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31. 21:22ㆍ음악
악기 해금에 이야기를 전해드린 적이 있지요. 또 조선시대에 해금을 연주한 유득공을 소개해 드린 기억이 있어요. (2021.05.16 - [음악의 역사] - 해금과 유득공) 유득공은 정조 때 활동한, 규장각의 검서관이고, 북학파였습니다. 기억나시죠? 이 분이 『발해고』라는 역사책을 써서 이후 발해가 한국사에 편입되었는데, 오늘은 발해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문: 벌써 27년 전이네요. 1994년에 발표된 「발해를 꿈꾸며」라는 노래가 여기서 시작되는군요. 그렇다면 『발해고』는 언제 세상에 나왔나요?
답: 유득공이 1784년에 『발해고』를 기록하는데요. 발해는 698년에 개국해서 926년에 나라가 망합니다. 발해가 개국한 지 거의 천년이 지나서 기록이 되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27년 전에 발표된 노래는 최신곡입니다. 천 년 전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유득공은 뛰어난 상상력의 소유자였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해금을 연주하기도 했지만, 25세부터 시인으로도 이름을 날렸습니다.
문: 예술적 상상력만으로 역사를 쓸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답: 그렇죠. 이 예술적 상상력을 갖추고, 관원으로 1776년부터 세 차례 중국을 여행합니다. 이때 상상만 했던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의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을 직접 가보게 됩니다. 또 북학파와 교류하면서 발해에 관한 자료를 접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문: 상상력만으로 쓴 건 아니다는 말씀이네요.
답: 유득공은 『발해고』의 서문에서 “고려의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라 외에 발해를 포함한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라고 탄식을 합니다.
문: 역사가 약했기 때문에 나라도 약해졌다 그런 말로 들리네요.
답: 유득공이 『발해고』를 기록한 것은 “당시 발해 영토가 거란과 여진에게 넘어갔고, 고려 또한 발해사를 서술하지 않아 이 땅을 되찾으려 하여도 근거가 없게 된 것이 그 이유였다.”고 말하는데요. 역사를 기록하는 기억과 상상력은 곧 국력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 왜 그렇죠?
답: 사람이나 국가나 기억을 상실하면, 존재, 정체성 자체가 상실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고요. 유득공의 상상력과 역사 서술의 철학, 그가 한 공부들이 잘 조합 되어서 『발해고』라는 책이 나왔다는 점에서 그 근원은 유득공이 좋아한 시와 해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평은 유득공이 서자 출신이지만, 재능 있는 인재를 정조가 기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하곤 합니다.
문: 발해와 발해의 음악, 어떤 나라이고 어떤 음악이었나요?
답: 중국은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라고 해석해서,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현재 자신들의 영토인 만주에 세워졌고, 또 발해 사람들 대다수가 말갈족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중국이 말하는 동북공정입니다. 반면에 우리의 주장은 만주는 본래 고구려의 땅이었고,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세웠다는 점, 고구려의 문화가 수용된 점, 발해는 고구려 출신 대조영이 국가를 세웠고, 만주지방의 말갈족을 포용했다고 말합니다.
문: 역사 시간에 배웠던 기억이 나네요.
답: 이때 고구려 유민이 주로 상류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말갈족이 하류층을 형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왕은 고구려의 국왕임을 밝히고 있기도 한데요. 이런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놓고 누구의 나라이냐에 대한 논쟁이 있습니다.
문: 관점에 따라 다른 해석이 있다는 말씀인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답: 요즘 식으로 해석을 하면, 발해는 다문화국가가 아니었을까요? 발해는 당시에 고구려, 부여, 옥저, 말갈 등의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국가였고, 서기 698년부터 926년까지 200년 넘게 운영이 되었습니다.
문: 그렇다면 다양한 민족문화를 화합시키기 위해 어떤 묘안 펼쳤지 궁금한데요.
답: 저도 궁금한데요. 나중에는 당나라도 결국 발해의 자립을 인정하고 외교의 대상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뭐 당연한 말이겠지만, 다양한 문화가 수용된 가운데 그 안에서 발해만의 독자적인 문화가 있었겠죠. 당시 일본에 발해의 음악이 전달되어, 일본의 궁중에서 연주되기도 했습니다. 그 묘안 중에 하나가 음악이 아니었을까요?
문: 그럼 발해의 음악이 현재도 남아 있나요?
답: 공식적으로는 어떤 음악인지 들을 수는 없고, 남겨진 그림이나 기록 등을 통해 추측을 할뿐입니다. 발해에 여러 문화가 공존한 점을 보면, 발해의 음악은 고구려의 음악적 요소와, 말갈의 음악적 요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문: 그렇다면 어떤 음악인지 상상할 수 밖에 없겠군요.
답: 중국과 일본의 기록을 토대로 재구성할 수 있는데, 발해가 멸망한 지 250년이 지난 후인 12세기 일본의 후지와라 노모로나가 편찬한 『인지요록』에 발해 음악으로 고조소, 신조소, 신말갈 이렇게 세 악곡이 남아있습니다.
문: 악곡명이 남아있군요.
답: 여기서 조소가 중국 흑룡강의 지류인 오소리강을 뜻한다고 하고요, 신말갈은 말 그대로 발해를 이룬 말갈족을 뜻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엽동과 김건민이란 학자가 이 악보를 분석해 악보로 정리한 연구가 있는데요. 아직까지 듣지는 못했습니다.
문: 그렇다면 발해 음악에는 어떤 악기가 사용되었나요?
답: 신라시대 왕립음악기관은 음성서였고, 조선시대는 장악원, 발해는 태상시였습니다. 발해의 악기에는 무엇이 있다고 목록이 나온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정효공주묘의 벽화에서 공후, 비파, 박판을 연주하는 세 악사가 등장을 합니다. 두 개의 현악기와 하나의 타악기로 이루어진 구성입니다. 가야금이 있었던 것처럼 발해에도 발해금이 있었는데요. 정확한 형태는 고증이 되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거문고 또는 가야금 형태의 현악기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문: 다양한 문화가 공존한 발해는 아직도 연구할 분야가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답: 전주와 전주한옥마을 역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해 있습니다. 중국의 『주례고공기』에 따라서 전주라는 도성이 설계되었고, 전동성당은 전주성벽을 주춧돌로, 프랑스 신부가 설계하고, 중국인 인부가 벽돌을 만들어 지어졌습니다. 일본식 가옥이 현재도 남아있기도 하고요. 자신의 문화로만 이루어 진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드는 지점입니다. 문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공존하고 공유할 때 그 가치가 있습니다. 서로의 다양한 문화를 공감하는 시대, 이런 능력을 요구받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발해의 역사에서 배울 지점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월간 김창주,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