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24. 00:16ㆍ문화
이소룡 혹시 아세요? 제가 어렸을 때 동네 형들이 이소룡 흉내를 참 많이 냈어요. 괴조음이라고 하는데, 괴상한 새 울음소리라는 뜻인데, 특이한 괴성이 내면서, 길쭉한 스포츠 가방에 쌍절곤이 살짝 보이게 넣고 옆에 줄 이 길게 그려진 추리닝(운동복)을 입고 다녔었죠. 1973년 7월 20일 이소룡이 34세 나이에 갑가지 요절하면서 이후에 이소룡은 신화가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 오늘은 이소룡과 무협영화에 대한 이야기겠네요. 얼마나 대단하길래 신화라고 했을까요?
답: 이소룡이 대중문화, 특히 영화에 끼친 영향은 대단한데요. 1998년 미국 타임지에 20세기 영웅과 우상으로 평가된 유일한 중국인이 이소룡입니다. 이소룡을 흉내 낸 수많은 아류작이 있었는데, 주인공 이름이 다들 양소룡, 여소룡, 거룡, 당룡, 이렇게 용자 돌림이었고, 척 노리스, 실버스타 스탤론, 아널드 슈워제네거와 같은 근육질 배우를 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문: 최근 만들어진 영화에서도 이소룡을 모티브로 한 것들이 있었던 것 같다.
답: 쿠엔틴 타렌티노 감독의 『킬빌』, 주성치 감독의 『소림축구』,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또 다른 이소룡을 만날 수 있죠. 2005년에는 이소룡 탄생 65주년을 맞아서 보스니아의 고도 모스타르에 이소룡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문: 왜 세웠나요?
답: 내전의 상처가 남아있는 모스타르의 새로운 상징이자 보스니아 민족 갈등을 치유할 상징적 인물로 브루스 리를 선정했는데, 이소룡이 영화 속에서 언제나 불의와 인종차별에 맞서 싸운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상이 세워진 다음날부터 동네 불량배들이 쌍절곤을 훔쳐가고, 동상에 총을 쏘고 훼손해 현재는 철거되었습니다.
문: 어떤 영화들인가?
답: 이소룡은 총 5편의 영화를 남겼는데요. 1971년에 『당산대형]』 당산의 큰형이란 뜻이고, 1972년에 『정무문』 이연걸이 주연해 메이크한 영화가 있죠. 『맹룡과강』 사나운 용이 강을 건넌다는 뜻이고요. 1973년에 『용쟁호투』 용과 호랑이가 싸운다 뜻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문: 제목만 들어서는 어떤 내용인지 알 수가 없네요.
답: 예를 들어 당산대형에서 이소룡이 중국 대륙에서 태국으로 일자리를 구하러 가는데 같은 교포들이, 그러니까 이주노동자들이 핍박을 받으니까 맨 주먹으로 불의와 맞서는 내용이고, 정무문은 식민지 시대에 맨손으로 일본과 맞서는 내용입니다.
문: 그렇게 감동적인 내용은 아닌 것 같은데요.
답: 줄거리는 극히 단순해서 스토리보다는 칼이나 총을 들지 않고, 맨손으로 가끔 쌍절곤을 들고 혈혈단신으로 불의에 맞서서 이긴다는데, 인기비결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08년에 중국이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해서 50부작 드라마로 이소룡 전기를 제작, 방송하기도 했습니다.
문: 여러 가지 면에서 대중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요절한 이유는?
답: 1973년, 지난 7월 20일자 기사를 볼까요. “동료 여우의 집에서 갑자기 사망한 국제적 중국계 미국인 배우 이소룡(블루스 리)은 마리화나 흡연이 가져온 뇌부종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홍콩 정청의 검시관 C·K·퉁씨가 발표. 퉁 검시관은 홍콩 정청 의사들의 광범한 의학조사에서 이소룡의 위와 소장에서 간마비스(마리화나)의 찌꺼기가 발견되었다고...”
문: 그럼 약물 중독 때문이었나?
