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7. 17:22ㆍ考愛
저포 놀이가 맺어준 사랑 이야기인데요.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나오는 「만복사저포기」입니다. 만복사에서 저포를 놀이를 한 기록이란 제목의 소설입니다.
문: 저포 놀이가 뭔가요? 만복사는 절 이름인가요?
답: 저포는 나무로 만든 주사위를 던지며 노는 놀이인데요. 윷놀이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만복사는 현재는 남원에 있는 절터로 만복사지를 말합니다. 말 그대로 주춧돌만 남아 있는 황량한 절터인데, 이야기를 듣고 나시면, 꼭 한번 가게 되실 거라고 확신합니다. 특히 겨울에 가면 묘미가 있습니다.
문: 황량한 절터를 찾을 정도로 이야기가 감동적이란 말씀인데, 시작해 볼까요.
답: 남원에 만복사 동쪽에 장가를 못 간 양생이란 사람이 살았어요. 하는 일이 달밤에 나무 아래에 서성거리며 시를 짓는 게 취미인 청년인데, 하루는 내 짝은 어디에 있을까 상상하는 시를 읊조리는데, 만복사의 부처님 앞에 가서 저포를 던지면서 게임을 하자고 해요.
문: 그러니까 부처님 앞에서 주사위를 던지면서 내기를 하건가요?
답: 그렇죠. 자기가 지면 음식을 장만해서 공양을 하고, 양생이 이기면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합니다.
문: 그래서 어떻게 되나요?
답: 이겨요. 탁자 밑에 숨어서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데, 잠시 후에 열대여섯 살 정도 되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나타납니다. 부처님 앞에서 저는 어쩌면 이렇게 박명하단 말입니까 하면서 탄식하면서 탁자에 사연을 적어서 바치는데요. 읽어 볼게요.
지난번 왜구가 침략해 들어와서 집들을 불태워 없애고, 백성들을 노략질하였습니다. 저는 가냘픈 몸이라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깊은 규방에 들어가 끝까지 여자의 정절을 지켰습니다. 지금은 부모님이 저를 멀리 한적한 곳에 피신시킨 지 벌써 삼 년이 되었습니다. 빈 골짜기에 숨어 지내며, 아름다운 밤을 홀로 지내며, 아리따운 새가 홀로 춤추는 것 같은 제 신세를 불쌍히 여겼지요. 긴 여름날과 지루한 겨울밤이면 간담이 찢어지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저를 불쌍히 여겨 제 운명에 인연이 있다면 일찍 그를 만나 즐거움을 누리게 해 주십시오.
문: 전쟁 통에 피난 온 처녀가 짝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빌고 있는데, 결국 양생의 소원을 들어준 셈이 되는군요.
답: 그렇죠. 양생이 탁자 밑에서 아름다운 얼굴과 자태를 보다가 뛰쳐나옵니다. 그리고는 만복사 행랑 끝에 있는 나무판자로 된 좁은 방에서 깊은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절에서 첫 종을 치는 새벽빛 어슴푸레할 때 손을 잡고 여인의 집으로 함께 걸어가요.
문: 아주 개방적인데, 당시 현실 하고는 좀 안 맞는 것 같다.
답: 그렇죠. 양생이 그 집이 인간 세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데, 사랑에 빠져서 두 번 다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조금 뒤에 여인이 양생에게 말을 하는데, 이곳의 사흘은 삼 년과 같으니, 집에 돌아갈 때가 되었다며 이별 잔치를 해줍니다. 곧 다시 만나게 된다면서요.
문: 이거 처녀귀신이군요.
답: 맞아요. 잔치가 끝나고 여자가 은주발을 하나 주면서 양생에게 말합니다. 내일 우리 부모님이 보련사에게 자기 제사를 지내니, 길에서 함께 기다리다가 함께 절로 가서 부모님을 뵙기로 하지요.
문: 무서워서 도망가나요? 길에서 기다리나요?
답: 길에서 기다리는데 지체 높은 집안에서 딸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 보련사로 가는 그 여자의 부모를 만납니다. 은주발을 들고 있으니까 처음에는 도굴꾼으로 의심을 해요. 딸을 장례 때 함께 묻은 부장품을 훔쳐온 것으로 알고요. 양생이 사연을 말해줍니다.
문: 부모가 놀랐겠군요. 그 부모들도 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다.
