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20. 08:53ㆍ문화
시장이 1인 시위
2013년 진주의 남강유등축제를 서울시가 베껴갔다고 진주시장이 서울시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한 일이 있다. 또 비슷한 시기에 일본의 한 인터넷 매체가 한국의 연등회는 일본 아오모리현의 네부타 마쓰리를 베꼈다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서로 원조라는데, 진주의 남강유등축제는 어떤 축제인가?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대한민국 대표 축제로 선정된 축제를 살펴보면, 안동국제탈춤축제와 보령머드축제가 각각 3회씩 대표 축제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명예 대표 축제가 되었고 강진청자축제가 2회, 김제지평선축제가 1회, 진주남강유등축제가 3회 연속 대표 축제로 선정되어 명예 대표 축제로 지정되었다.(2013년 현재) 그만큼 진주 주민들의 자부심과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진주는 밤이 빛나는 축제로, 매년 10월 초순 사이에 직장인의 퇴근 시간에 맞춰 축제를 시작한다. 평일에도 사람이 북적이는 소비자 중심의 축제이고, 2012년 문화관광축제 중 소비지출이 평균값을 크게 상회해서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진주는 역사적 사실과 자연환경을 축제화해서 진주만의 독특한 콘텐츠를 보여주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다.
진주남강유등축제의 유래
진주시는 진주남강유등축제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에 하나인 진주성 전투에서 유래했다고 말한다. 조선군이 왜군의 진주 남강 도하작전을 막고,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을 2000년부터 10년 이상 특화해서 지역 축제로 만들었다며, 서울시가 2009년부터 청계천에서 진주와 유사한 등 축제를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반면에 서울시의 입장은 등 축제는 불교의 영향을 받은 아시아 전역에서 열리고 있는 보편적인 축제라고 주장한다. 기원이 임진왜란이 아니라 통일신라시대이며, 등을 물에 띄우는 행사는 1988년~1993년에 한강에서 먼저 열렸다고 주장을 하면서 원조 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일본이 원조?
사과로 유명한 일본 아오모리현에서 매년 8월 2일~7일에 펼쳐지는 ‘네부타 마쓰리’라는 축제가 있다. 한여름의 무더위와 졸음을 쫓고 농작물의 풍년을 기원한다는 의미로 시작되었다. 여기서 ‘네부타(ねぶた)’란 나무, 대나무, 철로 무사 인형에서부터 가부키나 신화 등의 명장면을 표현한 틀을 만든 후 그 외부에 종이를 붙여 원하는 형태로 꾸미고 그 안에 등불을 밝혀 화려하게 만든 구조물을 말한다. 중세까지만 해도 간소하게 만들어져 그리 화려하지 않았는데 에도(江戸) 시대부터 그 크기가 커지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일본의 인터넷 매체인 겟뉴스가 한국의 연등회는 네부타 축제를 베낀 것으로 한국에게 이 인형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며, 원조 논쟁을 일으켰다.
우리나라 연등회의 시초
일본의 중세가 12세기 말부터 시작하고 17세기 초부터 에도시대가 시작된다. 17세기부터 지금의 네부타 축제처럼 등의 크기가 커졌고, 적어도 12세기 이전에 이 축제가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연등회는 6세기 중엽 신라시대 진흥왕 때 불교행사인 팔관회와 함께 열렸다. 인도에도 중국에도 연등회에 관련한 기록들이 있어서 아시아 전역에서 오래전부터 있었던 행사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는 관등 행사를 매년 정월 15일에 개최한다는 기록이 있다. 경문왕 6년(866년) 정월 보름에 왕이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燃燈)을 보고 백관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동국세시기』(홍석모, 1849)에는 정월을 등절(燈節)이라 해서 등을 밝히면서 밤을 새우고 대보름에는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 달맞이를 하면서 풍년과 흉년을 점치고 풍년을 빌었다. 고대로부터 전해 온 풍년기원제의 성격을 띤 행사였다. 후에 불교 전래 후 불교의 등 공양인 연등과 만나면서 팔관회와 아울러 국가적인 행사로 거행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고려시대에 성대하게 열렸는데, 만등회는 등 1만 개를 점등하는 공양 의식으로 이 만등회는 이미 1166년(의종 20)에 열린 기록이 있다. 공민왕 때에는 어린이들이 연등의 비용을 만들기 위해서 한 달 전부터 종이를 오려서 대나무에 기를 만들어 달고 성중(城中)을 다니면서 쌀과 베를 구하는 호기풍속(呼旗風俗)이 본격화되었다. 공민왕도 두 차례에 걸쳐 어린이들에게 쌀 등을 주었다. 이 호기풍속이 연등행사에 따르는 민속으로 변해서 조선시대의 연등에도 영향을 준다.
