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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관광 산업의 시작

by 월간 김창주 2021.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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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무전여행에 대해서 알아봤는데요.

2021.05.25 - [자문자답] - 무전여행

오늘은 국내 관광산업이 언제부터 시작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문: 아하, 관광이나 여행은 조선시대에도 있었을 것 같은데, 산업으로서 관광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답: 개화기를 기점으로 잡고 있는데요. 그 이유가 교통수단의 발달로 국내외 관광객이 전에 없이 늘어났고, 이때 근대식 호텔 등 숙박업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모습에서 찾고 있는데, 개화기를 기점으로 잡는 것은 과장된 감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문: 개화기라고 하면 언제부터를 말하는가?

답: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1876년부터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까지를 보통 개화기라고 하는데요. 잘 아시는 것처럼 1875년에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킵니다. 강화도조약은 일본이 군사력을 동원해서 강압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었죠.

야만적인 운요호 사건

문: 1876년부터 개화기인데, 이때를 우리나라 관광산업의 시작점으로 본다고 하셨는데, 앞에서 교통수단이 발달로 국내외 관광객이 전에 없이 늘어났다고 하셨지만, 그럴만한 교통수단이 있었나요?

답: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는 초보적 수준이지만요. 유럽인들이 러시아횡단철도를 통해 우리나라와 아시아에 올 수 있었고, 이렇게 증기선과 증기기차의 발달로 한중일 삼국 간의 국제운송이 정기화된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문: 그렇다면 호텔도 이때 들어서기 시작했나요?

답: 그렇습니다. 인천 제물포에 서구식 호텔이 들어서고, 서울에도 일본식 여관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런 혜택은 일부만 이용할 수 있었죠. 당시 국내 신문과 잡지에는 외국인이 쓴 여러 편의 조선 기행문이 실려 있기도 합니다.

 

문: 주로 어떤 내용들인가?

답: 여러 내용이 있는데, 그 중에 조선사람들의 여행 모습에 대해 기록하기도 했어요. 왕의 행차, 돌싸움과 같은 놀이 구경, 종교행사, 누각관광 등에 대한 기록 등을 남겨 놓기도 했습니다.

 

문: 그럼 당시에 우리나라 사람이 외국을 간 것도 기록에 남아 있나요?

답: 내국인의 국외여행은 외국 유학, 왕족과 고위직은 공무여행이 주였고, 예를 들어 삼일천하 김옥균과 서광범은 1875년에 일본에 다녀와서 왕에게 서구문물 채택을 주장합니다. 1880년에는 조선 정부가 일본 유학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최초의 서구 유학생이라고 불리는 유길준의 서유견문이 있습니다.

 

문: 국사시간에 배운 기억이 나는데, 어떤 내용인가?

답: 총20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단순한 서구 기행문이 아니라, 서구의 ‘근대’모습을 보고 우리의 근대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를 정치 경제 법률 교육 문화 등 각 부문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근대 국정개혁서’라고 백과사전에 쓰여있지요.

 

문: 서구 유람기를 생각했는데, 생각과 달리 딱딱한 느낌이다.

답: 그렇죠. 제16편이 관광에 대한 부분입니다. 제19편과 제20편은 유럽 각 도시의 견문기인데요. 16편의 유락하는 경상에서 유락의 중요성을 기록하고 있다. 유락은 현대적인 여가의 개념을 말하고 있는데, 일부를 발췌했어요. 읽어 볼게요.

흔히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당연한 도리라고 하고 한가하고 안일하게 지내는 것은 못된 습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지런히 일하는 것과 한가하고 안일한 것도 각각 그 도리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매일매일 시간을 작성하여 부지런히 힘쓸 때에는 이에 극진하지만 휴식할 때는 충분히 쉬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하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평생을 두고 안일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날의 일을 힘써 끝낸 뒤에 휴식하는 여가를 이용하여 한가하게 즐기는 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문: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잘 쉬자는 말로 잘 쉬자는 말로 들리네요.

답: 그렇죠. 당시에는 생소했던 서구의 여가생활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문: 그건 그렇고, 당시 외국에 나갈 수 있는 여객선이 있었나요?

답: 한중일 사이에 정기 여객선이 운항하고 있었다는 것은 서구인의 조선여행 기록에서 알 수 있습니다. 1884년 상해-나가사끼-제물포 사이를 운항하던 남경호가 있었고, 당시 식사 메뉴는 쇠고기 볶음, 칠면조 요리, 연한과자가 나왔습니다. 승무원들이 매우 친절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문: 얼마나 친절했길래, 매우 친절했다고 기록했을까요?