답: 외동딸이 있었는데, 왜구가 쳐들어와서 전쟁 통에 죽어요. 무덤도 못쓰고 장례도 못 치렀는데, 오늘에서야 제대로 제사를 지네로 가는 길이었어요. 부모는 딸이 오는 것을 기다려 달라고 말합니다. 놀라지 말고요. 양생은 우두커니 길에서 혼자 기다립니다.
문: 슬픈 사랑 이야기네요. 그래도 처녀귀신이 좀 이기적이다는 생각도 드네요.
답: 그렇죠. 여인이 나중에 양생에게 고백하는 대목이 있어요. 읽어 볼게요.
저도 저승의 법도를 어긴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어려서 책을 읽어 예의에 대해서는 대강 알고 있습니다. 치마를 걷고 남자를 따라가는 행실이 음란하다는 것과 예의를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쑥 덤불 우거진 곳에서 살다 보니 예의를 잊었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한번 일어나자 끝내 이를 지킬 수 없었습니다. 지난번 만복사에 가 복을 빌 때 부처님 앞에 향을 사르고 스스로 복이 없음을 탄식하다가, 우연히 인연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살림을 꾸리며 평생 그대를 높이 받들면서 술을 빚고 옷을 꿰매며 일생 동안 아내의 도를 다하려 했지요. 한스럽게도 업보는 피할 수 없어서 저승길로 가야 합니다. 이제 곧 다시 병풍을 걸어 들어가듯, 천둥신이 천둥을 몰아치듯, 구름과 비가 걷히듯, 까마귀와 까치가 은하수에서 흩어지듯 떠나야 합니다. 이제 한번 헤어지면 뒤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기 어렵습니다. 떠날 때가 되니 슬프고 황망하여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문: 여자는 저승으로 떠났고, 양생은 이후에 어떻게 되나요?
답: 슬픔을 이기지 못해서 집과 밭을 모두 팔아서 사흘간 여자를 위해 천도재를 지내주어요. 그 뒤로 다시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약을 캐면서 살았는데, 양생이 어떻게 세상을 마쳤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며 끝을 맺고 있습니다.
문: 양생이 끝까지 여인을 잊지 못하고 사랑을 지키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소설을 쓴 김시습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답: 양생이 길에서 우두커니 혼자 기다리면서 의리를 지킨 것처럼 김시습 역시 비슷한데요. 김시습은 생육신으로 알려져 있죠.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해요. 이걸 계유정난이라고 하는데 이후에 보던 책을 모두 불태우고 평생 방랑자로 살게 됩니다.
문: 불의를 참지 못했다는 말씀인데, 생육신이 뭔가요?
답: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목숨을 바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를 사육신이라고 하고,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은 목숨을 잃지 않고 살았지만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던 사람을 생육신이라고 합니다.
문: 그렇군요. 만복사저포기가 사랑 이야기 같지만, 김시습의 이런 절의가 소설에 투영되어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답: 사육신을 거열형으로 처형되던 날 밤이었어요. 거열형은 죄인의 다리를 두 대의 수레에 묶어서 몸을 두 갈래로 찍어 죽이던 형벌인데, 온 나라 사람들이 벌벌 떨고 있을 때에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에 주섬주섬 담아다가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한 사람이 바로 김시습이었습니다.
문: 시대를 잘못 만난 사람이란 생각도 드네요.
답: 그렇죠. 다섯 살 때에 시를 지을 정도로 천재로 알려져 있었는데 안타깝죠. 금오신화를 지은 후에 책 안쪽에 오백 년 후에나 이해받을 거라면서, 책을 짓고 석실에 숨겨 놓았습니다.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자괴감과 또 한 편으로 자존심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문: 그래도 소설을 남겼기에 김시습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금오신화』에 다른 작품도 있나요?
답: 『금오신화』에는 「만복사저포기」 외에도 「이생이 엿본 사랑」, 「염마왕과의 대화」, 「부벽정에서의 짧은 만남」, 「물거품처럼 사라진 용궁 잔치」까지 다섯 편의 소설이 있는데, 기회가 되면 또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월간 김창주 2015]
※ 위에서 인용한 글은 다음 책에서 옮겨 일부 단어를 이해하기 쉽게 수정했습니다. 정확하고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분은 아래의 책을 참고해 주세요.
김시습, 김경미 역, 『금오신화』, 펭귄클래식,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