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 28. 15:58ㆍ음악
지난 편에서는 인도양의 진주 스리랑카와 아담의 발자국, 14세기 이븐 바투다의 기행문을 소개했다. 과거 한국과 이란이 실크로드를 통해 직접 교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국과 이란의 교류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이번 편은 7세기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신라 공주의 사랑 이야기다.
2020/08/26 - [바다의 실크로드] - 실론티와 코끼리의 나라
페르시아의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하나?
페르시아는 BC 6세기부터 AD 7세기까지 이란 고원을 지배했던 나라다. 지금의 이란 남서부의 '파르스'라는 땅 이름에서 유래했다.(네이버 지식백과) 사산왕조는 7세기 중엽인 651년에 아랍의 침입을 받아 멸망했다. 꽤 긴 역사를 가진 페르시아가 아랍 세력에게 멸망한 이유가 무엇일까? 7세기는 아시아와 유럽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파미르고원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서는 수나라와 당나라가, 서아시아에서는 아랍, 이스람제국의 세력이 왕성해지면서 세계적인 양대 강국이 대치를 하고, 유럽에는 최초의 기독교적 통일국가인 프랑크 왕국이 출현한다. 아랍 세력이 7세기에 등장한다. 이때 아랍-무슬림들이 해상무역을 주도하는데, 지중해를 통해서 남유럽, 아라비아해와 페르시아만을 통해서, 인도와 동남아시아 국가, 중국 연해까지 활동무대를 넓혀 가면서, 동서교역의 가교역할을 수행한다.
페르시아는?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는 오늘날의 이란을 중심으로 이라크, 아르메니아, 코카서스,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북부, 터키 동부에 이르렀고, 호스로 2세(Khosrau 2, 590-628 재위)가 통치할 때는 팔레스타인, 이집트 지역도 제국의 세력권 안에 있었다. 종교는 조로아스터교가 유명하다. 중국에서는 한자로 배화교라 한다. 불을 숭상한다는 의미다. 다신교가 아닌, 일신교적인 특징과 교리적인 부분에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페르시아는 동서양의 음악, 악기, 음악가에게 많은 영향과 영감을 주었다. 우리나라의 전통음악하고도 관련이 있다. 구라철사금, 양금의 다른 이름이다. 구라는 유럽을 뜻하는 구라파에서 따왔고 철사는 말 그대로 철로 된 줄, 금은 악기를 뜻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유럽에서 온 철가야금 정도로 해석이 가능하다.
페르시아에서 온 양금
양금의 기원은 페르시아의 덜시머(Dulcimer), 코카서스의 산타르(Santir)가 원형이다. 10C~12C경 신성로마제국의 십자군전쟁 때 유럽으로 전래되어, 피아노의 전신인 클라비코드, 쳄발로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17세기 이전에 청나라에서 전래되었다. 양금은 현악영상회상과 같은 줄풍류에 사용하고 있다. 대나무 채로 현을 두드려서 내는 타현악기로 사다리꼴 모양의 나무 상자 위에 철사로 된 현이 놓여 져 있다. 양금은 중국에서는 양친, 이란과 인도에서는 싼투르(santur), 베트남에서는 땀탑룩(Dan thao luc) 등으로 불리며, 라루스에서는 짐발리(zimbaly), 또 집시들에 의해서 터키, 헝가리, 로마에 들어가서 침발롬(Cimbalom), 스위스에서는 하크브렛(Hackbrett)이라고 부른다. 동양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또 비파 중에 곡경 사현비파는 실크로드 역사상 가장 오래된 악기로 페르시아에서 중국으로 유입되어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전승되고 있다. 이와 달리 오현비파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들어왔다. 13세기 이후 중국에서 오현비파는 점차 사라지면서 전승이 끊어졌다.
서양 음악에는 어떤 영향을 주었나?
양금은 집시들에 의해서 서양에 전해졌다. 이것 외에도 음악적 영감을 주기도 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벨사살(바빌론의 마지막 왕)"이 있다. 바빌론족이 이스라엘 민족을 포로로 잡는데 페르시아 왕자 고레스가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켜준다. 오라토리오는 작은 규모의 오페라다. 주로 성경 내용을 노래하는 17~18세 가장 성행했던 종교적 음악의 한 형식이다. 이후 이야기는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할 것을 약속하는데, 15개의 합창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슈만의 오라토리오 "낙원과 페리"에서 페리는 페르시아에서 전해지는 요정의 이름이다. 낙원에서 추방된 페리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천사에게 바쳐서 낙원으로 다시 돌아가는 내용이다. 두 번 거절을 당하고, 세 번째 낙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첫 번째는 정의를 위해 용감하게 죽어간 젊은이의 피였고, 두 번째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여인의 사랑이었는데 거절을 당한다. 세 번째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회개의 눈물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임을 깨닫는 내용이다.(문주희, 2004)
동서양에 많은 영향을 준, 페르시아는 왜 멸망했나?
정확하게 말하면, 7세기 중엽의 사산왕조페르시아가 멸망한 것이다. 7세기 초엽에 아라비아반도 서부에서는 이슬람교가 급성장하고 있었다. 또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비잔틴제국과 오랜 전쟁 때문에 동서교역로가 막혀서 홍해 연안을 중심으로 한 상업도시가 번창하게 된다. 전쟁 때문에 다른 도시가 성장하게 되었다데, 그 유명한 메카였다. 이곳에서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가 570년에 태어난다. 반면에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오랜 비잔틴제국과의 소모전으로 인한 국력 분열 등으로 새로운 세력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었다. 결국 이슬람세력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이후 사라센, 그 뜻이 사막의 아들이다. 이들이 바다의 아들로 변신하면서 이 신흥 아랍무슬림들이 바닷길의 주역이 된다. 동서교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해로의 패권을 잡게 된다.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
이때 망명한 페르시아 왕자가 신라의 공주와 혼인했다는 이야기 있다. 이란의 구전 서사시. '쿠쉬나메'에 전해지고 있는데, 국내에는 2009년에 알려졌다. 이후 국내 연구진들에 의해 번역 작업이 이루어졌다.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아비틴 왕자가 유민을 이끌고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에 머물다가 이웃 나라 신라로 망명한다. 신라의 왕을 도와 중국과의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우는데,
신라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그중에서도 공주가 최고라는 말을 듣게" 된다. 아비틴 왕자의 끊임없는 "구혼 끝에 프라랑 공주와 백년가약을 맺게" 되는데, "그 후 아비틴과 프라랑이 페르시아로 돌아오는 배에서 낳은 파리둔이 아라비아군을 물리치며 원수를 갚고 민족의 영웅"이 된다는 내용이다. (이재훈, 2016)
이 경전에 나오는 신라가 우리나라 신라인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페르시아산 카페트가 나오고,
신라 왕릉에서 페르시아산 "공작새 꼬리털이나 금은 세공품, 인형 등이 다수 발견될 만큼 신라는 페르시아와의 교류가 활발했다."(이제훈, 2016)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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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희 「R. Schumann의 오라토리오「Das Paradies und die Peri」Op.50에 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
이재훈. 「[fn스트리트] 페르시아 왕자, 신라 공주」(『파이낸셜뉴스』,20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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