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 29. 16:09ㆍ음악
지난 편에서 페르시아에 다녀왔다. 양금과 비파에 대한 이야기,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헨델과 슈만의 오라토리오를 소개해드렸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이슬람 세력에 의해 멸망한 후, 사라센, 사막의 아들들이 바다의 아들로 변신한다. 이 신흥 아랍무슬림이 바닷길의 주역이 되면서, 동서교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바닷길의 패권을 잡게 된다.
2020/08/28 - [바다의 실크로드] - 7세기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신라 공주의 사랑
이번 편은 동부 아프리카로 간다. 이후 세계사를 간략히 정리하면 13세기에 세계적인 몽골제국이 건립되고, 14세기에는 서양의 르네상스를 계기로 근대적인 경제문화가 싹트면서 동양의 물품에 대한 수요가 더 많아진다. 14세기 중엽에 명나라가 세워진다. 15세기 초에 명나라의 정화(1371 ~ 1434)가 30년간 세계를 누빈 항해가 시작되는데, 선단 승선인원이 2만 7천여 명, 배 한 척에 1천 명이 승선할 수 있는 대규모 원정이었다. 유럽의 15~16세기는 지리상의 발견이라고 요약되는 ‘대항해시대’였다. 동아프리카를 항해한 정화의 탐험부터 시작하겠다.
동아프리카 해안 문화의 특징?
동아프리카 해안의 아랍인들은 아프리카 원주민들과 결혼을 해서, 아랍 부계와 아프리카 모계의 스와힐리(해안을 의미)인들이 탄생했다. 회교 신앙과 아랍인들의 상업위주의 생활양식을 이어 받았다. 14세기 이븐 바투타 여행기에는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 도착하는데, 배가 입항하면 주민들이 작은 배를 타고 접근해서, 배에 올라온 뒤에 “이 분은 내 손님이오”하고 외친다. 그 상인은 이 말을 한 젊은이를 따라서 배에서 내려 그의 집에 숙박해야하고, 주식은 버터에 볶은 쌀밥이다. 큰 나무쟁반에 담겨오는데, 밥 위에는 쿠샨을 얹는다. 쿠샨은 닭고기나 육류, 물고기와 채소 등으로 만든 반찬을 말하고, 밥을 한입 먹고 레몬처럼 신 과실과 식초에 절인 채소를 먹는다. 다시 출항해서 현재의 탄자니아의 살람(Dar es Salaam), 당시의 쿨와시에 도착한다. 매우 훌륭한 도시로 건물도 대단히 단아하다고 묘사한다.
명나라 정화는 아프리카와 어떤 교류를 했나?
사실 정화 이전, 명나라 이전에 중국과 동아프리카 도시국가의 교류가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상당수 발견이 되었다. 송나라 시대 동전이 모가디슈와 게디에서, 도자기가 샹가, 게디, 킬와 등지에서 출토되었다. 정화의 남해원정이 실행되던 15세기 초엽 동부아프리카에는 오늘날의 소말리아에서 모잠비크에 이르는 해안을 따라서 수많은 도시국가 형성되어있었다. 15세기에 북으로 모가디슈에서 남으로 킬와까지 37개의 도시국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정화의 남해원정으로 도자기와 비단이 대량 유입되었다. 수입된 도자기들은 실용품으로도 사용했지만, 조각을 내서 벽을 장식하는데 많이 사용해서, 기둥이나 묘지석에도 박혀 있다. 중국 또는 페르시아제 도자기의 양과 질에 따라 가문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나타내는 척도로 쓰였다. 고고학자 중에는 이 도시국가 유적에서 발굴된 수입 도자기의 양과 질에 따라 도시국가의 번영의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로 여길 만큼 도자기는 수세기 동안 부와 권력의 대명사였다.
부와 권력의 상징인 중국도자기에 대한 기록
동부아프리카에서 널리 사용하는 스와힐리어 고전문학에 파테라는 지명이 나온다. 이곳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있다. 파테는 케냐의 라무와 만다섬 인근에 자리잡고 있는 인도양에 있는 섬으로 해안도시국가였다. 파테에 중국 난파선 선원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살았고, 정화 선단은 파테를 지속적으로 이용했다. 중국과 동아프리카의 교류에 있어서 중요한 장소였다. 이 문학작품에 중국도자기가 나오는데, 앞에서는 중국도자기를 사용하는 파테 상류사회를 묘사하고 있고, 후반부에서는 영화를 누렸던 시대는 덧없이 지나가고 도자 접시로 장식된 폐허로 변한 집에 둥지를 치고 살아가는 새들을 묘사하고 있다. 중국도자기는 찰나의 풍요와 영화를 향한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으로 그려져 있다. 속담도 몇 개 소개한다. "대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민심은 천심), 손가락 하나로는 이를 죽이지 못한다. 코끼리 싸움에 잔디가 짓밟힌다. 믿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다."
