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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시카고만국박람회와 120년 만에 돌아온 국악기

by 월간 김창주 2021.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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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120년 만에 미국에서 국악기가 돌아왔습니다. 같은해 10월 1일부터 12월 1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테마전시실에서 특별전이 열렸는데요. 이 악기들은 1893년에 고종이 시카고에서 열렸던 만국박람회에 출품했던 악기들입니다. 총 8점입니다. 120년 전에 태평양을 건너간 악기는 생황, 대금, 양금, 거문고, 장구, 피리 2점이었습니다. 한 번씩 다 이야기를 전해드릴 악기들인데요. 이때 악기만 간 것이 아니라, 궁중 악사 10명이 함께 가서 연주를 했고, 당시에 만국박람회 참가는 외세의 간섭이 심해지던 상황에서 자주 국가의 위상을 알리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 먼저 전시회는 어떤 내용인가요?

답: 총 3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에서는 ‘시카고만국박람회와 조선 전시실’이라는 제목으로 1893년 ‘대조선’이라는 국호와 태극기를 앞세우고 국제박람회에 처음으로 참가한 배경과 추진과정을 당시 사진 기록과 해설을 중심으로 소개를 하고, 당시 파견됐던 궁중 악사 10명을 비롯한 일행들의 방문 여정 등을 볼 수 있습니다. 2부에서는 태평양을 건너온 국악기를 볼 수 있고, 특징적인 부분을 보면 장구의 가막쇠에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예전에 올공금이란 이름으로 소개해 드린 장구의 부속품입니다. 전주에서 평양으로 생강을 팔러간 상인이 기생에게 올공금을 받아 다시 큰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드렸죠. 3부에서는 악서와 악보, 음악 연주가 담긴 김홍도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문: 만국박람회라는 단어를 오랜만에 듣는데요, 19세기 사람들에게 만국박람회는 어떤 의미였나요?

답: 1793년에 파리 루브르미술관이 일반인에게 공개가 되면서, 유럽에 많은 공공미술관이 생기는데, 이렇게 미술관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것은 19세기부터입니다. 그런데 대중이 미술품을 보는 곳은 미술관보다는 만국박람회였고, 관람객은 기술과 산업 제품을 전시하는 기계관에 더 몰렸지만, 미술전시가 박람회의 이미지를 고급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박람회가 일정기간 동안 짧게 운영되었지만, 미술관보다 훨씬 많은 관객을 대상으로 세계 각국의 미술품들을 한 장소에서 볼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고,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동양을 처음 알게되는 장소가 19세기 박람회의 아시아 전시관이었습니다. 일본은 1862년부터 참가를 해서 1910년까지 36번의 박람회에 참가하고, 일본 미술품의 미적, 기술적 우수성을 과시하고 서구 국가들과 대등한 국제적 지위에 서고자 노력을 합니다.

 

문: 1893년 시카고만국박람회의 모습은 어땠나요?

답: 1893년 시카고박람회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되었습니다. 미국이 세계적인 대국이 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한 박람회였습니다. 당시 박람회장은 두 권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엘리트 문화를 상징하는 화이트시티와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미드웨이 플레잔스입니다. 비서구 국가의 민속촌이 미드웨이 플레잔스에 전시되었고,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일본, 중국, 인도, 터키의 바자(시장), 남태평양의 촌락, 각종 민속음식을 맛 볼 수 있었고, 민속촌 전시는 화이트시티 전시에서 유럽과 경쟁하기 어려웠던 비서구 국가들이 주최측과의 암묵적인 합의하에 민속촌 전시에 참여를 했습니다. 당시 일부 안내서에서는 먼저 화이트시티를 보고 미드웨이 플로잔스를 보아야 그 명백한 차이를 느낄 수 있고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충고하기도 하는데, 이 교훈이라는 것이 문명개화를 앞세운 서구 제국주의의 정당화이고 우월감을 느끼게 해서 제국주의 공모자로 만들었다고 비평하기도 합니다.

1893년 시카고만국박람회 풍경(C. D. Arnold (1844-1927); H. D. Higinbot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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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1893년 시카고만국박람회에 우리나라는 어떤 물품을 전시되나요?

