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옥의 예술세계

2021. 6. 16. 04:56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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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에 활동한 음악가, 박성옥의 예술세계에 대해 이야기인데요. 먼저 아쟁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을 하면요. 산조아쟁이란 말이 194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문: 그러면 그전에는 산조아쟁이란 없었다는 말인데 왜 그런 거죠?

답: 보통 정악아쟁, 산조아쟁으로 구분을 하는데요. 1940년대에 산조아쟁이 만들어 지기 전의 아쟁과 구별하기 위한 용어입니다.

 

문: 아하 그럼 산조아쟁을 박성옥 이란 분이 만들었나 보군요.

답: 그렇습니다. 산조아쟁은 1940년대 박성옥이란 분이 무용 음악 반주곡을 만들기 위해, 아쟁을 개량해 만든 것으로 전해지는데요. 정악아쟁이라 불리어지는 아쟁은 고려 때 중국에서 수입한 악기로 당시에는 대나무를 매끈하게 다듬고 송진을 발라서 연주를 했습니다.

 

문: 그럼 지금은 무엇으로 연주하나요?

답: 현재는 개나리 가지에 송진을 발라서 연주를 하는데 보통 7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 부드러운 음색을 내기 위해서, 개나리 활대 대신에 말총으로 만든 활대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현재는 8~10줄 까지 다양한 크기와 현 수를 가진 아쟁이 국악창작곡에서 연주되고 있습니다.

 

문: 산조아쟁을 만들었다는 박성옥은 어떤 분인가요?

답: 박성옥(1908~1983)은 전남 목포 태생인데요. 최승희를 비롯 김백봉, 강선영, 조택원 등의 무용 음악을 맡아서 작곡과 연주를 했습니다. 특히, 최승희의 음악적 동반자 또는 최승희의 전속 악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승희(미상, 1962년 이전)

문: 작곡에 연주에 악기 개량까지 하셨네요.

답: 무용 음악의 반주를 위해 전통악기를 개량했는데, 산조아쟁, 철가야금, 철금, 양금 등의 개량악기를 만들어서 반주음악에 사용을 했고, 무용가이자 국악인인 김천흥(1909~2007)의 증언에 따르면, 실험정신도 볼 수가 있어요. 1930년에 조선음악무용연구소에서 자주 만나 친하게 되었는데, 악기에 대한 연구열이 대단해서 한 번은 오르간 건반 틀에 가야금 같은 악기를 부착시키고, 페달을 발로 눌러서 소리를 연장·확대해 보려고 연구 제작한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 줄을 문지르는 활도 나무와 말총을 겸용해서 음색을 자유롭게 했다는 증언이 남아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양한 표현력이 가능하도록 연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문: 주로 활동을 하셨던 당대의 평가는 어땠나요?

답: 왕성하게 활동을 하던 시절에도, 수재 음악가, 또 후대의 평가도 천재 예술가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10대 초반에는 바이올린을 공부하다가, 국악과 전통예술에 매료되어서, 한국무용의 거장인 한성준에게 무용을 배우고, 1938년에는 가야금 독습서를 집필합니다.

 

문: 가야금 독습서 말 그대로 가야금을 독학하는 책이라는 뜻 같은데요. 어떤 내용인가요?

답: 1938년 3월 9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고악의 수재 박성옥 군, 가야금 악보 편성, 초보독습자 해득 무난’이란 제목으로 박성옥의 사진과 책을 크게 소개하고 있는데요. 

 

당년 28세의 청년으로 음악에 대하여 천재적인 소질을 가지고, 14세에 양악을 연구하는 한편, 조선 고악에 대한 연구도 병행, 그간 양악 악보를 이용하여 보급을 힘써도 보았으나, 양악과 비교하면 음정과 음색이 판이하여, 양악 악보에 편성한 악보는 극히 부자연스러워, 독습자나 초보자도 능히 해독할 수 있도록 도안을 삽입하여 집필하였다.

古樂의 秀才  朴成玉 君 伽倻琴樂譜編成 初步獨習者도 解得 無難 기사의 사진(국사편찬위원회, 『 동아일보 』 1938.3.9.)

문: 왜 양악 악보로 표기하는 게 부자연스러운 거죠?

답: 1939년에 라음을 440Hz로 런던에서 통일을 해요. 서양에서도 라음이 다 달랐어요. 나라마다 각기 다른 고유한 음계가 있고, 음악어법이 있습니다. 이런 특징이 오선보에 정확히 기입을 할 수 없기에 우리식의 기보법을 고안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문: 그러니까 우리 전통음악을 제대로 계승할 수 있도록 고안도 하셨네요.

답: 그렇죠. 이때 구전으로만 전승되던 가야금 전승 방식의 변화를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최승희의 무용 음악을 담당하면서, 산조아쟁, 철가야금, 양금 등을 개량했고, 1960년대에는 선화예술단, 리틀엔젤스예술단의 단장으로, 1970년대까지 작곡가로 활동합니다.

