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탈춤극(기악)

2021. 5. 22. 19:30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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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시간에 백제의 음악을 말씀드리면서, 612년 백제의 미마지가 일본에 전한 기악, 탈춤극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은 백제의 탈춤극(기악)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해 보았습니다.

 

문: 지난 시간에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는 탈춤극이 끝나면 탈을 불사르는 전통이 있다고 했는데 왜 그랬나?

답: 악한 것을 쫓고 경사를 맞이하기 위해 마지막 가면을 불사르는 절차가 있었는데, 탈을 불사르는 것은 부정을 타지 않게 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라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230여 점의 기악탈이 그대로 남아서 국보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문: 그러면 백제의 기악 역시 기록이 많지 않아서 일본에 남아 있는 것을 토대로 추정이 가능하겠네요?

답: 네. 기악의 원형을 파악하기 어려운데, 일본에 남아 있는 탈과 백제의 후손들이 일본에서 세습적으로 기악을 전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서, 이것을 토대로 백제 탈춤극의 모습을 추측해 보려고 합니다.

 

문: 기악이 탈춤극을 뜻하는 것 같은데, 정확한 의미는 뭔가요?

답: 본래 기악은 부처를 공양하기 위한 노래와 춤을 말하는데, 일본은 백제인 미마지가 전한 기악, 기가쿠를 한 장르로 고유 명사화한 것입니다. 기악무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기원설이 있습니다.

 

문: 인도에서 왔을 것 같은데요.

답: 인도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고대 무용 유산이 인도 북부의 라다크, 네팔, 부탄, 시킴, 티베트, 몽골 등지에 “마니 림두”, “참”, “도무”라는 명칭의 불교 무악인데요. 몽골의 “참”은 기악무처럼 가면을 쓰고 묵극, 팬터마임의 형태인데, 옴니버스 형식으로 극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희극적 장면이 중간 중간에 배치되는 형태가 기악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문: 지난 시간에 미마지가 기악을 오나라에서 배워서 일본에 전했다고 한 것 같은데?

답: 그렇습니다. 몽골이 “참”을 16~17세기 수용하고, 백제의 미마지는 7세기에 기악을 일본에 전하는데, 이 기악의 전파 경로가 백제는 몽골이 아닌 다른 경로 수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륙을 통해 전해 받은 것이 아니라, 바닷길로 전해졌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문: 인도에서 기악이 시작되었다는 말씀 같은데, 어떤 유사성이 있나요?

답: 인도의 사자춤인데, 가까운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 베트남, 싱가포르, 태국, 티베트, 네팔, 스리랑카 등 아시아의 거의 모든 나라에 산재되어 있습니다. 사자춤의 전래과정을 알려주는 고고학적 유물에는 현재 중국 신강성 투루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당삼채인 사자무상,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고대 티베트 궁전의 벽화에도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자춤이 인도에서 발생해서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에 전파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Snow lion dance at the "Karma Temple", Kagyu Monlam 2010/11, Bodhgaya(Michael Eisenriegler)

문: 우리나라 기록에도 사자무가 있나요?

답: 사자무는 삼국사기 「악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량기, 티베트 북쪽의 있던 서량의 춤곡의 영향을 받은 것을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 특징 중에 하나가 아시아 여러 사자춤에는 오색사자가 많아서 동일 계통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문: 오색사자가 뭐에요?

답: 다섯 가지 색의 옷을 입은 사자라는 뜻인데, 본래는 다섯 가지 색의 다섯 마리의 사자가 등장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숫자가 하나로 줄고, 이 사자에 다섯 가지 색으로 치장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문: 그러니까 탈춤이 인도→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중국을 통해 전파되었다는 말씀인 것 같은데요.

답: 이것을 꼭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면 탈춤극 장면이 있는데, 인도사람 같이 터번을 쓰고, 코가 큰 탈을 쓰고 있고, 춤 동작이 X자 형태로 다리를 꼬고 손뼉을 치는 자세인데, 이 동작이 중국에서 유행하지 않았고, 문헌이나 유물에도 거의 등장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도 전역에 산재해 있는 고대 사원의 조각에서 볼 수 있어서, 인도 문화가 모두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수입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 어디에서 왔을까요?