 답: 25톤 정도의 화물이 보내졌고, 고종실록에는 “소라껍질을 박은 장롱, 수를 놓아 만든 병풍 등의 물건은 각국 사람들이 애착하며 칭찬하였고, 귀국할 때 박물관 총무관을 만나니 악공에 대한 상패와 물품을 미국 공사 알렌에게 부쳐 보내겠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당시 주한미국공사관의 부총영사이자 선교사였던 알렌이 박람회 전시에 도움을 주었는데, 악인의 동행도 알렌의 주선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알렌은 후에 이들 악사들의 연주가 “조선의 고악(古樂)은 동양 고악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개회식에서 미국의 클리블랜드 대통령과 책임자였던 장경원이 만날 때 연주를 해서 좋은 반응 얻었다고 하는데, 공연은 미국공사였던 허드의 주선으로 극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조선국왕이 축하 공연으로 선물한 것임을 설득해서 공연이 성사되었습니다.

 

문: 당시 서구인들로부터 우리나라의 평은 어땠나요?

답: 일찍부터 일본은 박람회에 참가해서 물품과, 국가 이미지를 홍보하는데 당시 일본 국회는 자발적 기부금 63만 엔을 시카고에 전달해서, 좋은 전시관을 선점하게 됩니다. 당시 중국을 이상하고, 차갑고, 감정이 없는 나라, 또는 억압받는 여성들과 폭군 같은 남성을 상징하는 나라로 보았던 것에 비해, 일본은 예의바르고 섬세한 감각을 가졌고,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나라일 뿐 아니라 서구인들도 배울 점이 있는 나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처음 박람회에 참여했고, 일본이나 중국의 전시 규모보다 월등히 작아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일본 전시 면적이 39,542평방피트(1,111평), 중국이 6,390평방피트(180평), 우리나라가 899평방피트(25평)에 불과했습니다.

 

문: 박람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모습은 어땠나요?

답: 전시관을 지키던 젊은 조선인은 관람객의 여러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는 것에 지쳐 우리나라의 지도 옆에 “조선은 중국의 일부가 아니라 독립국가다. 조선어는 중국어나 일본어와 다르다. 조선은 전기를 쓰고 있고 증기선, 전보를 사용하지만 아직 철도는 없다”라는 글귀를 써놓았다고 합니다. 당시 미국에 유학 중이던 윤치호는 일기에 다른 나라 전시관에 비해 너무나 작고 초라한 우리 전시관에 가슴이 메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부를 말씀드리면 “나는 오전 11시에 조선관에 갔다. 그리고 거기서 오후 5시까지 서 있었다. 왜 무엇을 위해 그랬었나, 설명할 수는 없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문: 1893년 이후에도 만국박람회에 참가하나요?

답: 우리나라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지 3년 후인 1900년 파리박람회에 참여를 합니다. “극동에서 가장 베일에 가려져 있으며, 또한 이웃이 가장 탐하는 나라, 그리고 외부 세계에 노출을 꺼려 왔던 조선의 만국박람회 참가는 놀라운 일이다”라는 평과, 우리나라는 비단, 도자기, 장롱, 자개장, 병풍, 금속제품, 금박을 입힌 목조불, 그림과 책, 수공예품을 중심으로 전시합니다. 실무를 담당했던 민영찬은 초라해 팔 수 없었다고 민망해 했다는 기록, 주한 프랑스 외교관이었던 모리스 쿠랑은 “유럽은 이 나라를 야만으로 취급하려 했다. 이번에 처음으로 우리 눈앞에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를 앞선, 특히 현대 세계의 영광이라 할 만한 인쇄술에서 섬세하고도 복잡한 문화유산을 전시하여 조선은 유럽인에게 최초로 국위를 자랑하게 되었다”평하기도 합니다.

 

참고문헌

김영나, 「‘박람회’라는 전시공간: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와 조선관 전시」,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Vol.13, 2000.

정호경, 「한국 근대기 미술의 제도화 과정 연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전문사과정, 2005

강구열, 「조선국악기 120년 만에 美서 귀환」, 『세계일보』, 2013.9.26.(목).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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