 

문: 가야금 독습서를 편찬할 정도면 가야금 연주도 뛰어나셨을 것 같다.

답: 1937~1940년까지 경성방송국 선곡표에는 박성옥의 가야금 연주가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가야금을 개량하기도 하고요. 철가야금의 제작 배경은 무용 음악에 새로운 음향 효과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문: 예를 들면 어떤 식인가?

답: 아쟁을 개량해서 울림판이 있는 산조아쟁을 만들었고, 가야금은 명주실 대신에 쇠줄을 얹어서 철가야금을 만들고, 양금에 페달을 제작해 양손으로 연주했고, 거문고를 개량하기도 했습니다.

 

문: 이렇게 악기를 개량한 것은 최승희 영향이 큰 것 같다.

답: 최승희는 무용 창작에서 반주 음악을 중요시했고, 음악가를 우대해서 많은 투자를 했는데요. 이런 말도 했어요. “국악기의 발달 없이는 한국무용의 발달도 없다”는 주장인데요.

 

문: 국악기가 발달해야 한국무용도 발달한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요?

답: 당시에는 마이크 시설이 있는 공연장이 많지 않았고, 또 무대의 크기가 서구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국악기의 개량이 필요했을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철가야금의 예를 들면 음량이 커지고, 여음이 오래 지속되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서 무용 음악에 많이 사용됩니다.

전통악기 연주 장면, 일제강점기(국립중앙박물관)

문: 그렇죠. 국악기 서양악기에 비하면 음량이 크지 않으니까요?

답: 또 철가야금이 여음이 길어서 정적인 동작에 잘 어울린다고 합니다. 최승희는 장구 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 이유가 타악기 소리 때문에 가야금의 선율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랬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문: 최승희가 음악가를 우대했다고 하셨는데, 최승희와 박성옥의 만남, 공연활동은 어땠나요?

답: 최승희가 일본에서 활동할 당시에 앞에서 말씀드린 한국무용의 대가 한성준에게 무용을 배웠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한성준이 도쿄로 판소리 명창들의 음반 취입 차 갈 때마다 제국호텔에 모셔놓고 조선의 전통춤을 개인 레슨 형식으로 배웠다고 합니다.

 

문: 이때 만난 것인가요?

답: 그렇죠. 한성준이 자신의 제자인 박성옥을 최승희에게 소개해서 무용 음악을 맡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에게 서양의 모던댄스를 배웠는데, 자신의 안무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고 해요. 스승인 이시이 바쿠가 조선의 전통에 관심을 가지라고 조언을 합니다.

 

문: 아하 그래서 우리나라 춤을 배우게 된 것 이군요.

답: 처음에는 서구적 이상을 동경했기 때문에 전통무용을 광대나 기생이 추는 천한 춤으로 등한시했는데, 스승의 권유 때문에 한성준에게 입문해서 전통춤을 습득하고 국악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문: 그래서 무용 음악도 한국음악이 필요했겠군요.

답: 그렇습니다. 이때 최승희의 음악적 파트너였던 일본인 피아니스트 하야시와의 작업도 자연히 단절이 되었고, 이후에 박성옥은 최승희를 위해, 아쟁, 가야금, 양금 등을 개량하고, 이 새로운 악기로 서구식 극장 환경에 적합한 무용 음악을 창작하게 됩니다.

 

문: 최승희는 월북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박성옥의 이후 음악 활동은 어땠나요?

답: 최승희는 남편 안막과 함께 해방 후 1946년에 월북을 하는데요. 이후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박성옥은 무용가 조택원과 함께 활동을 합니다. 1947년 신문기사를 보면, 조미문화교류 조택원 씨 도미, 또 조택원 도미 고별 무용공연이란 기사가 있습니다.

 

문: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는군요.

답: 당시 기사에는 무용가 보다 음악가를 더 주인공처럼 다룹니다. 박성옥의 고향, 음악 입문기, 개인 사진과, 개량한 악기의 사진을 실어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1949년에는 유엔 위원단 환영 공연인 국극 “해님과 달님”의 음악 편곡을 맡기도 합니다.

 

문: 무용, 작곡, 악기 개량 등 다양한 활동을 하셔서, 많은 작품을 남기셨을 것 같다.

답: 예술가가 그렇듯이 사업적인 구상은 없었던 거 같아요. 악기를 개량해서 만들면 주위에 친한 사람들에게 그냥 주셨다고 해요. 현재도 그 악기를 사용하는 분들이 계신데요. 양손으로 연주하고 페달이 달린 양금은 그 규모가 꽤 컸던 거 같은데요. 한국전쟁 때 불탄 이후로 속이 상해서 다시는 만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작품세계에 대한 조명은 세 편 정도의 논문이 있는데, 박성옥에 대한 조명은 최근에야 이루어져 있고, 작품에 대한 연구가 하나둘씩 나오고 있습니다.  [월간 김창주,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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