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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돈과 쿠데타

by 월간 김창주 2021.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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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흥부가』 중에 「돈타령」이 있지요. 오늘은 돈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했는데요. 그중에서도 미국으로 반출되었다가, 2013년에 환수된 호조태환권 대한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문: “호조태환권”이 무언가요?

답: 2013년에 환수된 것은 정확히 말해 호조태환권 인쇄 원판인데요. 근대식 인쇄기술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지폐가 ‘호조태환권’입니다. 이것을 인쇄할 수 있는 인쇄 판본이 환수되었는데요. 그 가치를 한 번 알아보면요. 1972년과 1978년에 화폐 전시회가 국내에서 열리는데 이때 호조태환권이 전시가 됩니다. 당시 가격이 250만 원이었고, 집 한 채가 300만 원 정도 했습니다. 2010년에는 9,250만 원에 거래되기도 했습니다.(동아일보, 2013.8.28.A13면) 지폐 한 장 가격이 이 정도면, 인쇄 원판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하기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문: 호조태환권은 지금은 사용할 수 없는 종이에 불과한데, 이렇게 가격이 매겨지는 이유가 뭘까요?

 문: 아마 여러 가지 가치가 있겠지만, 화폐 수집가들은 희소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호조태환권이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식 인쇄기술로 제작이 되었지만, 일본인들의 이권 다툼 때문에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하고 모두 소각했기 때문에 희귀한 화폐로 알려져 있습니다. 호조태환권 인쇄 원판”은 원래는 덕수궁에 보관되어 있었는데요. 1951년 한국전쟁 중에 미군 병사가 불법으로 유출을 했다가, 2010년 가족들이 미국의 한 경매회사에 처분을 하려다가 알려지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최근에 환수가 되었는데, 당시 낙찰 가격이 3,900만 원 정도였습니다. 전문가들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국보급의 보물’로 감정하고 있습니다.

 

문: 호조태환권이란 근대식 화폐를 만든 용도, 이유는 뭔가요?

 답: 1891년에 고종이 「신식 화폐 조례」를 공포하고 1892년에 호조 산하에 태환서를 설치를 합니다. 태환을 교환이라고 생각하시면, 교환소가 되죠. 이 태환서를 설치하고, 당시의 구 화폐였던 엽전을 회수하기 위해 일종의 교환 화폐인 호조태환권을 만들게 됩니다. 이렇게 화폐개혁을 실시해서 경제의 근대화를 이루려는목적이 있었지만, 일본의 방해로 사용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호조태환권 원판(국립고궁박물관 소장, https://www.gogung.go.kr)

문: 19세기 말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은 어땠나요?

답: 1876년 개항 당시에는 주로 상평통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부피가 크고 운반이 매우 불편했어요. 예를 들어 부산에서 대구까지 만원을 운송하면, 운송료가 1,300원 가량이 필요했습니다. 또 당시에 200원의 대금을 지불하기 위해서는 엽전 10만 개를 세어야 했는데, 셀 수가 없으니까 무게를 재서 지불하는 방법을 사용했어요. 엽전은 동으로 만드는데 엽전의 화폐가치보다 동 가격이 올라갈 경우에는 일본 상인이 불법적으로 엽전을 사들여서 수출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엽전을 대신해서 당시 여러 나라의 화폐 사용과 유통이 지속적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화폐의 유통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일본과 청나라의 의도적 정책에 의해서 크게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김호범, 1991)

 

문: 당시에도 어떤 대책을 세웠을 것 같다.

답: 외국 화폐의 침투로 인한 화폐제도의 동요를 경험한 후에 1890년대에 들어서 근대적 화폐금융제도를 시도합니다. 직접적인 계기 중에 하나는 당오전의 발행과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 때문이었는데요. 개항 이후 국가재정이 파탄에 직면한 조정은 1883년 2월에 당오전 제조를 결정합니다. 상평통보 보다 5배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지만, 1894년에는 엽전과 거의 구분 없이 사용됩니다. 당오전의 남발은 국가재정을 보완하지 못했고,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는데요. 당오전 남발과 외국화폐의 계속되는 침투로 당시 정부는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는데, 그것을 구체화한 것이 『신식 화폐 조례』입니다. 하지만, 이권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압력과 개화파의 내분, 일본인들의 이권 쟁탈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김호범, 1991)

 

문: 개혁을 위해 만들어진 호조태환권이 결국 사용하지 못했다는 말씀인데, 이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지폐는 어떤 건가요? 

답: 이후 우리나라가 지폐를 다시 만든 것은 1945년 9월 1일 해방이 된 후였습니다. 100원짜리 지폐를 만드는데, 1930년대 말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매청에 입사한 사람의 월급이 35원 정도였고, 일반학교 졸업생은 25원 정도였는데, 당시 정부가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서 고액권을 남발하면서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돈의 도안이 문제가 되기도 했는데, 흰 수염이 탐스럽게 그려져 있었어요.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있었다고 해요. 운양 김운식이다 등 여러 추측이 있었는데, 1947년에 한 시민이 중앙방송국에 문의를 합니다. 당시 조선은행에서 그냥 수복을 기원하는 신선이다고 답변을 해서 『상식 독본』이란 책에 수록이 됩니다. 이 지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까지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 결국 호조태환권이 실패한 후에 50년이 넘어서야 우리 지폐를 다시 만들 수 있게 된 거네요.

답: 화폐 개혁을 방해하고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경제를 붕괴시키는데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 나치들이 영국 경제를 붕괴시키기 위해, 영국의 파운드화를 위조지폐로 만든 ‘베른하르트 작전’이 있습니다. 2007년 슈테판 루조비츠키 감독이 제작한 『카운터 페이퍼』란 영화가 이 작전을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전주에도 영화 같은 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20세기 초에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이 고종을 폐위시키려는 쿠데타 음모를 벌이는데요. 국내에 있던 서상집이 이 쿠데타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백동화 위조를 제안해요. 유길준은 경제가 붕괴되기 때문에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나중에 제작을 찬성하는데요. 이 위조를 누가 하느냐? 전주의 최초의 일본인이라고 알려진 ‘모리나가 신소’가 합니다. 당시 기밀문서에 이런 문구가 나와 있어요. 집에서 제작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 인천 앞바다에다 배를 띄워놓고 기계를 사서 대량으로 제작을 하겠다.” 여기서 집이란 전주에 있는 집이겠죠. 어디였을까요?

  결국 이 음모는 실패를 하는데요. 위조화폐 제작을 제안했던 서상집 때문이었습니다. 서상집이 조정에 밀고를 하는데요. 이런 편지 내용이 남아 있습니다. 한쪽으로는 유길준과 일당을 고발해서 공을 세우고, 한쪽으로는 백동화를 위조해서 그 단물을 먹자. 애초부터 서상집은 쿠데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또 재미있는 사실 중에 하나는 당시에 유길준과 일본에서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은 동학교도를 잔인하게 진압하고,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해 일본으로 피신해 있던, 이두황입니다. 이후 이두황은 1910년 전북북도장관, 지금 말로 바꾸면 도지사로 취임을 합니다.  [월간 김창주,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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