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와 기괴한 통문

2021. 6. 20. 22:48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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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는 전주 8미

  전주 8미 중에 하나가 서초다. 서초는 담배를 말하는데 서양에서 와서 서초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보통 국어사전에서 서초는 “평안도에서 나는 질 좋은 담배”를 말한다고 쓰여 있다. 소양면 대흥골과 상관면 마치골 담배가 맛이 좋았다고 하는데 이 8미를 누가 언제 정했는지는 모르겠다. 1921년 전국 연초 제조소는 전주, 경성, 평양, 대구 등 네 곳이 있었다. 전주는 전라남도, 전라북도, 제주도, 충청남도, 충청북도(영동, 옥천) 등 5개도를 관할하는 전매국을 두고 있었다. 당연히 막대한 수익을 올려 좋았을 법 하지만, 농민들에게는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여직공들이 연초 제조소에서 근무하기를 꺼려해, 소개해 주는 사람에게는 3원의 사례비를 주기도 했다. 또 농민들은 담배농사를 기피했다. 당시 전매청에서 근무한 원로의 증언에 따르면 해방이 되고 나서야, 전매청에 들어오려고 “바가지가 터졌”다.

전주지방전매국 담배공장 내 여공들의 작업모습(1943년)

연초 전매령과 담배 단속

  1921년 4월 전주군에서 연초를 경작하는 백여 명의 농민이 담배 값을 너무 헐하게 정했다면 일제히 손에 담배를 들고 군청에 뛰어 들어와 군리원(공무원)과 승강이를 벌였다. 일본인 공무원 두 명이 경상을 당하고 헌병대와 경참관이 출동한 뒤에 해산되었지만, 주모자 5명은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해 7월부터 시행하는 연초 전매령 18조에 의해 민간인이 생산하고 판매하던 담배는 “연초 도매인이나 연초 소매인이 아니면 연초를 판매할 수 없”게 되면서, 조선총독부가 전매권을 갖게 된다. 이에 민간이 허가 없이 생산·판매하는 것을 단속하였다. 1922년 2월 신문지상에 난 한 풍경이다. “조선총독부 전매국 나리들에게 한 말삼 충고 하노라”라는 내용인데, 삼례역전 만리여관에 묵던 전주전매지국 나리들이 시장에서 담배를 단속, 담배를 압수한 사건을 고발한 것이다. 전매국이 담배 토색질을 한다고 비판한 기사였다.

Nicotina tabacum(Franz Eugen Köhler,  Köhler's Medizinal-Pflanzen, 1897)

※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책을 참고해 주세요.

 

전주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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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판매에 대한 단속도 있었지만, 경작에 대한 단속도 있었다. 1922년 7월 충청남도 청양군에서는 전주전매지국이 심은 면적에 초과하거나 더 심은 담배를 일일이 뽑게 해, 연초 전매로 실업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1930년 12월에는 극단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전주연초전매지국 단속원이 장수군 계북면 원촌리에서 임산부를 곤봉으로 난타하여 임산부가 두 달 동안이나 신음하다 절명한 사건이 벌어진다. 속병에 생담뱃잎을 삶아 먹으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네 사람의 밭에서 잎을 한 줌 얻어 집에 보관했는데 이것을 전매국 단속원이 적발한 것이다. 어디서 따왔냐고 임산부를 때리자, 법률에 위반되었으면 고소할 일이지 사람을 왜 구타하냐고 남편이 항변하였고, 부부를 같이 폭행, 두 달 후 부인이 사망한 사건이었다. 남편은 당시 진단서를 내어 고소를 제기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가난한 처지였다. 이 억울한 사연을 들은 기자가 “경찰 당국에서는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터이오?”라고 묻자 주재서 순사는 “글쎄요. 본서에 보고는 하였는데 아직 아모 말이 없소”라고 답한다. 이후 사건 전개는 더 찾아볼 수 없었다.

 

금주 단연 운동과 기괴한 통문

  1923년 2월 전주에서도 민족경제 자립운동이었던 금주 단연 운동이 있었다. 전주노인계부터 전주권번기생까지 “전주군내 각처에서 단연 금주 소비절약 토산물 애용을 실행하는 기세가 자못 맹렬해, 연초 장사들은 담배가 팔리지 아니함에 폐업 속출”했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같은 해 3월에는 연초 경작을 전폐한다는 기사가 있었다. 전주군 구이, 상관, 소양 삼면은 전매국이 생긴 후 지정 연초 경작지가 되었다. 농민들이 경작을 거절하자 전매국에서는 경작을 권유한다. 구이면 안덕리 김군옥은 담배 여든 발을 지고 삼십 여 리나 되는 전매국까지 갔지만 40원어치 담배를 4원밖에 받지 못하고, 계곡리 김복선은 30원어치 담배를 2원밖에 받지 못했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이렇게 경작을 거절한 이유는 담배 값을 태가(駄價: 운송비)도 되지 못하게 무리한 가격으로 전매국이 사들이자 단연 동맹을 벌어진 것이다. 또 담배농사를 짓는 사람이 “자기가 먹기 위해 부스러기나 모아 둔 것을 발견하면 불에 태워버리는 무리한 일이 있었”다.

  1925년 1월에는 전주에 “기괴한 통문”이 배달된다. 전주연초전매지국에서 전주시내 집집에 우편으로 발송한 우편물인데 내용은 “당신 집에서는 평소에 무슨 담배를 피우시오, 그 담배는 어느 곳 무슨 전(가게)에서 사시오, 당신의 식구는 몇 분이나 되시오, 당신 식구가 일 년에 얼마의 담배를 피우시오, 지금 가지고 계신 담배는 무슨 담배요, 또 얼마나 되시오. 전매국원이 출장할 터이니 그때 제출(중략) 부정한 담배를 가지고 있으면 처벌(중략) 각종 담배 이름과 정가를 기록”한 우편물이었다. 집집마다 단속할 정도로 전매국이 막강한 권력이 있냐며 가혹한 제도라는 비판이 덧붙여 있다. 단순한 설문조사로 볼 수도 있겠지만, 담배가 전매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부작용을 알 수 있다.

 

담배는 국가 재정수입

  조선총독부에서는 담배, 소금, 홍삼, 아편을 전매했다. 일제강점기 전주전매국에서 근무한 원로의 증언에 의하면 “전라도에서는 아편을 임실, 관촌, 심평, 신덕에서 시작은 했지마는 성공은 못했죠. 함경도에서 많이 했어, 아편 농사를. 그러니까 전매도 무턱대고 한 것이 아니고, 담배는 국가 재정수입을 늘리기 위해서 한 것이고 소금은 국민이 절대 필요하니까 한 것이고, 그리고 아편은 (조선총독부가) 건강을 보존한다며 한 것이지. 전주에서는 담배하고 소금만 했”다.

  일제강점기 농민은 담배농사를 전폐하고 단연 운동이 벌였지만 “전매국이 그 당시에 있어서는 전주에서 상당히 비중이 큰 기관이었어. 예를 들자면 도지사가 칙임관이라 해서 지금은 이사관 그러지만 그때는 칙임관이고 전매국장이 주임관인가 됐어요. 칙임관은 천황이 직분을 가진 사람을 그렇게 대접을 했고 전매국장이 주임관 그러니까 칙임관 밑에 있는 계급이지. 관용차를 배정할 때에 도지사하고 전매국장하고 외제차를 탔어요. 법원장하고. 그런데 관등 별로 번호를 부여했던가봐. 도지사가 5번 전매국장이 6번인가 그렇게 달고 다녔”다는 증언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인 전매국 관료는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  [월간 김창주,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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