답: 이건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은둔해 살아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이소룡 사망 원인에 대한 각종 음모론이 떠돌면서 이소룡을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고. 인기가 식지 않고 이소룡의 아류작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문: 어떤 작품들인가요?
답: 1974년, 추석에 선보일 외화 하이라이트로 나온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이소룡의 제자 중에 제일로 손꼽히는 양소룡 주연의 현대판 손오공 같은 무술영화. 역시 무대는 홍콩, 국제 마약 밀수 조직을 조사 중이던 국제경찰의 요원들이 계속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데”라는 홍보 글이 있네요.
문: 홍콩영화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약에 국제 경찰에 이야기가 비슷한 것 같다.
답: 우리도 그랬다. 1982년으로 가보면요. “사기극까지 연출하는 영화선전. 한국 배우에 야릇한 중국식 이름 붙여 현혹. 5, 6년 전 이소룡이 나오는 쿵후영화가 관객을 몰고 오자 (중략) 한국배우를 쓰면서도 마치 중국이나 홍콩의 쿵후 전문 배우를 등용한 것처럼 거짓 선전 (중략) 청룡, 거룡, 왕룡, 감가봉, 성전 등으로 독특한 이름을 이름을 붙여 관객을 현혹. (중략) 소림사 이름을 따 제작한 영화만 『소림사 주방장』, 『소림사 물장수』, 『소림사 주천괴동』, 『소림사 달마도사』, 『소림사 10대 장문』 등 10여 개나 돼 소림사 발상지가 한국인듯한 착각을 갖게도 한다.”는 비판 글이 있습니다.
문: 지금보면 유치한데 왜 그렇게 인기가 많았을까요?
답: 1982년 기사에, “쿵푸영화에 관객이 많이 몰리는 것은 통쾌한 각종 권법과 무술이 욕구불만을 씻어주는 데다 이소룡 출현 이후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 미국 청소년 층에 붐을 일으키고 있는 활극 선호 취향으로 풀이된다.”는 해석이 있네요.
문: 당시에 홍콩영화 말고 다른 영화는 무엇이 있었나?
답: 1985년에 미국 영화를 400만 달러어치를 수입하는데요. 전체 외화 수입액의 90%를 차지했습니다. 『킬링필드』가 31만5천 달러로 가장 비싸고, 가장 싸게 들여온 것은 홍콩영화 『최후의 이소룡』이 5만 3천 달러였습니다. 이 해에 들어온 영화로는 『인디에나 존스』, 『람보 2』, 『아마데우스』, 『007 살인전쟁』 등입니다. 1985년 1월 1일 신년 특선영화로 TV에서 『용쟁호투』를 방영했네요. “여동생을 잃어버린 뒤 깊은 산간에 은둔 생활을 하면서 무술을 익혀 동료와 함께 무술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원수를 찾아내는 집념의 사나이상을 그린 활극. 이소룡이 펼치는 무술이 압권이다. (하략)”
문: 이소룡의 인기가 1980년대까지 지속되네요?
답: 1988년으로 가보면요. “그룹 소방차 무대가 좁다 텀블링 율동 10대 열광. 독특한 춤 개발 비디오형 가수로 각광 거구 날렵 3인의 코믹한 몸짓도 인기. 리더 김태형은 날렵한 제비 같은 몸동작과 짧은 헤어스타일 등이 매력 포인트. 비틀스와 이소룡을 합쳐놓은 인상이라는 뜻의 비소룡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그녀에게 전해주오」, 「어젯밤 이야기」 등”에 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문: 1980년대를 지나서 90년대는 어땠나?
답: 1993년 입니다. “드래건 무술스타 이소룡 일대기. 살아서는 영웅, 죽어서는 신화. 아직도 팬들의 뇌리에서 잊히지 않고 있는 전설적 무술 스타 브루스 리가 영화 속에서 되살아난다. 『드래건』은 이소룡의 미망인 린다 리가 쓴 『나만이 아는 남자 – 브루스 리』를 원전으로 제작한 무술영화 (중략) 이소룡 역에는 『라스트 모히칸』에 출연한 만능 스포츠 스타 제이슨 스콧 리가 기용”되었습니다. 당시 개봉 영화 『클리프 행어』, 『로보캅 3』 등이었습니다.
