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11. 01:22ㆍ문화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1964년 12월 7일 일어난 무즙파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문: 무즙? 깍두기 만들 때 쓰는 조선무 말하는 것인가요?
답: 네. 당시에는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시험을 쳐야 했습니다. 자연과 시험 문제에서 엿을 만들기 위해 엿기름 대신 넣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문제가 출제됩니다. 이때 무즙이라고 답을 쓴 학생을 오답 처리하면서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문: 그럼 정답은 무엇이었나요?
답: 정답은 디아스타제(diastase)인데요. 사전을 보면 “녹말을 분해하는 효소이며, 아밀라아제를 약으로 만든 것의 이름이다”라고 나와요.
문: 단어가 생소하긴 하네요.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왜 문제가 된 것이죠?
답: 당시 신문을 보면 “학부형들과 국민학교 6년 담임선생들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교과서에는 무즙과 침에 디아스타제가 있다고 했다. 학생 99%가 무즙으로 썼을 것이다”라는 기사를 볼 수 있는데, 당시 시험은 4지선다 객관식이었고, 무즙도 보기에 있었습니다.
문: 그러니까 보기에 정답이 두 개 있었고, 무즙도 정답 처리를 해줘야 한다는 말이군요.
답: 그런데 무즙으로 답안을 오답처리하면서 안타깝게 중학교에 떨어진 학생이 발생하면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0.6점차로 떨어진 K군이 시험을 본 학교 교장을 상대로 입학시험 합격을 확인해 달라는 행정소송을 서울고법에 내요.
문: 꼭 소송을 해야 했을까요? 오류를 빨리 인정하고 답으로 인정해 주면 될 것 같은데요.
답: 당시 전체 수험생들의 70%가 무즙으로 답을 썼고, 커트라인에 걸려 낙방한 수험생의 학부형 50여 명이 연일을 시위를 해요. 또, 일부 특권층 학부형들의 압력으로 정답 처리를 이랬다 저랬다 바꾼 처사는 부당하다고 항의하는데, 책임을 지고 해결해야 할 교육기관들이 눈치만 보다가 사건을 더욱 키우게 됩니다.
문: 그만큼 입시경쟁이 치열했다는 말이 되겠네요.
답: 당시에는 초등학교 6학년부터 입시를 준비해야 했는데요. 다시 신문을 보면 “낙방 자모들 솥에 엿 들고 시위, 당시 교육감이 만약 무즙으로 엿이 되면 떨어진 수험생을 구제하겠다. 언약했기 때문”이라는 기사인데, 무즙파학부형들이 실제로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 온 것입니다.
문: ㅎㅎ 정말 우리나라 어머니들의 정성은 대단해요. 정답으로 인정해 주나요?
답: 그런데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학술원 등 권위 있는 기관에 실험을 의뢰하여 무즙으로 엿을 고을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발표했다. 문제는 당국자들이 이렇게 말하면 교과서가 잘못되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는 신문 논평을 볼 수 있어요.
문: 학부형들의 항의가 더 거세졌을 것 같은데요.
답: 자모들은 무즙으로 만든 엿을 들고 국회의장 집에까지 몰려가 항의를 합니다. 서울고법 특별부는 정답을 가려내기 위해 서울시교육위원회에 출장, 현장공판을 열게 되는데요. 기사 제목이 “법정서 따지는 자연과학 무즙재판”입니다. 재판 증인들의 증언이 긴박감을 느끼게 해 줍니다.
문: 어떤 분들이 증인으로 나왔을까 궁금한데, 식품 전문가가 나왔을 것 같다.
답: 중앙공업연구소 식품과장은 “이론상으로나 실제로나 엿기름 대신 무즙으로 엿을 고을 수 있다”, 남대문서 정보계장은 “학무국장이 만약 무즙으로 엿이 고아지면 상부에 건의 구제책을 강구하겠다고 한말을 들었을 뿐 김 교육감의 이야기는 들은 일 없다”라고 증언합니다.
문: 재판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답: 당연히 무즙도 정답으로 보아야 한다고 판시, 불합격된 39명에 대해 불합격 취소, 합격자임을 확인한다는 판결을 내립니다. 하지만 이 판결에 집행력은 없었습니다. 서울교육위는 대법원에 상고 의사를 밝힙니다. 이 판결로는 바로 입학시킬 수 없다는 말이죠.
문: 논란이 더 커졌을 것 같다.
답: 판결문이 송달된 뒤 대책을 세우겠다는 교육당국이 성의가 없다고 격분, 책상을 치고 서류뭉치를 밀쳐내며 울음을 터뜨리는 등 소동이 일어납니다. 당시 문교부장관은 “대법원의 올바른 판결과 법무부 등 관계당국의 법적 해석이 내려진 뒤라야 학생들이 구제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무즙 판결에 불복한 학교장 등이 대법원에 상고하면서 논란이 더 커집니다.
문: 소송도 소송이지만 어린 학생들이 상처가 많았겠어요. 결국 어떻게 되나요?
답: 대법원 항소를 취하하고 승소자 38명에 한해서 전입학 형식으로 우선 구제하는데, 중간에 소송을 취하한 50명의 처리에 대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1965년 5월 13일 승소한 학생이 지원교에 등교하나 구제대상은 더 확대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는데, 반전이 있어요.
문: 정리를 하자면 소송에서 이긴 학생은 구제가 되었는데, 소송을 하지 않은 학생은 구제에서 보류되었다는 말씀이네요. 어떤 반전인가요?
답: 그런데 20일 특권층 자제 15명을 덤으로 부정 입학시킨 사실이 드러나서 진상조사가 시작됩니다. 학부형 조모 씨의 말을 들어보면요. “무즙 관계로 합격권에 들고도 행정소송을 안 했기 때문에 지망학교에 못 들어간 아이들에 대해서는 냉담하면서 얼토당토않은 아이들을 입학시킨다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재판도 우스운 일인데 그 틈에 또 부정”을 했다며 당국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문: 진상조사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답: 덤으로 입학한 학생이 총 21명이었고, 학부형은 청와대 정무비서관, 공보비서관, 한국전력 사장, 국회문교공보위원회 전문위원, 기업인 등 저명인사의 특권층 자제로 밝혀집니다, 교장 재량으로 입학시킨 것이라고 발뺌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는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문: 정말 사건이 일파만파 커졌네요.
답: 당시 대통령이 직접 “무즙파동으로 청와대 정무, 공보비서관이 사임했는데 관계 당국자는 그대로 있음을 지적, 인책사임토록 지시”합니다. 또 무즙으로 엿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고관들의 감투도 벗긴다는 말이 유행하는데, 고위공직자 8명이 사임을 합니다.
문: 아까 소송을 하지 않은 학생은 구제되었나요?
답: 소송을 내지 않은 수험생들은 구제되지 않은 채 사건은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비슷한 문제가 재발하자, 서울시내 중고입시에 문제은행식 출제가 도입되고, 교직단체는 입시해방 캠페인을 벌이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근본대책을 세우라는 소리가 높아진다.
문: 중학교 입시에 왜 그런 문제들이 발생했을까요?
답: 당시에는 일류중학교가 곧 일류대학으로 가는 지름길로 통하던 시절이었고, 무즙파동이 모두 일류병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는 당시 신문 논평이 있습니다. 이후 1968년에 문교부장관의 7.15 폭탄선언으로 중학입시를 폐지시키고 추첨에 의한 무시험제도가 1969년 서울에서 처음 실시되었다는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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