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의 변주곡

2021. 6. 5. 11:06考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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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의 정의

  “기억이 우리를 정의하는 것처럼 기억에 집착하지만, 우리를 정의하는 것은 행동이다”라고 말하는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는 미래사회를 다룬 SF영화 같지만, 실은 사회의 부조리와 싸우는 처녀귀신의 이야기다. 영화는 내내 Ghost란 무엇인지 묻고 있다.

  귀신과 유령, 정령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사전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면 귀신은 “사람이 죽은 뒤에 남는다는 넋”이고, 유령은 “죽은 사람의 혼령” 또는 “죽은 사람의 혼령이 생전의 모습으로 나타는 현상”이며, 정령은 “만물의 근원을 이룬다는 신령스러운 기운” 또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사전 상의 의미로 각각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기는 어려워 보이는데,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Ghosts of War in Vietnam)』에서는 조상신과 객사한 사람의 영혼을 구분해 사용하고 있다. 전자가 긍정의 의미라며, 후자는 부정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 후자가 부정에서 긍정으로 변환되는 문화현상과 양능성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유령의 정의는 이 지점에 있는데, 이런 유령이 베트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와 유령

  우리 문화에서도 저자가 말하는 유령을 만날 수 있다. 전주 경기전의 태조어진과 같은 조상신은 남성이며, 긍정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처녀귀신은 여성이며 부정의 의미로 사회의 부조리한 현상이 있을 때 등장한다. 이것은 학교의 유령인 『여고괴담』과 신자유주의의 유령인 『검은 사제들』와 같은 영화로 변환되어 등장하기도 한다. 산자도 죽은 자도 아닌 이들은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살면서 그 사회의 진실을 이야기한다. 드라마 『도깨비』는 현대판 귀신들이 등장하지만, 실은 미래사회를 다른 SF 드라마다. 첨단 의학으로 죽지 못해 살고 있는 대기업 회장은 18세 소녀와 사랑을 할 수 있다. 『파우스트』의 변주곡 같은 이 드라마는 부조리한 현실을 낭만적 또는 감성적 이미지로 이야기하고 있다. 하얀 소복을 입고 산발한 처녀귀신의 변주곡이다.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유령은 현 사회의 체제에 대응해 그에 맞는 옷과 분장을 하고 등장한다. 또한 그 체제가 부정하는 것은 유령이 되어 등장하기도 한다. 보수정권이 들어서 5.18과 세월호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유령의 모습으로 현실 세계에 등장할 것이다. 반대로, 민주정권이 들어서면 보수의 유령이 스멀스멀 나타나기 시작한다.

 

처녀귀신의 성격

  현대사회에서는 처녀귀신이 주는 공포가 재미, 오락의 대상이 되었다. 처녀귀신의 성격을 하나씩 뜯어보면 하나도 무섭지 않다. 설명하기 전에 『기문총화』에 나오는 귀신 이야기가 있다. 억울하게 죽은 귀신이 한 선비를 찾아간다. 그런데 선비는 아직 벼슬에 나가지 못해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귀신은 “선비님은 이제 곧 과거에 급제해 형조참의에 오를 것”이라고 말한다. 말 그대로 선비는 과거에 급제해 귀신의 억울한 사연을 풀어준다. 어렸을 때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다.

  이때 처녀귀신이 상징하는 문화적 의미가 있다. 일단 소복, 피, 산발, 귀곡성이 있다. 그리고 꼭 누명을 쓰고 사또를 찾아간다. 앞에 이야기에서도 곧 과거에 급제할 만한 선비를 찾아가는데, 자세히 보면 귀신이 선비를 찾아간 목적이 복수에 있지 않다. 복수가 목적이라면 가해자들에게 직접 찾아가서 해코지를 하면 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 어떤 누명을 벗기 위해 찾아간 것이다. 사회적인 명예를 회복하러 간다. 어떻게 보면 합법적인 절차를 거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최기숙, 70쪽) 사회적으로 발언권이 없던 전통사회 여성이 그것도 처녀가 귀신이 되어서 목소리를 얻은 것이다.

