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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 『춘향전』과 남원권번

by 월간 김창주 2022.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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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유의 흥행성적

  우리나라 사람 중에 『춘향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1935년 10월 4일, 단성사에서 우리나라의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개봉한다. 지금이야, 영화에 당연히 배우의 목소리와 음악이 함께 나오기에 때문에 이런 용어를 쓰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달랐다. 무성영화는 변사가 대사를 말하고 상황을 설명해 주었고, 발성영화는 소리 난다는 유성영화라는 뜻이다. 입체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상황과 비교할 만할까?

  당시에 신문으로 보면, “조선 초유의 흥행성적을 내었다”라는 기사를 읽을 수 있다. 단성사 문간에 사람들이 동대문 쪽으로도 일렬로 서고, 창덕궁 쪽으로도 일렬로 서 대성황이었다. 이때 여자들이 제일 놀랜 것은 다듬이 소리, 대문짝 찌그덕거리는 소리였다는 관객들의 반응이 남아있다.

  흥행은 성공한 것 같은데 작품 내용은 어땠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했나 보다. 평단의 평은 좋지 않았다. 첫 발성영화라는 호기심에 성공한 것이다. 각색에서 춘향전의 원전의 맛과 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로 요약할 수 있다. 발성영화였기에 흥행에 성공한 것일까? 춘향이었기에 성공한 것이다. 춘향이는 신분제 사회에서 최하층인 기생이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 그것도 정절을 지킨다는 것인데, 당시는 일제강점기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춘향이는 당시 사람들의 자아상이 투영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 선배들은 각자 가진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호연지기를 길러라”라고 말했다. 요즘은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신념도 아니고 아예 영혼도 버리라고 한다. 자기 자신을 버리라고 하니까, 힐링이 필요한 거다.

※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책을 참고해 주세요.

 

전주미학

전주미학

www.aladin.co.kr

이필우

  영화는 경성촬영소에서 제작이 되었다. 녹음을 위해서 방음시설이 된 50평 규모의 녹음실과 세트장, 분장실이 있었다. 사실 첫 발성영화니까 누가 녹음을 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촬영과 녹음은 이필우, 동생인 이명우가 감독을 했다.

  이필우(1897~1978)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공학도였을까? 1913년에 우미관 영사 기사 조수로 들어가서 일을 배운다. 발성영화 기술을 연구해 일본에서 1931년에 『마담과 마누라』라는 영화 제작에 성공을 한다. 이후에 국내에 들어와 투자자를 설득해서 1935년에 『춘향전』을 만든다. 춘향전 성공을 계기로 다음해에는 동시녹음 영화를 만들고, 음악영화를 만든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 공보실 영화과에서 근무를 한다. 1960년에는 부산에 정착해서 후진 양성과 기술 개발에 주력한다. 2000년에 부산영화평론가협회가 이필우 기념상을 제정한다.

  음악영화의 영화 제목은 『노래 조선』이었다. OK레코드사의 고복수, 김해송, 이난영 등의 오사카 공연 실황 촬영 분과 『춘향전』을 편집해 만든 영화였다. 경성촬영소가 발성영화 제작에 성공한 후, OK레코드사가 대중가요를 유통시키기 위해 만든 영화였다. 이게 다 우리 고전, 남원에 『춘향전』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보통 문화콘텐츠를 이야기할 때 원소스 멀티유즈(One Source Muti Use)를 이야기한다. 하나의 문화자원을 가지고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 선배들은 이미 하고 있었던 셈이다. 또 그만큼 고전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영화 『春香傳』 의 홍보 전단지. 감독 이규환. 주연 이민, 조미령, 이금룡 등. 제작사 동명영화사-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춘향사당

  남원 광한루에 춘향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 누가 만들었을까? 1931년 남원권번 기생 최봉선이 발의해 춘향사당을 세운다. 남원권번의 예기들과 함께 2,000원의 돈을 모아 지은 것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현재의 금 시세와 비교해 보면, 7,000만 원 정도 예산이 소요된 것 같다. 1966년에 최봉선이 당시를 회고하는 기사가 있다. “처음 건립하기 위해 모금 운동을 할 때에는 일본 정부에서도 협조를 거절했고, 일부 군민들 역시 천한 퇴기의 딸 춘향의 사당을 건립한다고 점잖지 않다고 반대”한다. 그냥 뚝딱 지어진 게 아니었다. 당시에 신분제가 폐지되긴 했지만, 여전히 기생이란 천대받는 직업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품위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당시 신문지상을 보면 정기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자선공연을 펼친다. 자신들이 가진 기·예능으로 타인을 돕고 있다. 한편으로 사회일원으로 당당하게 자신들의 권리를 찾고 있다.

 

  부산의 이필우 기념상처럼 선배들의 업적을 기념할 줄 알아야 한다. 전주국제영화제에도 선배 영화인을 기리는 이런 상이 하나쯤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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