답: 그것까지는 알 수 없고,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지금은 친절이 당연하지만 그때는 친절이 당연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중일 간에 여객선이 있었고, 일단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려면 일본에 가서 배를 갈아타야 했습니다.

 

문: 이렇게 여객선이 오고 가니까 당연히 숙박업소도 필요했을 것 같다.

답: 그렇죠. 1890년에 새비지 렌 도어가 제물포에 들어와 당시의 제물포의 호텔에 대해 기록하는데, 제물포에 3곳의 유럽형 호텔이 있었습니다.

 

문: 소유주가 우리나라 사람이었나요?

답: 아닙니다. 스튜어드 호텔은 소유주가 한 때 미국 배의 웨이터였고, 한국 호텔은 헝가리인 소유였습니다. 군함 승선자에게 인기였고, 다양한 주류가 비치되었고, 세련된 바텐더가 있었다고 하네요. 대불호텔은 1888년 일본인이 건설합니다. 한국 최초의 호텔로 추측되는데요. 가장 인기가 있었고, 종업원이 현대적 말씨를 사용했고, 고상한 맨션형 건물이란 평을 받았습니다.

대불호텔(나비요정, 2019)

문: 호텔이 친절했는지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나요?

답: 대불호텔 서비스는 “침대는 매우 깨끗했다. 벨은 없었고, 손바닥을 쳤다. 냉수욕을 위해 물과 대야를 방에 배달해 주었다. 정체 모를 고기 조각은 불행하게도 너무 질겨서 사람의 치아나 턱이 아무리 날카롭고 강할지라도 그 고기를 먹을 수가 없었다”라는 혹평도 있네요.

 

문: 표현이 재미있는데, 단체관광은 언제부터 시작되나요?

답: 일제강점기에 미국과 캐나다인의 조선 단체관광이 시작됩니다. 주로 호화 유람선을 타고 제물포에 입항해요. 경인선 열차를 이용하여 서울에 들어와서, 인력거를 타고 고궁 등을 구경하는데, 관광객 수는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르렀습니다.

 

문: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단체관광에 대한 기록도 있나?

답: 1922년 동경평화박람회 관광단은 92개 단체 4,168명이 참여했습니다. 이런 일본 관광 열기에 대해 당시 언론들은 상당한 비판을 해요. “저주하라! 평화박람회, 평화박람회와 조선인의 격렬한 공분, 추악한 조선관과 눈물 나는 관광 단원, 동포여! 관광을 단연 중지하라!”

 

문: 추악한 조선관이 무슨 뜻이죠?

답: 동경평화박람회에서 조선 전시관을 보고 실망하고 관광을 중단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전시 부스가 형편없었다는 것이죠. 이렇게 당시에는 도시(순회) 관광단, 고적 관광단, 동굴 관광단, 경마대회 관광단, 물산 공진회 관광단, 금강산 관광단, 조선박람회 관광단 등이 있었습니다.

 

문: 단체 관광하면 상술이 판을 치는데, 부작용은 없었나요?

답: 1935년 신문기사에는 “차장의 호령에는 위자금을 바더야 할 일, 정거장에 내리자 끌려다닐 뿐. 양식 한 접시에 山이 이십 평이라고, 카풰구경하고 놀래는 손님네. 야간에 가는 곳, 신정(新町) 인육시장(人肉市場)에 병이나 올마가지 안엇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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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불친절하다는 것은 알 수 있는데, 산이 이십 평, 신정의 인육시장은 뭔가요?

답: 양식 한 접시가 이십 평 땅 값일 만큼 비싸고, 신정의 인육시장에 병이나 올마가지 않았는가는 매음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영어 안내자가 있었고, 관광안내원은 파출소에서 양성했습니다. 관광객을 안내하려면 도청의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문: 관광단을 모집하는 광고 같은 것도 있을 것 같다.

답: 그렇죠. 1938년에는 여러 편의 관광홍보영화가 제작되기도 합니다. 관광 풍물 사진전 개최하기도 하고,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잡지에 관광을 위한 광고를 내기도 합니다. 단체관광객에게는 무료로 안내원을 붙여 주기도 합니다.

 

문: 관광이 산업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지난 시간에 1930년대에 무전여행이 시들해졌다고 한 이유를 알 수가 있네요.

답: 그렇죠. 관광이 산업이 되면서 우리 고장을 찾아온 손님에서 우리 동네에 돈을 쓰러 온 고객이 된 것인데, 어쩔 수 없는 시대의 변화입니다. 무언가 아쉽고 아련한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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