답: 미마지가 7세기에 3세기에 망한 오나라에서 기악을 배워 일본에 전했다는 것으로 추측해 보면, 오나라를 중국 남방의 어느 지역으로 추측할 수 있고, 또 백제금동향로의 악사 중에 북치는 모습이 인도네시아, 또는 인도의 따블라로 추측하는 학자도 있어서, 다른 전파 경로가 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실크로드의 세 가지 길, 초원길, 오아시스길, 바다길 중에 바다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문: 앞에서 백제 기악의 전파 경로에 대해 말씀을 하셨고, 역사서에는 백제의 기악에 대한 어떤 기록이 남아 있나요?

답: 백제기악의 전파 경로가 인도에서 시작해서 백제,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이야기인데요. 백제의 기록이 많지 않아서 앞과 뒤, 인도와 일본의 기록으로 추측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악에 대해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는 불경인 대정신수대장경인데요. 가면을 쓰고 여러 가지 노래와 춤으로 기악을 했는데, 쟁, 적, 공후, 소, 슬을 연주했고, 인간의 괴로움과 세상의 공허함을 담고 있었습니다.

 

문: 일본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나요?

답: 일본에서는 6세기에 오나라의 지총이 ‘기악조도일구’를 가져 왔는데, 조도 일구는 악기, 가면 등 기악에 쓰이는 도구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7세기에 본격적으로 백제의 미마지가 일본의 소년을 모아 가르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 600년 정도가 지나서 일본의 교훈초에 공연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 백제 기악의 모습은 인도와 일본 그 중간 어디쯤에 있을 것 같은데, 교훈초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나요?

답: 교훈초에는 행도(행진)이 있은 후에 가면놀이가 시작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진하기 전에 피리를 연주하고 타악기 박자에 맞춰 줄을 세우는데, 사자,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사람, 피리부는 사람, 머리에 모자를 쓴 사람, 타악기를 치는 사람 순서로 서는데, 여기서 모자를 쓴 사람은 일반인 보다 지위가 높은 관을 쓴을 사람을 뜻합니다.

 

문: 공연 내용이 궁금하네요?

답: 이후에 놀이마당에 도착하면 사자춤을 추는 것을 시작으로, 탈을 쓴 사람들이 골계적(코믹적)이고, 외설적인 연기를 아홉 개의 장에 걸쳐 연행을 합니다. 미마지가 기악을 전하고 600년이 지난 후에 기록이 되어서, 처음과는 다른 변형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이 되는데요. 이 부분에서 백제의 기악이 어땠을지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문: 백제인 미마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답: 몇 가지 학설이 있는데요. 예능을 갖춘 승려 신분의 연희자 집단의 대표, 또 특정인의 이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고승 또는 예술가를 뜻하는 말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일본에서 기악을 세습적으로 전승하는 사람을 재인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고려와 조선의 재인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문: 그런데 미마지 기악을 배웠다는 오나라는 어디일까요?

답: 오나라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는데, 중국의 강남 지역으로 추측하기도 하고, 오나라가 한국의 고대 국가 중 하나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오국한국내재설이 있고, 일본에서 기악을 오악이라고도 하는데 오를 쿠레라고 읽는데, 섬진강이 백제 남부에서 일본에 왕래하는 중요한 항구였기 때문에, 섬진강 중류에 있는 구례라는 설을 제기한 학자도 있습니다. 또 오국이 백제를 뜻한다는 학설, 황해도 봉산설도 있습니다.

 

문: 백제의 탈춤극, 어떤 모습이었을지, 추측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답: 일본에서는 백제 기악의 복원을 위한 노력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는데, 나라현에 있는 덴리대학 아악부를 중심으로 복원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 사쿠라이에 미마지가 처음 기악을 전한 곳임을 알리는 비석이 남아 있습니다. 백제 장인들에 의해 전해진 절, 약사사에서 매년 5월 5일에 기악 야외공연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문: 우리나라에서 복원 움직임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답: 2003년에 백제기악전승보존회가 만들어졌고, 2004년부터는 공주에서 열리는 “백제문화제”에서 백제기악을 공연하고, 기악탈을 복원해서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백제기악에 대해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기록과 유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일본에 보존된 기악탈의 연구로부터 그 실마리를 풀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이 밖에 우리의 산대놀이탈과 일본기악탈의 비교, 또 희랍탈과 비교한 연구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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