  그런데 처녀귀신이 귀곡성을 내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담이 약한 사또들이 돌연사하기도 한다. 이것도 자세히 보면, 신분제 사회에서 사건을 대충 덮어버리거나 무마해 버리는 능력 없는 관리는 필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귀곡성을 귀신이 내는 것은 당신이 진실을 마주하고 사건을 해결할 자신이 있느냐를 묻고 있는 셈이다.(최기숙, 173~176)

  그렇다면 소복에 피 묻는 입, 산발한 머리도 어떤 뜻일까? 만약에 처녀귀신이 화려한 옷을 입고 나왔다고 상상을 해보면, 그건 더 이상 처녀 귀신이 아니다. 뭐 선녀 아니면 요괴가 될 것 같다. 입가의 피는 말 못 할 억울한 사연이 있음을 뜻하는데, 소복이나 이런 분장들은 아주 간단하면서 강렬한 효과(최기순, 32)를 내고 있다. 이런 처녀귀신의 의상이나 분장은 처녀귀신의 상처와 소외, 보호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은 여자를 상징하는 문화적 기호가 된 셈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인 부조리를 환기시키는 의상(최기숙, 34)인데, 처녀귀신의 공포는 진실을 상징하고 있고, 진실을 마주할 수 있다면 무섭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처녀귀신의 공포는 이제 재미의 대상이 되었다. 유원지에 귀신의 집에 가면 돈을 내고 공포를 즐기고 있다. 그걸 보면 진실을 마주하는 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을 알았을 때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알려주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어떻게 보면 귀신 이야기로 당대의 부조리를 말할 수 있다면 그 사회가 아직은 건강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덕진공원 처녀귀신

전주 덕진공원에도 처녀귀신이 산다. 조기호 시인의  시집『전주성』에 나오는 물귀신 이야기다.

 

덕진 방죽 물귀신

군인도 아닌 것이 순사도 아닌 것이
푸른 전투복 차림으로 다방이며 술집으로
빈둥빈둥 놀고먹는 인중 긴 소주사 아저씨
 
전쟁 통에 홀로 된 공동산지기 큰딸이
팔자를 고친대서 선을 보였더니
 
그 길로 달고나가
국물만 홀짝 떠먹어보고는
발길을 돌려버려서 덕진 방죽 연못가에 10문 반짜리 흰 고무신을 나란히 벗어놓고
치마폭을 둘러써버렸습니다
 
(중략)
 
동네 아낙들 수군거리는 입소문으로는
용산다리 폭격으로 건지산이 놀랄 때
덕진 연못도 함께 뒤집혀서
 
넋 건져서 잠재워놓은 물귀신들이
뿔뿔이 기어 나와 저승 가는 길동무를 잡아가는 탓이라고들 하였습니다.

전주 덕진공원(2017)

  전쟁 통에 여성 혼자 어찌할 수 없던 현실, 그래서 세상을 등진 이야기인데, 사회적 모순이 있는 한 귀신 이야기는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귀신의 입을 통해 진실을 말하고 있는데, 사실 귀신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과 예술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처녀귀신은 무섭지 않다. 만약 공시생이 처녀귀신을 본다면 그녀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시험에 합격하지 않을까?  [월간 김창주, 2017]

 

† 『기문총화』는 조선 말기에 나온 이야기책인데, 주로 역대 명사들의 일화로 이루어져 있다.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이름난 선비들의 이야기를 모아 놓은 책이다.

‡ 형조참의는 추조참의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형조의 정 3품 벼슬인데, 사극 같은 데서 보면 관아의 중앙에 앉아서 재판을 총괄하는 장면을 볼 수가 있다. 형조는 법률, 소송, 형벌과 감옥에 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를 말한다.

 

참고한 책과 작품

『기문총화』
권헉익 저, 홍석준 외 역,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Ghosts of War in Vietnam)』, 산지니, 2016
최기숙, 『처녀귀신』, 문학동네, 2010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정서웅 역, 『파우스트』, 민음사, 1999
조기호, 『전주성』, 신아출판사, 2016, 240~241쪽.
김덕문, 『여고괴담』, 출판시대, 1998
루퍼트 샌더스,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 2017
이응복 연출, 김은숙 극본, 『도깨비』, 2016
장재현, 『검은 사제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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