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과 양금

2021. 5. 28. 10:46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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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양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윤동주 시인의 「간」을 읽어보겠습니다. 양금 하고 관련이 있습니다.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들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龍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 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문: 간 이야기가 나오니까 판소리 중에 별주부전이 생각나네요.

답: 맞아요. 아마도 거기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 같은데요.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자기 성찰, 양심에 대한 시로 기억을 해요.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라는 대목에서 현대인의 스트레스와 알코올에 찌든 모습도 보이는 듯하고요.

 

문: 용궁의 유혹이 출세에 대한 유혹으로 해석해도 될 것 같아요.

답: 그렇죠. 프로메테우스에서는 청년이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제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양금을 연주했던 조선시대 북학파와 그들이 꿈꾸었던 대동 사회, 요즘 말로 하면 문화복지 사회가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문: 거창한 주제인데, 양금 하고 방금 읽었던 시 하고 어떤 관계가 있는가?

답: 시에서 나온 코카서스 하고 관련이 있어요. 양금의 기원은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덜시머(Dulcimer)', 영토 분쟁이 심한, 러시아 남부 코카서스의 '산타르(Santir)'가 원형으로 주로 이슬람교의 음악에 쓰였습니다.(2020.08.28 - [실크로드의 음악] - 7세기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신라 공주의 사랑)

남 캅카스(코카서스) 지역 국가의 정치 지도(Gusdn961020, 2014)

문: 그러니까 시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고 갖다 붙이신 거군요? 참 먼 나라 악기 같고 생소한데요.

답: 10C~12C 경 신성 로마 제국의 십자군전쟁 때 유럽으로 전래되어 피아노의 전신인 클라비코드, 쳄발로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테오 리치에 의해 중국의 명나라에 전래되었고, 우리나라에는 18세기 영조 때 청나라에서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 서양으로 들어가서 피아노로 진화를 했다 이 말씀인데, 우리나라에는 누가 들여오나요?

답: 양금을 1765년에 홍대용이 중국 북경에 가서 보고 국내에 들여옵니다. 연주 방법을 놓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7년 후인 1772년이 되어서야 우리 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전해져 옵니다.

 

문: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양금은 어떤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인가요?

답: 혹시 ‘구라철사금’이란 악기를 들어보셨나요? 양금의 다른 이름이에요. 구라는 유럽을 뜻하는 구라파에서 따왔고 철사는 말 그대로 철로 된 줄, 금은 악기를 뜻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유럽에서 온 철 가야금 정도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현악영상회상」과 같은 줄풍류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연주법은 가야금이 손가락으로 튕겨서 소리를 내는 발현악기라면, 양금은 대나무 채로 현을 두드려서 내는 타현악기입니다. 사다리꼴 모양의 나무 상자 위에 철사로 된 현이 놓여 있습니다.

 

문: 양금이 우리나라에 전해졌을 때 이야기 같은 게 있을 것 같다.

답: 홍대용이 처음 양금을 접한 이야기를 기록한 중국 견문록인 담헌연기에는 “양금은 서양에서 나온 것을 중국이 모방하여 쓰고 있는데, 오동나무 판자에 쇠줄을 써서 소리가 쟁쟁 울린다, 멀리서 들으면 종이나 경쇠(옥이나 돌, 또는 놋쇠로 만든 타악기) 소리 같다”고하여 타현악기인 양금의 특징을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A musician playing a yangqin in a Cantonese street band in San Francisco.(Alex Stoll, 2008)

문: 그냥 악기를 들여와서 연주를 하는 데, 7년이 걸렸다고 하니, 연주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답: 1772년에 홍대용이 양금으로 우리 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양금을 조율했다면, 김억은 실재 양금을 우리 음악에 맞게 연주한 사람으로 판단이 됩니다. 김억은 홍대용의 별장인 유춘오에서 홍대용과 함께 연주를 즐겼습니다.

문: 양금을 연주한 김억은 어떤 사람인가?

답: 양금을 잘 연주했다고 전해지는 김억은 기인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나라 사람은 흰옷을 입는데, 김억은 비단옷만을 입고 다녀서, 동네 불량배들이 봉변을 주려고 옷을 세 번이나 찢었는데,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갈아입고 나오자, 불량배들이 부끄러워 사과를 합니다.

 

문: 연주가가 아니라 도인이네요.

답: 연주를 함께 즐겼던 사람들이 기록에 남아있는데요. “홍대용은 가야금, 홍경성은 거문고, 이한진은 퉁소, 김억은 양금, 장악원 악공인 박보안이 생황을 연주”합니다. 고전적인 말로는 줄풍류를 즐겼고, 요즘 말로 하면 그룹사운드였던 셈입니다.

 

문: 양금을 들여온 담헌 홍대용은 어떤 인물이었나요?

답: “홍대용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과학사상가로, 지전설(地轉說)과 우주무한론(宇宙無限論)”을 주장했고, 이러한 자연관을 근거로 화이(華夷)의 구분, 중국과 주변국이 오랑캐라는 구분을 부정합니다. 중국이 중심이 아니라는 이야기죠.

청나라 시대 문인 엄성(嚴誠)이 그린 홍대용(엄성, 1766)

문: 요즘 말로 하면 평등한 공존을 말한 거 같다.

답: 또,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고, “사회의 계급과 신분적 차별에 반대하고, 교육의 기회는 균등히 부여되어야 하며, 재능과 학식에 따라 일자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조선 후기의 과학사상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 그러네요. 앞에서 악공 하고 함께 어울 것을 보면 몸소 실천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답: 그렇죠. 홍대용의 별장에서 열린 악회의 구성원이 실학자와 중인, 악공인데, 신분을 초월해 연주회를 열었다는 점에서 실학자들이 악회를 통해 대동 사회 구현을 실천했다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문: 어려운 말이 많이 나오는데, 대동 사회는 뭔가요?

답: 대동은 『禮記(예기)』「禮運篇(예운편)」에 나오는 말로, 정여립이 했던 계이름도 대동계죠. 간략히 말씀드리면, 남의 부모 내 부모, 남의 자식, 내 자손을 똑같이 생각하고, 불구가 된 사람은 모두 편안히 보호를 받고, 집집마다 문을 열어 두고 닫는 일이 없는 사회를 대동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 유교식 유토피아라고 해도 될까요?

답: 우리 선배들이 꿈꾸던 사회였어요. 하나의 큰 도가 행해지는 이상적인 사회를 말합니다. 요즘같이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에서 더욱 본받아야 할 철학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요즘 말로 하면 문화복지사회를 예견한 것 같습니다. 앞에서 홍대용의 악회가 요즘말로 하면 그룹사운드라고 했는데요. 적절한 비교는 아니지만, 1960년대 미국의 히피 문화와 비교해 보아도 재미있습니다.

러시아의 모던 히피 운동 가수(alexkon,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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