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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명성황후와 을미사변

by 월간 김창주 2021.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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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시간에는 1893년 시카고만국박람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시카고만국박람회와 120년 만에 돌아온 국악기

2013년 120년 만에 미국에서 국악기가 돌아왔습니다. 같은해 10월 1일부터 12월 1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테마전시실에서 특별전이 열렸는데요. 이 악기들은 1893년에 고종이 시카고에서 열렸던 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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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년에는 동학농민혁명이 있었고, 이번에는 1895년 조선으로 가보겠습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을미사변이 일어났습니다. 을미사변을 한 줄로 말씀드리면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서 자행한 조선 왕후 살해사건”(한국민족대백과)입니다. 보통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일본의 국가적 범죄라는 게 상식이지만, 일본에서는 일본공사 미우라와 일본의 폭도들이 독자적으로 벌인 사건이고 그 이상의 배후는 없었고 대원군이 적극 협조했다는 왜곡된 입장을 보이기도 합니다.

 

문: 왜 그런 왜곡, 거짓말을 할까요?

답: 폭도라 하면 민간인이고, 일본인 장교라고 하면 국가 공권력인데요. 그 배후가 누구냐에 따라 일본이 받는 국제적 비난이 다릅니다. 당시의 서양 외교관들은 일본공사관이 의도한 대로 대원군이 배후라고 생각하지만, 일본공사관의 협의가 곧 드러나게 됩니다. 결국 일본 정부는 일본공사 미우라가 사건에 연루되었음을 시인합니다. 사건에 관련된 50여 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시키지만, 3개월여 만에 증거 불충분으로 모두 석방을 시킵니다. 당시 상해에서 서양 선교사들이 발간한 『북화첩보』는 조선과 일본 주재 통신원의 다양한 보고를 토대로 발간이 되었는데요. 이토 내각이 배후이고, 이노우에가 중개역, 미우라가 하수인 역을 했다고 말합니다.

 

문: 일본이 을미사변에 대원군을 이용했다는 말씀인데 어떤 내용인가요?

답: 당시에 대원군과 명성황후는 정치적으로 대립 관계여서, 이것을 이용한 것인데요. 일본은 대원군을 을미사변의 배후처럼 보이기 위해 사건 현장에 대원군을 납치해 갑니다. 이렇게 명성황후를 제거하고 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하려 한 것처럼 일본이 꾸민 것인데요. 이것이 사실이 아님이 많은 증거를 토대로 밝혀졌고, 단적인 예가 사건 이후 대원군이 정치 현안에 개입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후에 사건 현장에 참여했던 일본인 기자 기꾸치 겐죠, 고바야카와 히데요는 대원군, 조선근대사, 『민후조락사건』, 『조선잡기』라는 책을 펴내면서 대원군과 조선 왕후의 중세적 정권다툼으로 한국근대사를 왜곡합니다. 다시 말하면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갈등으로 비하, 왜곡한 것입니다.

 

문: 당시에 조선에 있던 서양인들은 어떤 기록을 남겼나요?

답: 을미사변에 대한 상세한 일기를 기록한 주한프랑스 주교 뮈텔은 사건 다음날 “대원군이 왕세자를 폐위시키고, 이준용을 왕세자로 책봉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모든 일들이 대원군의 복수극”이라고 판단을 하지만 사건 일주일 후에는 “대원군이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의 희생자였고, 지금 대궐에 죄수처럼 감금되어 있는 상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검은 옷을 입은 일본 자객이 대원군의 거처에 침입했고, 대원군은 그들에게 오랫동안 저항하고 버티다가 폭력적인 사태로 번질 것을 우려한 대원군이 가마에 올라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국공사대리 알렌 역시 처음에는 “대원군의 혁명”이라는 내용으로 본국으로 보고를 했지만, 진상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깊숙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주한러시아공사 베베르는 “대원군은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 군대에 의해서 공덕리 저택에서 경복궁으로 이송되었다.”라고 본국에 보고를 하는데요. 일본 자객이 손자인 이준용을 위협하자,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경복궁 전경(문화재청)

문: 당시에 일본이 대원군을 이용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배경은 뭔가요?