인도와 중국의 연등회
인도에서는 연등의 발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불교 경전 또는 불교설화에서 세 가지 버전의 이야기로 전해져 온다. 『현우경(賢愚經)』 「빈녀난타품(貧女難陀品)」의 가난한 여인의 등불 이야기, 빈녀일등(貧女一燈) 이야기, 당나라 의정(義淨)이 번역한 『근본설일체유부비내야약사(根本說一切有部毗奈耶藥事)』(권12) 등이다. 처음 이야기에서는 연등을 야간 조명이라는 실용적인 기능으로서,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성불 기원으로, 마지막 이야기에서는 공양만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 대한 의복·재물·음식의 공양도 공덕을 쌓는 일임을 강조하고 있어, 의미가 다중적으로 전이되는 모습이 보인다.
중국에서는 인도의 연등이 서역을 경유해서 중국에 전래된다. 이후 중국 토착신앙과 합쳐지는데 한나라 무제(武帝;B.C.141-87) 때 연등 의식이 시작해서 당나라 때에도 행해진다. 정월 15일에서 17일까지 3일간 장안의 안복문(安福門) 밖에 5만 개의 등을 달고, 궁녀와 낭녀(娘女)들 2천여 명이 그 밑에서 가무를 했다고 전해진다. 한나라 무제 때는 도교를 숭상했는데 새해의 풍작을 기원하는 농경의례의 성격도 지녔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한나라 무제 때 시작된 도교적인 연등이 한나라 명제(明帝;57-75) 때에 와서는 불교적인 연등으로 변하게 된다.
왜 원조 논란이 생길까?
축제라는 것이 본래 공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관광이란 것과 만나면서 축제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마치 음식점처럼 원조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사실 원조 논쟁은 특산품이나 음식점에서부터 먼저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논개의 고향, 홍길동, 심청이, 콩쥐팥쥐, 또 백제의 서동과 같이 지역의 설화에 이런 논쟁이 옮겨가고 있다. 축제는 나누고 교류한다는 지점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지자체의 대부분의 축제들이 주민들에 의해 자발적인 만들어지기보다는 특정 전문가에 의해 기획이 되고 시민의 세금에 의해 만들어지다 보니 수익창출에 대한 측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축제를 나눈다는 의미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꽃을 가게에서 천 원을 주고 구입하면 등가의 교환이 일어나지만, 이것을 부모님에게 선물을 하면 천 원 이상의 새로운 가치가 발생을 한다. 이렇게 증여는 교환과 다르게 인격을 갖추고 있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 공익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축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월간 김창주, 2013]
참고문헌
문화체육관광부, 『2012 문화관광축제 종합평가 보고서』, 2013, 81쪽
네이버, 『두산백과』(검색어: 아오모리네부타마쓰리)
김광일, 「燈축제 ‘원조’ 싸움」, 『조선일보』, 2013.8.2. A30면
서성일, 「“서울시가 진주 유등축제 표절” 진주시장 1인시위에 서울시 ‘발끈’」, 『경향신문』, 2013.7.31.
황혜진, 「서울 · 진주 ‘등축제 갈등’ 결국 법정싸움으로 가나」, 『헤럴드경제』, 201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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