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과 망년회
20세기 초 우리나라의 망년회 풍경은 사뭇 다른데요. 흥청망청하는 모습도 있지만, 의미 있는 첫 기록은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근대사 연표를 보면 1918.12.29. 재동경(在東京) 조선유학생회 망년회를 학우회 주최로 명치회관(明治會館)에서 개최했는데, 민족 자결에 의한 조선독립론을 주제로 연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재일유학생은 망년회와 신년회를 통해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심훈과 망년회
1930년대로 가면 삼천리란 잡지에 상록수의 심훈 작가가 “신랑신부의 신혼공동일기”를 연재하는데요.
“1931년 1월 1일 쾌청 L氏집에서 P夫人과 親友들만 모인 忘年會에 참석하얏다가 마음놋코 마신 술이 진흙가티 醉하야 압흘 가누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午前두時를 친다. (중략) 큰기침을 하면서 문을 뚜드리는 家長의 威嚴이 또한 그럴 듯하다. W는 단거름에 뛰어나온다. (중략) 은행가티 쌍꺼풀이 진 눈초리와 조름이 닥지닥지 매여달린 기-다란 속눈썹 석고로 비진듯한 코ㅅ마루 「키쓰」를 우박과 가티 끼언저 주었다.”
한 줄 한 줄 읽어보면 상당히 낭만적이라고 할까요 그런 글인데요. 요약하면 망년회에서 새벽 두 시까지 술을 마시고 귀가해서 남편의 늦은 귀가를 걱정하는 아내를 달래는 그런 내용입니다.
해방 후 망년회
이러다가 해방 후에는 망년회가 상당히 문제가 된 것 같아요. 1949년 12월 13일 자 서울신문기사인데요. 제목이 “감찰위원회, 연말을 즈음한 망년회 빙자 향응사례를 단속”입니다. 기사를 읽어 볼게요. 감찰위원회는
“(상략) 연말에 흔히 많은 망년회 형식의 향연과 뇌물을 받고 주는 것을 세밀히 탐사할 것이며 또한 상급 관청들이 지방 출장 시에 흔히 있었던 무전침취식에 대한 폐단을 특별 감찰하리라 한다. 즉 감찰위원회에서는 연말에 많았던 망년회의 폐단을 일소하고자 적은 인원으로나마 시내 요정을 일제히 감시하여 금권을 쥐고 있는 모리배들이 관계 관청직원의 직권을 좌우하기 위하여 망년회를 베풀어 공공연한 뇌물증여가 있을 것을 예기하고 연말 요정 감시”
란 기사입니다.
망년회라는 단어 하나를 놓고도 이렇게 시대의 변화상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즘 망년회? 송년회 풍경
1980년대와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회사원들이 폭음을 하다 사망하는 사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마시면 이럴 수 있을까요? 상상이 안 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에는 술을 강하게 권하는 문화가 있었고 회사 망년회 중 사망한 회사원의 가족들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해서 승소했다는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망년회 중 폭음으로 사망사고가 나던 때에 우리나라에 폭탄주가 제조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회식 때 술을 먹는 만큼 일을 한다.”라는 말도 있었고요. 그러니까 회식 때 술을 안 먹는 사람은 평소에 일을 안 하는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 폭음을 하다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회식 자체를 저녁에 하지 않고 점심에 하는 문화가 정착해 가고 있습니다. 저녁에 하더라고 간단한 저녁식사 후에 공연이나 연극, 영화를 함께 관람하기도 합니다. 또 요즘 망년회 관련 기사를 보면 맛집을 주로 소개하는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회식문화, 송년회 문화가 많이 변하고 있는데요. 중공업과 같은 육체노동의 시대에서 지식산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현상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월간 김창주,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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