답: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에 조선 침략을 제일 목표로 삼고 있었는데, 걸림돌이 청나라와 러시아였습니다. 청나라는 수도인 북경의 안전을 위해서 조선이 타국이 지배되면 안 되었고,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 건설을 통해서 동아시아로 진출을 모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세력을 견제합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청나라, 러시아와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요. 결국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하는데,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요동반도 할양을 명시해 놓아서, 일본이 만주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하게 됩니다. 이렇게 요동반도 할양이 명시되자, 러시아는 일본의 목표가 시베리아횡단철도에 있다는 것을 알고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서 삼국간섭을 단행합니다. 또 국내에서도 반일적 움직임이 표면화되면서 러시아 세력과 손을 잡고 일본을 몰아내려고 했습니다.

시모노세키 조약 장면(1895.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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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그럼,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함께 일본을 몰아내려고 했나요?

답: 그렇습니다. 주한러시아공사 베베르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견제하려고 했고, 명성황후는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의 압제로부터 탈피해서 고종의 권력을 복구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일례로 베베르는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의 공사와 함께 이노우에를 만나서 일본의 독주를 경고했고, 명성황후는 이것을 계기로 이노우에의 행동에 정면으로 도전을 하는데요. 이때 일본은 청일전쟁 직후 전력을 소모한 상태여서 러시아와 상대할 준비가 갖춰져 있지 않았습니다. 러시아를 상대하지 않고 조선 문제를 처리하는 손쉬운 방법은 직접 조선 쪽을 상대해서, 러시아와의 핵심 연결고리를 끊는 것이었는데요. 이것이 명성황후 시해로 이어진 것입니다. 주한러시아공사 베베르는 을미사변을 “왕 또는 왕비당에 속하는 모든 조선인을 겨냥한 것”이라고 판단을 했습니다.

 

문: 이런 상황, 명성황후 시해 계획을 당시 조선 정부에서는 알지 못했나요?

답: 미우라의 전임 일본공사였던 이노우에가 1895년 9월 17일에 서울을 떠납니다. 그 직후에 서울에서는 왕후 제거설이 나돌았습니다.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는 “왕실에서는 이틀 전에 위험이 닥치리라는 것을 알았다, 궁중의 보초병이 줄어들고, 일본군의 움직임은 수상쩍기만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0월 7일 밤에 궁궐에서는 명성황후의 측근인 민영준이 기용되면서, 주도권이 다시 왕실로 집중되는 것에 만족해했고, 그날 밤 궁궐 후원에서 달구경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또, 왕실의 재정을 맡았던 정병하는 “일본군대가 대궐에 들어옴은 성체를 보호코자 함이니, 의심하실 바가 없사온즉, 피하여 나가시지 마시옵서”라고 명성황후의 피신을 막았습니다. 침입자의 목표가 왕비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조선인 가담자 역시도 왕비를 폐위시키고, 고종이 사약을 명성황후에게 내리는 방법을 생각했지, 그런 야만적인 계획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문: 가슴 아픈 사건입니다. 이후 우리나라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나요?

답: 을미사변은 19세기 말 항일의병이 봉기하는 원인이 되었고,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망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1896년 초에는 청년 김창수(백범 김구의 초명)가 일본군 밀정을 살해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계기가 됩니다. 1909년 안중군이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총살한 이유 중 하나가 을미사변이었습니다. 또한 헐버트에 기록에 의하면 명성황후와 아리랑이 밀접한 관련한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요. 당대의 매천 황현은 명성황후가 무속인, 예인들과 가까이한 행적을 비난했지만, 이들이 후에 항일운동에 참여한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이 아리랑을 노래했던 예인이란 명확한 증거는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이후 재미있는 사실 중에 하나는 명성황후를 우리 역사에서 복권시킨 것은 역사학계가 아니라, 예술계입니다.

 

아리랑과 허득선

서도잡가의 명창 허득선 허득선은 조선시대 고종 임금때 활동한 음악가다.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평양의 경림동 출생이다. 앞을 못보는 어머니를 위해 어릴때부터 노래와 우스갯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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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아리랑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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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study is to deconstruct the origin of Arirang in Kangwon-do analyzing the records, etymology, and musical feature about Arirang. It analyzes periodical situation after 1883 when Arirang was popular with Maecheonyarok written by Hwang hyun and Kor...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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