동아프리카 음악의 특징을?
사회적 위치의 높고 낮음이 드럼으로 구별된다. 동부 아프리카의 다양한 캐틀(kettle)드럼은 적도 이북 쪽 술탄과 왕들의 권위와 위력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공동체의 정체성을 선언하고 위험, 충고, 격언 등의 내용을 담아 의미를 전달하고자 할 때 드럼을 사용한다. 동아프리카에서는 ‘음악’을 ‘은고마(ngoma)’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드럼을 포함한 다른 악기와 노래, 춤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대표적인 춤곡으로 차카차(Chakacha)는 해안지대의 케냐와 탄자니아의 스와힐리인의 춤과 전통노래인데, 결혼식에서 결혼을 축하하고 난 뒤 신부의 친구들이 기쁘게 추는 춤이다. 아프리카의 벨리댄스라고도 불리고, 지금은 케냐의 국가적 상징처럼 되었다. ‘신부의 친구들이 원을 그려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면서 렛소(leso)라는 엉덩이에 붙는 옷을 입고 추는 춤이다. 어깨를 움직이지 않으면서 천천히 함께 원을 돌면서 추는 춤이다. 앉았다 일어났다 옆으로 뒤로 움직이면서도, 어깨는 움직이지 앉은 채로 골반만 돌리는 이 춤과 음악을 차카차라고 한다.
정화가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것?
정화는 동부아프리카 지금의 케냐 남동부의 해안 도시인 말린디의 왕으로부터 전해 받은 기린을 들여와 명나라 황제 영락제에게 바친다. 영락제는 기린을 이용해서 당시 남경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천도하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다. 기린은 자신의 통치를 승인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준 증표라고 선포해서, 당시 천도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던 논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중국조정에 기린을 바치로 온 동아프리카의 사절들을 위해서 말린디까지 전송해줄 정도로 극진한 대접을 했다.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에서는 사자, 표범, 대서마(아라비아 말)를, 아라비아 반도의 아덴에서는 기린과 장각마합수(미상)를, 아프리카의 모가디시오에서는 花福祿(얼룩말)과 사자를, 아프리카의 브라와에서는 낙타와 타조를 보내왔다. 이때 우리나라 최초로 이 동물들을 본 사람들의 기록이 남아 있다.
동물로 정치를 한다면?
1419년 조선초기 장자충이 현존하는 조선시대 최초의 북경 연행록을 남긴다. 장자충을 포함한 조선 사행단이 북경의 봉천전에서 사자, 기린, 福祿(얼룩말) 등을 구경한다. 영락제 자신의 정통성과 권위를 조선에 과시하기 위한 외교적 행사였다. 이것이 우리나가 사람이 본 최초의 기린, 사자, 얼룩말에 대한 기록이다. 장자충이 가장 기이하게 느꼈던 동물이 얼룩말이었다. “당나귀와 같으나 높고 크며, 목은 길고 흰 바탕에 검은 무늬가 있다. 사람들이 이름을 알지 못하므로, 황제가 스스로 복록이라고 했다”라고 기록한다. 영락제는 정화 함대의 원정 결과로 얻은 이들 동물을 통해 자신의 치세가 태평성세임을 조선에 알리고자 했다. 사행단이 일을 마치고 돌아가야 되는데도 애써 일부 사행원을 잡아두고 이들 짐승의 그림을 받아가도록 명한다. 이때 이 세 동물의 그림을 받아가는 임무가 장자충에게 주어졌다. 장자충은 홀로 남아서 사행단의 출발을 아쉽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일주일 후에 이 ‘삼수도(三獸圖)’가 완성이 되자, 장자충은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참고문헌
※ 거인의 어깨 위에서 읽은 것을 재 정리한 것입니다. 7~8년 전에 정리한 글로 참고문헌 목록을 잊어버렸습니다. 인용 기호가 제대로 표기되지 않았거나, 참고문헌 목록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것은 모두 제 불찰입니다. 제가 잘 기록하지 못한 부분을 알려주시면 감사한 마음으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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