문: 90년대에는 이소룡 일대기를 다룬 전기 영화가 나오는군요.
답: 1994년에 영화 『크로우』는 “이소룡의 아들로 영화 촬영 중 총기 오발로 사망했던 브랜던 리의 유작 (중략) 이 영화는 브랜던 리의 사망 후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 제작을 끝마쳤다. 21세기를 여는 포성 문화전쟁 (6) 홍콩영화 장사 전략 (중략) 스타를 발굴, 육성하고 개별 스타를 출연시키거나 때로는 패키지로 등장시키는 인해전술을 사용하기도 한다.(중략) 10여 년 전 한국에서 엑스트라였던 성룡이 오늘날 세계 스타 대열에 오른 것은 역시 이들이 사람에 대한 투자에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 1990년대 중반에 문화의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말이 재미있네요.
답: 1995년에 유하 작가의 첫 산문집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출간됩니다. “나는 70년에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을 이소룡 세대라 명명해보았다. 우리들의 추억의 국적을 다양하게(?) 바꿔 놓은 것은 그 무렵 급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한 대중문화의 거대한 스펙터클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말하는 이소룡 세대란 바로 그 대중문화의 스펙터클에 본격적으로 감염되기 시작한 세대 – 그것을 나는 대중문화 1세대라고 부르고 싶다 –를 지칭한다. 대략 지금의 30대 초반에서 후반까지가 거기에 해당된다”
문: 1995년에 30대 초반이면 지금은 50대가 되신 세대들이네요?
답: 그렇죠. 책을 더 보면요. “고향 하나대 마을(고창군 상하면)에 처음 텔레비전이라는 것이 들어오던 날의 경이로움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지방 방송국이 없었던 까닭에 수신 상태가 엉망이었지만, 단지 그 작은 상자 속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중략) 전주에서 온 친구가 우쭐대며 그 드라마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제목은 제쳐두고라도 그것이 드라마라는 사실조차도 몰랐으리라. 마을 사람들은 길게 연결한 대나무에 안테나를 달고 하늘 높이 세워보았지만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마을 뒷 잔등에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던 대나무 안테나. 바람에 기다란 대나무가 휘청거릴 때마다, 어린 내겐 그 모습이 마치 뚜렷한 영상을 갈구하는 몸짓처럼 느껴지곤 했다.”
문: 지금 어디서나 선명한 화면을 볼 수 있는데요.
답: 유하 작가의 1968년 기억입니다. 1970년 서울로 이사해서, “내가 서울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케 해준 것은, 만화가게에 놓여 있던 티브이의 선명한 화면이었다.”고 하네요.
문: 책을 쓸 정도니 유하 작가도 꽤나 이소룡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답: 처음 본 이소룡 영화는 『정무문』이었는데, “영화를 보는 동안 어떤 격렬한 강점에 사로잡혀 무려 열 번씩이나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환성을 질렀다. (중략) 우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이소룡 신봉자 (중략) 서투른 쌍절곤 돌리기로 붕붕거리던 추억의 한때. 그 쌍절곤 덕분에, 하루도 뒤통수가 성할 날이 없었다.”고 하네요. 유학 작가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무림일기』 등의 시집이 있고, 『결혼은 미친 짓이다』,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쌍화점』, 『하울링』, 『강남 1970』 등의 영화의 각본을 쓴 영화감독입니다.
'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관광 산업의 시작 (0) | 2021.05.27 |
---|---|
복숭아로 본 근현대 (0) | 2021.05.26 |
당신의 새는 어디로 날아가고 있는가? (0) | 2021.05.23 |
라면 생각 (0) | 2021.05.23 |
로보트 태권 v와 우주군 (0) | 2021.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